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날것 45화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시민인 나 자신이 매우 안쓰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게 왜 나를 하녀로 빙의시켰어. 이왕 빙의될 거면 나도 귀족이 좋은데…….
나는 고심하며 내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이걸 마셔야 디에고가 날 보내 줄 것 같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하녀를 불러다가 술친구를 삼는단 말인가.
이미 함께 있은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는 내게 손 한번 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렴풋이 나는 그가 내게 흑심을 품을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결연히 술잔을 들이켰다.
“크으-”
“독이라도 마시나?”
혓바닥을 감싸는 진한 알코올 향에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디에고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술을 원샷으로 마셨다. 순간 어지러움이 핑 돌았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은 했다. 그러나 맛은 영 별로였다. 독하기만 할 뿐이었다.
“표정하고는.”
“맛, 맛있…… 다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네요.”
“어른의 맛.”
“그다지…… 아, 아니에요.”
그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혼자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아무래도 아예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듯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입안에 남은 쌉싸래한 술의 향기에 괴로웠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디에고의 뒤편, 침대 근처 탁자에 물 주전자가 보였다.
“전하, 물 좀 마셔도 될까요?”
“그러든지.”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그의 옆을 지나쳤다. 유리잔에 물을 담아 한 모금 마셨더니 좀 살 것 같다.
디에고는 뒤를 돌아 내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지었다. 평소라면 그럴 리 없을 텐데 아무래도 술기운이 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원작 소설의 남주인공 디에고라고. 리안드로를 서브남주로 제쳐 버리고 엘레오노라를 채가는 바로 그 디에고. 그런 그와 마주 웃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뭘 웃어?”
그가 자기는 단 한 번도 웃은 적 없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위로 올라간 눈매 때문인지 어쩐지 상당히 매서워 보였다.
“아니요. 안 웃었는데요.”
“웃었는데.”
“아닌데요.”
“그럼 내가 거짓이라도 말했다는 소리냐? 황족인 내가?”
“……사실 웃었어요.”
나는 급속히 쭈그러들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혀를 쯧 차고는 새빨간 입술을 열었다.
“이쯤 되면 충분하지 않나. 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셈이야.”
“……?”
“또 모르는 척하는 것 봐라.”
“네?”
“……정말 이상한 녀석이로군. 오면서 들렀던 영지마다 저를 안아 달라 밤에 내 방을 찾아온 여자가 얼마나 되는 줄 아느냐?”
“열 명? 아, 아니, 스무 명……?”
“진짜 그 숫자를 맞춰 보라는 게 아니다.”
나는 양손가락을 쭉 펴고 추측했으나 디에고는 기가 찬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 딸자식 헐벗기고 보낸 귀족들도 있었어.”
“굉장하네요.”
“뭘 감탄하고 섰어?”
내게는 정말 소설 속에서나 읽고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을 디에고는 직접 경험해 봤다는 것 아닌가. 남주인공을 떠나서 황태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 그렇다면 공작씩이나 되는 리안드로는 또 얼마나 많은 추파를 받을 것인가.
어렸을 때 잠시 앓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리안드로는 디에고와 더불어 제국의 일등 신랑감을 앞다툴 만큼 매력적이지 않나.
“또 다른 생각을 하는군.”
“헉, 어떻게 아셨죠?”
“……언제쯤 아양 떨면서 달라붙나 가만히 보고 있자니까- 뭐? 말 한마디 없더니 이제는 가겠다고?”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다. 내게 관심이 없는 거구나 하고 안심했더니, 그게 아니라 실은 내가 저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아봤으면 한다. 아무리 침 나오도록 멋지게 생겼다고 한들, 결국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디에고였다. 무조건 리안드로 편인 내가 디에고와 엮일 수는 없지.
“제가…… 갑자기 속이 너무 안 좋고 어지러워서…… 죄송합니다.”
절반 이상 담겨 있던 술을 들이켰더니 계속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휘청이는 척을 했다.
인간쓰레기가 아닌 이상 만취한 여자를 품을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를 좋아한다고는 해도 정도를 지키는 디에고를 알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이런.”
한데 디에고는 기다란 눈을 치켜뜨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고 소리치면서 손을 주전자 쪽으로 뻗었다. 만약 그가 나를 만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재미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리안드로와 재회하는 것은 고사하고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디에고는 침대를 바로 뒤에 두고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나보다 머리 하나하고도 반은 더 큰 청년이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니 참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가겠다고.”
“네.”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
“…….”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뒤로 조금만 손을 뻗으면 주전자가 코앞이었다. 여차하면 또 원작을 비틀어 버릴지도 모르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남주인공이 혼수상태에 빠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잠시간 침묵이 일었다. 오히려 그 고요함이 나를 더 두렵게 했다.
“……알았다. 나가 봐.”
“네! 안녕히 주무세요. 평안함 밤 되시기를!”
“대답 밝게 하지 마라. 기분 이상하다.”
하기야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디에고를 거부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마 디에고에게는 색다른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까지 내가 알 게 뭔가. 나는 오는 여자 막지 않는 디에고의 무수한 과거 리스트에 추가될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가 보겠습니다.”
나는 디에고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치맛자락을 쥐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니까 젠장, 나는 차분하게 움직이려고 했는데…….
“……으으, 씹.”
“씹?”
몸을 숙였다가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현기증이 돌면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차라리 뒤로 넘어갔으면 다행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살겠다고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붙잡았다.
하필이면 내가 잡은 것은 디에고의 헐렁한 셔츠였다. 만약 그가 단단히 나를 잡아 주었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나와 함께 넘어졌다. 나는 그를 붙잡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 인생 최고의 위기였다. 제국의 황태자를 깔고 엎어진 것도 모자라서, 나는, 나는…….
“흐응.”
“……죽을죄를.”
“면전에 대고 욕을 하네. 게다가…….”
디에고의 금색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를 따라 나 역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나는 입술을 세게 물었다. 어떻게 넘어지면 이런 상황이 벌어진단 말인가? 내 손은 디에고의 중요 부위에 놓여 있었다.
“색다른 유혹 방법, 마음에 들었다.”
“실수했습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가능하면 시간도 좀 멈추었으면 한다. 나는 얼른 손을 빼내 등 뒤로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디에고가 더 빨랐다. 그는 내 손을 낚아챘다. 지은 죄가 있어 나는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다시 해 봐.”
“전하, 자비를 내려 주세요.”
“다시 해 보라니까.”
디에고의 다른 손은 이미 내 허리 근처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지는 게 느껴졌다. 한참 돌고 있던 술기운도 싹 사라졌다.
나는 힘을 주어 그에게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그는 보기보다 강한 내 힘이 놀라웠던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놓아주세요.”
“이렇게까지 해 놓고?”
허리에 놓인 손이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얼른 그의 손을 찰싹 내리쳤다.
“아, 너…… 손이 맵군.”
디에고가 손을 거두었다. 그는 제 손을 감싸 쥐며 바람이 빠진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깔고 있을 셈이야?”
갈라져 나온 음성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디에고가 누워 있는데 감히 하녀인 내가 그를 내려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발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디에고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턱을 괴고서 나를 훑어 내렸다.
“흥미롭다.”
저는 그다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토를 달고 싶었다. 술 한 잔 같이 마셔 주고 나가려고 했던 건데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시도는 좋았어.”
어쨌거나 그는 황족의 얼굴에 대고 쌍욕을 한 부분은 넘어가 주기로 한 듯했다. 그것을 제외하고서라도 나는 그에게 코를 박고 사죄를 해야 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정말 죄송해요, 전하.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되었으니 일어나.”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뭘 또 그렇게까지. 두 번 말하는 것 싫어한다고 했어. 일어나라.”
나는 디에고의 말에 따랐다. 다만 이 방을 나서기 전까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더 이상의 실수는 없어야 했다.
“무얼 갖고 있지?”
디에고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이 가슴께로 다가오고 있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손이 닿은 곳은 내 가슴이 아니라 넘어진 탓에 쏟아져 나온 목걸이였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예전 주인님이 주신 거예요.”
나는 바다색의 보석을 감싸 쥐었다.
“일개 하녀가 가지고 있기에는 지나친 것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팔 수는 없어요. 소중한 거예요.”
목걸이에 달린 푸른빛 보석은 리안드로를 저절로 떠오르게 했다. 나는 감상에 젖어 들었다. 빈털터리가 되었을 적에도 품에 간직했던 목걸이였다. 내다 팔든지 알아서 하라며 툴툴거리던 어린 소년이 생각나 희미하게 웃음이 났다.
“감히.”
문득 디에고가 명백하게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냈다. 나는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금빛의 형형한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앞에 두고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여자 경험이 많기로서니 마음까지 읽을 줄을 아는 걸까. 나는 내심 놀랐다.
“사내로군. 그렇지?”
나는 질문을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디에고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그 목걸이 주인.”
“아…… 사내요? 음, 아마 지금쯤이면 그렇겠네요.”
그것보다 이 목걸이의 주인은 당신과 아주 관계가 깊은 사람이란다.
물론 디에고에게 리안드로의 저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모든 것은 황제의 사주 아래 이루어졌으니까. 그 당시 디에고는 엘레오노라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던 어린아이였다. 아마 원작을 따른다면 디에고는 저주를 받아야 했던 이가 실은 본인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건방진 것. 네깟 녀석 생전에는 다시없을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데 이 나를 앞에 두고 지나간 연인 생각을 한단 말이냐.”
“연인이요?”
엄청난 억측이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리며 도리질을 쳤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추측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것도 방금 전에 내 밑천을 만져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