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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60화 (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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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 60화

* * *

결국 나는 리안드로와 함께 말을 타게 되었다. 그는 말의 안장에 먼저 올라탄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과 힘줄이 솟은 팔뚝을 붙잡자 몸이 깃털처럼 사뿐하게 들렸다.

리안드로는 나를 제 앞에 앉히고 말의 고삐를 쥐었다.

“저 처음 타요. 처음 타는 거예요.”

“두 번 말 안 해도 알아들어.”

“무섭다고요.”

나는 말의 갈기를 움켜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꿀렁꿀렁 움직이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다. 허리를 구부렸더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아 나는 등을 곧게 폈다. 그러나 곧이어 엉덩이가 저려 왔다.

“땅만 보면 멀미 난다.”

리안드로의 말에 나는 얼른 얼굴을 들었다. 그래, 좀 타다 보면 편해지겠지. 게다가 내가 직접 모는 것도 아니고 리안드로가 내 뒤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지 않은가.

“많이 불편해?”

“네. 근데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얼굴은 영 죽겠다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버틸 만해요.”

주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나 혼자서 찡찡댈 수는 없었다.

기사들과 리안드로는 단련이 된 몸이고 나는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족과 그의 기사들 사이에서 하녀 출신인 내가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한테 등을 기대 봐. 그럼 좀 나을지도 모르지.”

“괜찮아요.”

“기대래도.”

나는 말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움찔거리다가 결국 리안드로의 말을 따랐다. 내 몸이 편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리안드로의 말대로 그의 너른 가슴팍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그러나 리안드로와 나 사이에 간격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기대려고 해도 그의 가슴팍이 꽤 멀었다. 그래서 나는 엉덩이를 조금씩 움직여 뒤로 자리를 옮겼다.

“……으음.”

순간 리안드로가 이상한 소리를 흘렸다. 개의치 않고 나는 편안한 자세를 잡으려고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그의 가슴에 기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각도를 찾아냈다. 이 자세라면 뻑뻑해진 허리도 잠시 동안은 쉴 수 있을 것 같다. 하아, 나는 만족감에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벨리나…….”

하지만 아무래도 과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모양이었다. 리안드로의 목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질척이는 숨소리마저 머리 위로 닿고 있었다.

고개를 위로 꺾어 리안드로를 올려다보자 그가 이를 악물고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

기껏 자세를 바꿨는데 움직이지 말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리안드로를 빤히 쳐다보고 있음에도 그는 정면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킬 뿐이었다. 동대륙에서 건너왔다는 백자 도자기처럼 새하얀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서 거무죽죽한 낯빛이 되었다.

나는 내리쬐는 햇살에 부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물빛 눈을 쫓았지만 끝끝내 리안드로는 나를 외면했다. 평소에도 저 혼자 난리를 치는 인간이라지만 지금만큼은 영 이상했다. 왜 저러는 거야?

“너무 가까워요?”

“아, 아니. 응, ……아니.”

질문을 던졌지만 리안드로는 ‘응’과 ‘아니’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말을 타 본 게 난생처음이어서 리안드로도 나만큼 불편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했다.

“그럼 앞으로 좀 갈게요.”

“……움직이지 말라니까.”

“죽을상을 하고서 말씀하셔 봤자…….”

“잠시만 기다려. 앞에 돌부리가 있어.”

리안드로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입술 밖으로 퍼져 나오는 열기 가득한 한숨에 어째서인지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알겠어, 요!”

대답하자마자 말이 움직이는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고삐를 잡고 있는 리안드로의 팔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떴다.

쿵!

말은 손쉽게도 장애물을 피했지만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몸을 마구 들썩거렸다.

“악!”

“놀랄 필요 없어. 괜찮다.”

리안드로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나는 그의 힘에 의지해서 납작 엎드려 안장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것은 멈출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리안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리안드로는 내게 앞이나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또 하나. 제기랄, 무슨 길이 이렇게 험해.”

“얼마 전에 비가 와서 그런 게 아닐, 까요? ……으앗!”

말하는 도중에 또 말이 튀어 올랐다. 바로 앞에 진창이 있었다. 나는 혀를 씹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안정적인 자세를 잡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허리를 세웠다.

“…….”

나는 리안드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리안드로와 몸을 딱 붙이고 있으면 그가 움직이는 흐름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움직이지 말…… 라고 했잖아.”

“……아, 저기. 제가 그러니까…….”

“말을 해도 꼭 무시하지.”

“…….”

“……미안.”

리안드로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사과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울퉁불퉁한 길가 덕에 서로의 숨소리가 엉겨 붙을 만큼이나 단단하게 밀착된 몸. 계속되는 흔들림에 내 몸과 그의 몸이 비벼지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마찰은 자극적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몸을 달싹이기도 하고 리안드로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역효과만 냈다. 처음 타 본 말의 위에서 내게 주도권이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리안드로는 딱딱하게 굳어져만 갔다.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그는 괴로움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아, 제발.”

“오, 주여.”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잡았다. 새삼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힘겹게 느껴졌다. 엉덩이에 적나라하게 닿은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끙끙거리며 쌓아 온 ‘우리 공작님은 아직도 어린 애야.’ 하는 식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젠장. 나는 타오를 듯 붉어지려는 얼굴을 가렸다. 닿지 않으려고 앞으로 조금 움직여 보았지만 오르막길이어서인지 별 소용이 없었다.

“난…… 경고했어. 움직이지 말라고.”

“마, 맞아요. 이게 다 제가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거죠.”

어색한 침묵을 깨고 리안드로가 불쑥 내뱉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제야 왜 그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내게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는지 알겠다.

“끝이 보입니다! 근처에 개울가가 있으니 오늘은 그곳에서 쉬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드디어 숲을 벗어났다. 중간에 잠깐 한바탕 결투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고도 상당히 오래 걸렸다. 나는 긴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이런 어정쩡한 자세로 몇 시간은 못 버티겠다.

“여기 즈음이 좋겠군. 나무 아래에 천막을 쳐라.”

어느 정도 말을 달려 개울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리안드로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잠시 멈춰 섰다. 기사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주변이 안전한지 확인하곤 천막을 세웠다.

리안드로는 말에서 먼저 내린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주한 그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도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아는 듯하다.

나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보이며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허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 하자 몸이 휘청거렸다. 처음 해 본 승마에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리안드로가 쓰러지듯 균형을 잃은 내 몸을 받아 들자, 나는 슬쩍 눈을 내리깔아 그의 중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민망할 정도로 튀어나와 있지는 않았다.

“……어딜 보는 거야. 아까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아, 네. 그러시구나.”

“아무한테나 그러는 것도 아니고.”

“아, 안 물어봤어요.”

“그냥 내가 알아 달라고 하는 말인데.”

그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다 커 가지고 그런 어린아이나 할 법한 행동이라니. 나는 토라진 그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알겠어요, 알겠어. 저한테만 그러시는구나.”

나는 고개를 대강 끄덕거리며 아무 말이나 줄줄 내뱉었다. 그러다가 내가 한 말을 깨닫고 놀라 입을 막았다. 이래서 사람은 생각을 먼저 하고 말을 해야 한다.

리안드로는 주먹을 쥔 손을 입술에 대고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서로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다 준비되었습니다. 식량은 육포와 비스킷밖에 못 챙겼는데 괜찮으십니까? 기온이 높은 탓에 상하지 않는 음식은 이것들뿐이었습니다.”

릴리가 회색 종이에 싸인 상자를 들고 왔다. 노끈을 풀자 그 안에는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진 육포가 들어 있었다.

“맛있겠다.”

나는 상자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을 타느라 체력이 죄다 소모된 데다, 노숙하는 입장에서 음식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예전에 릴리와 남부로 내려갈 때에는 돈이 없어서 이틀 내내 쫄쫄 굶은 적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이런 걸로 되겠어?”

그러나 리안드로는 식량이 마땅치 않은 것이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다.

“배가 많이 고프신가 봐요.”

“아니, 난 괜찮은데.”

“그럼 뭐가 문제예요?”

“나 말고 너.”

“저도 괜찮아요. 풀 뜯어 먹는 것도 아니고 육포면 고기 말린 거잖아요.”

내가 무슨 귀한 것만 보고 먹고 자란 규중처녀인 줄 아나. 그는 내가 표면이 거칠거칠한 육포를 입에 넣고 조금씩 녹여 먹자 세상 다 무너진 것처럼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이런 걸 먹여 주려고 데리고 온 게 아닌데……. 어제 피곤하더라도 내가 직접 돌아다녔어야 했어.”

“토끼처럼 빨간 눈을 하고 계셨으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과일 같은 건 그늘 아래 두면 상하지 않잖아. 시도 때도 없이 땡볕에서 굴러다니기만 하는 기사들이야 그런 데엔 관심도 없겠지만.”

그가 비스킷을 반으로 쪼개며 혀를 찼다. 기사들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목 막히지 말라며 내게 물통을 건넸다. 리안드로는 거의 내 수발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게 못내 불편해서 손을 내저었다. 한 제국의 공작씩이나 되어서 저러고 싶을까. 그러자 리안드로가 눈초리를 축 내렸다.

“저는 알아서 잘 먹고 있으니까 공작님 어서 드시라고요.”

“나도 먹고 있어.”

나는 별수 없이 리안드로가 건넨 물통을 받아 마셨다. 그제야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 행동과 말 한마디 하나에 리안드로의 희비가 곧잘 엇갈렸다. 대체 나는 얼마나 큰 영향을 그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 마을이 나오면 마차를 구해 보도록 할게. 너 너무 힘들어 보여.”

“이제 며칠만 더 가면 공작령 도착할 수 있지 않나요?”

“버티려고 하는 거면 그만둬. 네 허리 아작 나는 꼴은 못 보겠다.”

그의 말처럼 내 허리는 욱신욱신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끙끙 앓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는데 눈치 하나는 귀신이 따로 없네.

온종일 성안에서 양파 껍질이나 까고 토마토나 썰다가 갑자기 장거리로 여행을, 그것도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했기 때문일까. 나무를 등지고 기대는 것도 꽤 힘들었다. 얄팍한 내 허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거절할 줄 알고 온갖 다른 이유를 더 생각 중이었는데.”

“제가 굳이 왜요?”

“그러게. 네가 하도 네 자신을 아랫것이다, 하녀다, 이러면서 낮추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나는 허리를 문지르며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눈을 데굴데굴 굴려 힐긋 바라본 리안드로는 썩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이제까지 나는 놀라울 정도로 욕심이 없었다. 어렸던 리안드로를 챙겨 준 것도, 그의 저주를 풀어 준 것도 나였는데.

“이왕이면 승차감 훌륭한 마차로 부탁드려요. 이거야 원, 제 연약한 몸뚱이로는 이런 강행군은 버티기 힘들어요.”

“그건 걱정 마라. 공작가 마차만큼 좋은 건 못 구하겠지만 그래도 제일 멀끔한 걸로 찾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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