# 31
날것 31화
나는 눈을 깜빡였다. 리안드로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말해.”
못한다.
이미 가주로서의 업무다, 후계자 수업이다, 뭐다 해서 쉴 틈도 없이 바쁜 사람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 집안에서, 그것도 사용인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곧 황성에 입궐해 엘레오노라를 만나야 하는데 하녀랑 엮이고 있어서는 안 됐다. 차라리 얼른 리안드로가 엘레오노라를 만나서 제 감정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그가 엘레오노라에게 푹 빠져 버린다면 내가 리안드로의 곁에 얼쩡거려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텐데.
“진짜 아니라니까요.”
“……그럼 말고.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말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가 보다. 나는 뜨끔했다. 그렇지만 이 어린아이에게 걱정을 끼칠 수야 없지.
“도련님, 저 되게 신경 써 주시는 거 아니에요? 감동했어요.”
“……뭐라는 거야.”
“아니면 말고요.”
“내가 언제 아니라고 했어.”
리안드로는 새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대꾸했다. 나는 그의 깜찍함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때, 창밖에서 천둥소리가 우르릉 들려왔다. 창문을 거세게 때리는 빗소리 덕분에 낮게 가라앉은 리안드로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안 들려요.”
“여행이라도 가자고.”
“여행이요?”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안 그래도 근거 없는 스캔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그 와중에 여행을 가자고? 아니 될 소리였다.
“응. 뭘 그렇게 놀라. 예전에 약속했잖아. 해변 딸린 별장에 놀러 가자고.”
머리카락을 빗겨 주던 손길이 좋았던 모양인지 리안드로는 느른하게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적절하게 거절할 만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썼다.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누가 하녀랑 여행을 간다고?
“왜 대답이 없지? 이벨리나.”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그가 나를 독촉했으나 나는 바닥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금세 인내심이 바닥이 난 그가 칭얼거리듯 답을 요구했다.
“대답.”
“……그런 거는 보통 하녀랑 안 가요.”
나는 기어 들어갈 듯 작게 대꾸했다. 그러자 리안드로의 거친 손바닥이 내 뺨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살며시 내 턱을 그러쥐어 제게로 끌어당겼다.
나는 어색해 보이지 않게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데구르륵 눈을 굴려 세차게 창을 때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약속했잖아. ……왜 날 안 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던 걸 그만두고 리안드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
속은 16살짜리 꼬맹이인데, 어쩜 저렇게도 껍데기는 성숙한 것인지? 이미 완성형인 외모가 새삼 감탄스러웠다.
“비가…… 와요.”
“그러네.”
“비가 와서 놀러 갈 수는 없겠네요.”
“누가 지금 당장 가자고 했어?”
“앞으로는 당분간 계속 장마일 거라고 하던데요.”
“휴가를 내면 돼. 날이 맑아지면 같이 떠나자. 저택을 떠나는 건 실로 오랜만이라 좀 들뜨네.”
“……나, 날이 언제 갤 줄 알고 그러세요.”
“초여름에 장마는 항상 있어. 곧 날은 좋아질 거야.”
“그럼 만약에 계속 비가 오면…….”
“이상하네. 왜 바로 대답을 안 하지?”
리안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제 얼굴을 내게 가까이 밀착시키며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은 인간을 속이려고 드니 식은땀이 비죽 흘렀다. 어떡하면 좋지. 다 됐으니까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가고 싶다. 도망가고 싶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없, 없거든요?”
“다 말하라고 했다.”
“없다고요!”
“……귀청 떨어지겠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아, 그게 아니라, 애, 애초에 하녀랑 둘이서 놀러 다니는 귀족이 어디 있어요?”
“둘이서? 그건 생각 못 했는데.”
아, 젠장. 괜히 설레발 쳤네. 나는 머쓱해져 볼을 긁적였다. 여전히 내 턱은 리안도로의 손아귀에 있었고, 리안드로는 눈을 반짝거리며 얼굴뿐만 아니라 상체를 숙여 내게 완전히 달라붙었다. 청량한 그의 향기가 훅 들어와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근데 좋은 생각 같아.”
“다시 생각해 보세요.”
“해 봤는데 좋은 것 같아.”
“말한 지 1초도 안 됐는데…….”
“안 들려. 이미 넌 예전에 나랑 약속했어. 했으면 지켜.”
이거, 대화가 아예 안 통하는 것 같은데? 우리 둘이 같이 붙어 있어 봤자 지금으로서는 좋을 것 하나 없다. 어떻게 설명하면 리안드로가 잘 받아들여 줄 수 있을까. 되도록 나와 엮여서 추문이 돌고 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일단…… 일단은 날씨가 좀 좋아지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요. 도련님 또 바빠지실 수도 있잖아요.”
“내가 좀 쉬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이레네 부인……?”
“그치는 그럴 만한 위치가 못 돼.”
“집사님……?”
“마찬가지.”
“보좌관님이요.”
“자꾸 꼬투리를 잡는 게 역시 수상하네.”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스르륵 그에게서 멀어졌다.
“저 슬슬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왜?”
“음…… 빨래……? 그래, 빨래할 게 엄청 많아요.”
“…….”
그가 창턱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다가오는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나는 그가 내게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넓디넓은 방을 뛰다시피 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가 문 사이로 빼꼼 눈만 내민 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 가 볼게요.”
“…….”
문을 닫기 전에 본 리안드로는 혈색 좋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홀로 방 안에 남겨진 그가 창가를 바라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픽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빈정거렸다.
“비가 오는데 빨래를 하겠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네.”
* * *
다음 날이었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나는 빨래방의 한편에 앉아 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바느질 자체에는 이제 꽤 자신감이 붙었는데 아직도 바늘구멍에 실을 넣는 기초적인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시야를 가늘게 좁히고 실 끝에 침을 바르던 그때였다. 빨래방의 두터운 나무문이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벨리나, 여기 있나?”
리안드로는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로 빗물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었다. 입고 있던 셔츠 또한 쫄딱 젖어 그의 몸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다.
예고도 없이 등장한 리안드로 덕분에 빨래방의 하녀들은 놀라 까무라쳤다. 집주인이라는 사람이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으니 허둥지둥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하녀들은 당장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치맛자락이며 제 머리 매무새를 다듬었다. 리안드로의 근처에 있던 하녀는 한쪽 구석에 개어 두었던 수건을 꺼내 리안드로에게 내밀었다.
“도련님, 이곳은 어쩐 일로…….”
“왜겠어.”
리안드로는 하녀가 건넨 수건을 손으로 물렸다. 그리고 시야를 가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실내로 들어왔다.
하녀는 리안드로에게 거절당한 것이 못내 민망했던지 입술을 씰룩였다.
“종을 울렸는데-”
그가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비에 젖어 질척질척해진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오지 않아서, 찾으러 왔어.”
리안드로의 시야에는 주르륵 줄을 지어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녀들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그는 하녀들의 옆에 서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내게 곧장 다가왔다.
“나 봐.”
“……도련님.”
“너 찾으러 다녔다고.”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보고 듣는 이가 많았다. 후에 하녀들이 대체 뭐였냐고 꺅꺅거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리안드로가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뺨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내 주위 시선을 깨닫곤 손을 내렸다.
“왜 하다 말아?”
그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하녀들은 여전히 슬쩍슬쩍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입술, 하면 안 되잖아.”
“그렇죠…….”
그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이상했다. 저렇게 입꼬리를 휘어 올리며 웃는데 왜 오한이 든담. 나는 부르르 떨리는 몸을 감싸 안았다.
리안드로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물었다.
“머리 안 말려 줄 거야?”
“…….”
“안 말려 줄 거냐고. 옷도 다 젖었는데.”
“말려 드려야죠…….”
“신발까지 다 축축해.”
“그러게 왜 우산을 안 쓰셨어요?”
“귀찮아서.”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걸리면 걸리는 거지.”
“그러면 안 되죠! 얼른 옷 갈아입으세요.”
“응. 그럼 가자.”
“저, 저도요?”
“날 혼자 보내려고? 너 찾으러 다니느라 이렇게 젖었는데?”
“그렇긴 한데, 제가 아직 바느질을 하다 말아서…….”
그는 소매를 붙잡고 있던 손을 내려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번쩍 고개를 들더니 얼른 가 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이비,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 보도록 해.”
나는 굳이 내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어 깍지를 끼는 리안드로를 노려보았다. 이것이야말로 권력 남용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렇게 보조개를 보이며 웃어 봤자 그저 귀엽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대뜸 찾아와서 나를 데려가다니, 후에 하녀들에게 시달릴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잘됐다. 그렇지?”
“아니요.”
“꼭 한마디를 안 져.”
“도련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리안드로를 따라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을 맞잡고 계단을 오르다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던 이레네 부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리안드로에게 인사를 건네다가, 그의 뒤로 가려진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치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레네 부인은 나를 스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다 나한테 그래…….”
“뭐라고? 못 들었어.”
“혼잣말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리안드로가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내가 겪고 있는 일을 알려 줄 수가 없었다.
빨리 엘레오노라를 만나 주라. 그래서 내가 시달리지 않도록 해 줘.
그는 나를 제 침실로 데려갔다. 나는 드레스 룸에서 그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나왔다. 리안드로는 소파에 앉아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추우세요?”
“여름인데 추울 리가.”
“여기 갈아입을 옷이요.”
나는 마호가니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마른 수건을 펼쳐 뚝뚝 떨어지고 있는 물기를 닦아 냈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내가 건넨 옷을 받아 들었다.
“어디 가지 말고 있어.”
“제가 어딜 가요?”
“어제는 허락도 안 맡고 가 버렸잖아.”
“……오늘은 안 그럴게요. 그렇게 요란하게 데려오셔 놓고 제가 어딜 가겠어요.”
“하긴, 그렇지?”
리안드로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그는 새로 꺼낸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뒤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가 털썩 주저앉자 나는 소파 뒤에 서서 그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어느 정도 물기가 말라 나는 손을 넣어 그의 머리카락을 빗었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붉은 입술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늘은 일 안 하세요?”
“네가 신경 쓰여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역시 어제 되도 않는 변명을 둘러대고 빠져나왔던 게 리안드로의 신경을 건드린 듯하다. 그는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팔을 뒤로 뻗어 땋아 내린 내 머리채를 만지작거렸다.
“당분간 여행은 못 갈 것 같아. 어제 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슬슬 작위를 이어받을 준비를 하라고.”
리안드로가 공작이 되는 나이는 17살이었다. 반년 뒤면 드디어 원작이 시작된다.
썩어 가는 얼굴을 가면으로 반쯤 가리던 원작과 달리, 지금의 리안드로는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엘레오노라를 만나면 어떤 전개가 이루어질까.
엘레오노라가 리안드로에게 곧바로 이성적인 호감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리안드로를 만나기 전부터 디에고에게 푹 빠져 있다는 설정이 있으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희망은 있지 않을까? 그녀가 마음을 돌려 리안드로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결말일 터.
물론 그럼에도 결국 리안드로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 그의 뒷골을 각목으로 내리쳐서라도 가두어 놓아야지…….
“뭐야, 소름 돋는데. 갑자기 한기가 돌아.”
“네?”
“감기 걸리려고 이러나.”
“담요 가져다 드릴까요?”
“됐어. 그 정도는 아니야.”
리안드로가 코를 훌쩍거렸다. 어쨌거나 당분간 그가 내게 여행을 떠나자는 둥의 헛소리는 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래, 엘레오노라 만날 준비나 해라. 나한테 칭얼거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