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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43화 (4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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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 43화

“이벨리나, 릴리아나. 접시에 요리 담을 준비하렴. 곧 식사가 나갈 테니.”

주방장의 지시에 따라 트레이에 요리를 놓으면 그다음은 식사 시중을 드는 하녀들과 하인들의 몫이었다. 힘이 조금 과한 릴리가 푸딩 하나를 짓뭉개고 익지도 않은 단호박을 으스러뜨리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별 탈 없이 식사 시간이 흘러갔다.

황태자가 오기 전까지 정신없이 일했던 것에 대한 보상인지, 그 이후로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물론 먹는 입이 많아지니 씻어야 할 접시들 또한 많아져 조금 고생하기는 했다.

그래도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는 게 어디야.

나는 늦은 점심을 먹은 뒤 릴리와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바깥출입은 삼가라는 명을 받은 터다.

어차피 근래 들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청소를 했기에 퇴근 후에는 숙소에서 쉬고 싶었다. 그런 명령이라면 감사히 따를 수 있었다.

“무거워.”

“거짓말.”

나는 릴리를 거의 베고 눕다시피 하며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이왕이면 얼른 글을 다 떼서 역사서 같은 것을 읽고 싶다. 그러면 원작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사건 전개를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릴리는 내가 단어를 틀리게 읽을 때마다 지적하며 그것을 정정해 주었다. 귀족 출신 기사를 옆에 데리고 다녔더니 이런 점은 참 편리하고 좋았다.

이 세계에서 평민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글을 몰라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데다 책 자체도 상당히 비쌌기 때문이다.

글만 배워도 가질 수 있는 직업의 질이 달라질 수 있기에 나는 기꺼이 릴리에게 글을 배웠다.

귀족으로서 고등 교육을 받은 릴리는 내게 스스럼없이 저가 가진 지식을 나누어 주었다.

물론 왜 차를 마실 때의 자세나 걸음걸이 따위까지 가르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잠자코 그녀의 가르침을 따랐다. 공짜로 배우는 입장에서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애 안 오네.”

“누구?”

“아까 주방에서 뛰쳐나갔던 애.”

“아, 그러네. 어디 갔지?”

릴리는 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려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동화책을 덮으며 창밖을 보았다. 어쩐지 불안했다.

“지금 몇 시야? 해가 졌는데.”

“진짜 누구 방에 찾아간 거 아니야?”

“설마……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했으려고.”

“설마 싶지? 그런 애들 생각보다 많다.”

나는 고개를 돌려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눈으로 내게 묻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정말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릴리는 그녀 자신도 귀족 출신이기에 본 것이 많겠지.

하기야 시골구석에서 할아버지 남작 시중이나 들면서 살다가, 본인들과 연령대 비슷한 데다 지위, 외모, 무엇 하나 빠질 데 없는 황태자 일행을 보게 된다면 당장에 눈 돌아가는 것을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치 앞의 미래도 예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적당히 낮은 지위의 귀족이었다면 어찌어찌 애인으로 들어가거나 할 수야 있겠지만, 황실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그런 걸 바라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거 정말…… 생각 없는 짓 같은데.”

“인생 말아먹고 싶은가 보지.”

“우리가 찾아보면 안 돼?”

“너도 인생 말아먹고 싶어?”

“……아니, 그래도 한방 쓰는 애잖아.”

“나갔다가 눈에 띄면 그때는 훅 가는 거야.”

“응. 그냥 가지 말자.”

“…….”

릴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최근 1년 넘도록 같은 방을 써 왔던 하녀가 내심 신경 쓰이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필터 없이 거칠게 말을 내뱉어서 울리기도 했고.

나는 다시 동화책을 폈다. 그러면서 책은 읽지도 않고 힐끔힐끔 릴리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 순간 릴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회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더 늦기 전에 찾아보자.”

“응! 최악의 상황만 아니길 바라 보자.”

“손님방 근처는 가지 마.”

그리하여 해질녘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하며 분위기 있게 독서나 할 수 있었던 시간에, 우리는 숙소 밖을 나오게 되었다.

얼마 전 연서를 보냈던 기사가 나를 찾을까 염려해 릴리가 내 대신 바깥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성안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주방에도 빨래방에도 하녀는 없었다. 나는 지나다니는 하인들을 붙잡고 하녀의 행방을 물었다. 아무도 그녀를 본 사람이 없었다. 젠장, 손님방 근처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딱 복도만 둘러보자. 그러고도 못 찾으면 그냥 숙소로 돌아가는 거야. 이미 염려하고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거기서부터는 내가 어떻게 해 줄 요량이 못 된다. 헛된 꿈 꾸다가 본인 인생 망치는 거지, 뭐.

나는 계단을 올라 황태자 일행이 묵고 있을 층으로 갔다.

그리고…….

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일까? 성안을 뒤집듯이 찾아 헤매도 나타나지 않던 하녀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한낮에 그녀가 꿈꾸었던 것과 같은 핑크빛 전개는 없었다. 그녀는 열려 있는 방의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바른 대로 말 안 해? 남작은 귀빈 접대를 이딴 식으로 하는 건가? 그래?”

“저는,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에요! 나리, 제가 당장 베갯잇을 바꾸어 드리겠으니 노여움을 제발 풀어 주세요.”

“노여움? 하, 이게 노여움으로 보여? 나는 그저 이 무례함에 치가 떨릴 뿐이다!”

“새, 새로운 베갯잇으로, 베갯잇으로…….”

“이게 지금 바꾸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멍청해서 못 알아들어? 수준하고는.”

하녀에게 호통을 치는 남자는 황태자 일행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저 건방진 언사와 화려한 차림을 보아 황태자의 측근이라는 귀족인 듯하다.

나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파악해 보려 노력했다. 귀족 아래에서 잘못을 빌고 있는 하녀, 사내는 손찌검이라도 할 것처럼 사나웠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사내가 나온 방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청소한 방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오기 전에 둘러봤을 때에는 별문제가 없었는데? 하녀를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길이 매서워 내 가슴이 다 쿵쾅거렸다.

“나리, 무슨 일이신가요? 그 방은 제 담당이었기에…….”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서성거릴 바에야 차라리 얼른 혼나는 게 낫다. 무엇인지 가늠도 가지 않는 내 잘못으로 동료 하녀가 혼나는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왜 오지랖을 부리느냐는 릴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비겁하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기 위해 두 손을 곧게 포갠 뒤 눈을 질끈 감으며 하녀의 옆에 섰다. 아무리 푸른 피 흐르는 귀족이라고 한들, 제 성도 아니고 남작의 성에서 뭐 어쩌겠느냐고.

“너는 또 뭐야? 감싸 주기라도 하겠다, 이건가?”

“그게 아닙니다. 정말 제가 아침나절에 청소한 방이에요. 이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기는 왜 없단 말인가? 천한 것이 멋대로 문 두드려 잠을 깨워 불쾌했던 참이다.”

“…….”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꼽나?”

“……아니요. 아닙니다.”

“눈물 나는 우정, 보기 좋구만. 이봐, 넌 이만 꺼져.”

사내는 제 발치 아래에 있던 하녀를 걷어찼다. 하녀는 겁을 잔뜩 먹었는지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비명을 질렀다. 사내는 제 바지에 더러움이 묻었다며 불쾌해했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사내가 손을 들어 하녀의 뺨을 때리는 시늉을 하자 하녀는 꺅꺅거리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뒤 걸음을 서둘러 사라졌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 나는 심호흡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사내의 덩치가 그리 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평생 햇빛 한번 보지 않은 듯 유약한 인상이라 세게 맞아도 어디가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너, 가까이 와 보거라.”

사내가 몸을 틀어 나를 방에 들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를 따랐다. 곧바로 한 대 맞을 준비를 했던 터라 내심 놀랐다.

사내는 가락지 여럿을 낀 손가락으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베개를 가리켰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베개를 살펴보았다.

…….

새하얀 베개는 아무런 결점 하나 없이 깨끗하고 뽀송하기만 했다.

“죄송한데 어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불쌍하게는 보이겠지 싶어서였다.

하, 참. 사내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상당히 불쾌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보이지 않나? 거기 왼쪽 가장자리 말이야. 점이 있잖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베개를 들여다보았다. 아주 자세히 보니 희미할 정도의 붉은 자국이 있었다. 난 그제야 깨달았다. 이 귀족 나리는 그저 심심풀이로 시비를 걸고 싶었던 것이다. 이건 핑계에 불과했다.

나는 사내에게 걷어차였던 하녀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마 그녀는 다신 헛된 희망을 품고 귀족 사내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하녀 애가 아니라 내 자신을 걱정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굽히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 보입니다. 잘 보이네요.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어요. 당장 새로 갈아 드리겠습니다.”

“그딴 건 이제 되었다.”

“네?”

거봐. 처음부터 핑계일 뿐이었잖아.

“이봐, 너. 얼굴 좀 들어 봐라.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발견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곱구나.”

싫은데……? 그러나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내 턱을 그러쥐고는 세심하게 내 얼굴을 살폈다.

“자, 어떻게 할 셈이냐? 남작에게 전해 매질이라도 할까?”

저보다 약한 이를 괴롭히며 쾌감을 느끼는 부류. 마치 선택을 내게 맡기겠다는 식이어서 더 짜증이 일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다.

그깟 하녀직이 대수겠는가. 사내가 내게 조금이라도 더 손을 대려고 한다면 내가 선수를 칠 것이다. 하녀 일을 구하느라 좀 힘이 들기는 했지만, 이런 취급을 받을 바에야 내가 먼저 그만두고 말지.

“그게 아니면…… 네 몸으로 나를 달래 볼 생각은 없나?”

“없는데요.”

나는 곧바로 튀어 나가듯 거절했다. 사내는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안 그래도 너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되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가냘픈 외모와는 다르게 힘 하나는 좋은 나다. 여차하면 릴리가 나를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앞뒤 안 가리고 사내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사내는 이윽고 성을 내며 나를 깔아뭉개려고 했다. 나는 곧바로 근처에 놓여 있던 재떨이를 더듬거리며 움켜잡았다.

“건방진 년!”

“-에사드.”

그리고 그때였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날카롭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와 순간 눈이 마주친 듯했다.

나는 재떨이를 번쩍 들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사내 역시 한 걸음 물러났다.

“전하! 이름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내가 왜? 네 녀석과 친하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에사드라는 것은 사내의 가문 이름인 듯하다. 사내는 섭섭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금빛 눈을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만 일어나라. 바닥 차다.”

에사드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방의 문턱에 기대서서 팔짱을 낀 디에고는 아래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디에고가 내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재떨이를 바닥에 내려 두고 발로 그것을 멀리 밀어냈다. 그러고는 주춤주춤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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