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날것 64화
7장 폭풍 속으로
“……황실에서 온 것이로군.”
내 의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리안드로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다지 좋지 못했던 기분이 바닥에 치닫고 말았는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그의 얼굴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황금빛 눈을 가진 독수리가 황실을 상징하는 거였구나. 리안드로의 말을 듣고 나니 디에고의 일행과 마주쳤을 무렵 이 문양을 스치듯 본 기억이 떠올랐다.
“황실에서 저한테요?”
“여기 적혀 있잖아. 네 이름.”
길쭉한 리안드로의 손가락이 봉투 귀퉁이에 적힌 철자를 가리켰다.
“어…… 저한테요? 저? 이벨리나요?”
“그래, 이벨리나한테.”
“음, 그럴 리가 없어요. 다시 읽어 보세요.”
“내가 무슨 개새끼인 줄 알아?”
리안드로는 짜증스레 말했지만 얌전히 내 말을 따랐다.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여러 번 불러 주고 있음에도 서서히 굳어 가던 내 얼굴 근육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황실에서, 내게 편지를?
“이제 만족했나 보지? 조용한 걸 보니.”
“……이게 무슨 일일까요?”
“글쎄.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리안드로가 내 표정을 살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페이퍼 나이프를 꺼냈다.
리안드로는 내가 아직도 겨우 동화책이나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리안드로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는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고서 적힌 내용을 읽어 주었다. 그의 입꼬리가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너를 황성으로 초대한다고 되어 있어. 말이 초대지, 황명이로군. 황제의 날인이 찍혀 있으니.”
“뭐, 어차피 황도로 갈 예정이었긴 했잖아요?”
나는 떨떠름해하며 말했다. 그러고는 리안드로의 손에 들려 있던 편지지를 슬쩍 빼내 읽어 보았다. 그러나 리안드로가 말해 주었던 내용 뒤로 특별히 덧붙여진 말은 없었다.
“어…… 으음.”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난감해했다.
“황제 폐하의 날인이 여기, 이건가요?”
“그래.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인장이지.”
“폐하가 저를 직접 초대하셨다고요?”
“그렇다고 되어 있네.”
별다른 내용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리안드로에게 편지를 건네주자, 편지가 그의 손아귀에서 구깃구깃 접혔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후에 황성으로 들어가면서 신분을 증명할 때 꼭 필요한 것 아닌가?
“왜 남의 편지를 다 구겨 버리고 그래요?”
“……아, 몰랐어.”
편지를 받아 들었으나 이미 한번 구겨진 편지지는 쉬이 펴지지 않았다. 이거 뭐, 불경죄로 잡혀가지는 않겠지?
“공작님?”
“…….”
한참을 편지지의 구김을 펴 보려고 노력하다 결국 포기한 나는 턱을 괸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리안드로를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인상을 쓰고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꾹꾹 눌러 주었다. 그러자 리안드로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대체 폐하가 저를 어떻게 알고 부르시는 걸까요?”
“……최근에 보고가 들어왔었어. 네 신분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돈을 쏟아부었다고 했잖아. 한데 그걸 캐묻고 다니는 치들이 있다 하더라고.”
“설마…….”
“아랫사람을 여럿 시켜 알아봤더니 마침내 꼬리를 잡을 수 있었어. 그치들 중 하나가 황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 부하가 목격했거든.”
“아…… 그럼 그게 지금 제가 이 초대를 받은 거랑 연관이 있겠네요.”
“그리 장담하진 못하겠지만 우연치고는 묘하지 않나?”
“그냥 완전 의심스러운데요.”
“당혹스럽군. 그전에도 종종 황실의 개들이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던 건 알고 있었어. 하나 황실에서 대귀족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은 곧잘 있는 일이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나는 리안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곧 무도회에서 엘레오노라와 디에고의 약혼을 발표하는, 즉 원작의 프롤로그가 시작하기 직전인데, 황제가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를 직접 불러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제국의 일인자가!
‘리안드로 불쌍해, 헝헝!’ 하면서 열심히 그의 주변을 맴돌던 내가 원작을 비틀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나 나는 리안드로의 저주를 풀어냈을 뿐이지 그 이후의 전개와는 상관없는데?
황제는 대체 왜 나를 불러냈을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리안드로 역시 확답을 내놓지는 못하는 듯했다. 나는 잔뜩 굳어 있는 리안드로와 마주 보았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가 걸렸던 저주와 네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 둘만의 비밀이니까.”
“공작님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 제가 제일 잘 아는 걸요.”
“알아주니 고맙다만, 아…… 젠장 할. 황제가 내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알아 조심히 움직였는데도…….”
“공작님 탓이 아니잖아요.”
리안드로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성을 내자 나는 그의 셔츠 자락을 잡아당기며 그를 위로했다.
“내가 너를 황도로 데려가는 거랑 황제에게 불려서 가는 건 완전히 다르잖아.”
“아니, 뭐…… 황명이라지만 제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편지에는 궁을 내주겠다고도 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뭐, 좋아?”
“아니요, 딱히…….”
“모처럼 데이트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의 마지막 한마디를 못 들은 척하며 눈을 데구르륵 굴렸다. 그러니까 리안드로 당신은 데이트를 방해받아서 기분이 나쁘다는 거잖아? 괜히 나만 심각하게 생각했나 보네.
나보다는 공작인 리안드로가 이 정세에 대해 더 잘 파악하고 있겠지.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차라리 황제가 황실의 인원인 리안드로가 직접 신분을 사들이면서까지 데려온 여자가 누군지 호기심에 나를 불러냈으려니, 하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그리고 이튿날, 해가 떠오르기 무섭게 바깥에서는 하인들이 열심히 마차 안으로 짐을 날랐다.
반면 나는 침대 안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이 나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기 때문이다.
“아가씨, 일어나셔야죠.”
그러나 세레나가 먼저 다가와 내게서 이불을 가져갔다. 나는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른 세수하시고 준비하셔야 해요. 황도까지의 거리가 있으니 일찍 출발하는 게 좋거든요.”
“공작님은?”
“어휴, 누가 아니랄까 봐. 가주님께서도 일어나시자마자 아가씨를 찾으셨다던데.”
“……아, 응.”
리안드로와 마음이 통했나 보다. 하기야 우리가 함께했던 세월이 얼마인데. 그걸 모르는 세레나는 역시 두 분 너무나 잘 어울리시는 한 쌍이라며 우리를 축복했다. 나는 세레나의 도움을 받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저택 앞에는 남작령까지 나를 데리러 왔던 것과 같은 종류의 커다란 마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짐마차가 하나 서 있었는데, 겨우 며칠 황도에 머무르는 것치고는 이것저것 챙겨 가는 짐이나 사용인들이 많아 새삼 놀라웠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는 집사의 보고를 받고 있는 리안드로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리안드로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붉어진 눈가를 보며 그가 간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밤새우셨어요?”
“2시간 정도 잔 것 같은데.”
“저 같으면 피곤해서 눈도 못 뜰 텐데…….”
“너랑 내가 같아?”
나는 리안드로의 가벼운 빈정거림을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와 달리 내 옆에 서 있던 세레나와 릴리, 에마누엘 등의 기사들은 리안드로를 외면하며 크흠크흠 헛기침을 해 댔다.
그러자 리안드로가 ‘아…….’ 하고 아득한 소리를 내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며 내게 사과를 건넸다.
“아, 미안.”
“뭐가요?”
“……몰라. 하여튼 미안. 그러면 안 됐나 봐.”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겠어요.”
“뭔 소린지도 모르면서 왜 사과를 받아?”
“아니, 그럼 뭐 어쩌라고요?”
“아오, 이게 아닌데…….”
“제가 보기에도 좀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하자 평소에 뇌에서 입까지 필터링 하나 없이 말인지 방구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고는 했던 에마누엘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리안드로는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돌돌 말아 에마누엘의 뒤통수를 한대 갈긴 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 위로 올랐다.
“전원 위치로 가라.”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는 사이, 리안드로는 마지막으로 점검을 마친 뒤 기사들과 사용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리안드로가 마차 안으로 들어와 길쭉한 다리를 접어 앉자 마차는 덜거덕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 안 하시나요?”
“뭘 위해서 밤을 샜다고 생각해? 일주일치 업무를 다 해치우고 온 참이야.”
“그러시구나. 어떻게 그리 일하시면서 코피 한 번 안 터뜨리세요?”
“원래 나 정도 되면 이렇게 살아도 멀쩡한 법이야.”
조금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었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창밖을 바라보는데 리안드로가 내 허벅지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바구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뭔데?”
“쿠키예요. 마차 안에서 먹으라고 세레나가 줬어요.”
“그래, 맛있게 먹어.”
“공작님은 안 드시나요?”
“단거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냥 예의상 물어봤어요.”
“아, 그러셔.”
그럼 나 혼자 이 많은 쿠키를 다 먹을 수 있겠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지루해질 즈음 바구니를 열었다. 리안드로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 말고 쩌억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는 게 어때요? 굉장히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아.”
“제가 안 괜찮은데요. 일에 찌든 공작님 보는 제 마음이 그리 좋지 못하네요.”
“아, 알겠어, 알겠어. 자면 되잖아.”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리안드로가 손을 내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등받이용 쿠션을 베개 삼아 기대 누웠다.
곧 나른한 표정을 짓던 그가 햇빛에 눈이 부신 듯 눈을 찡그렸다. 나는 마침 소맷자락이 풍성한 옷을 입었겠다, 그의 눈가를 팔로 가려 주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
“그러신 분치고는 입가가 슬쩍 올라가시네요.”
“아니, 젠장. 좀 넘어가면 안 되나?”
“헤헤.”
“뭘 또 좋아하는 거야.”
그렇게 한 손으로는 리안드로의 눈가를 감싸고, 한 손으로는 꿋꿋하게 쿠키를 집어 먹다 보니 어느새 마차는 황도로 이어지는 도로에 진입했다.
리안드로는 어느샌가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괜찮은 척하며 웃었지만, 며칠 내내 새벽나절까지 업무를 처리한 그가 나는 못내 신경이 쓰였었다. 축제 기간만이라도 좋으니 푹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쭉 뻗고 있던 팔이 저려 와 이리저리 손목을 돌렸다. 소맷자락이 자꾸만 얼굴을 스치자 리안드로는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그런 와중에 에마누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높이 솟은 성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이나 많았고, 그 주위를 두텁고 단단한 돌벽이 감싸고 있었다. 원작을 읽으면서 대충 지나가듯 상상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성문 여러 개를 지나가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우와!’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눈이 닿는 곳곳마다 섬세하게 깎아 만든 조각상이며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잠시 달렸을까, 마차가 움직임을 멈추자 리안드로가 스르륵 눈을 떴다. 나는 그의 머리가 헝클어졌다며 웃었고,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말고 난데없이 내게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네?”
“정리해 줘.”
“이제는 하녀 아니라면서요.”
“꼭 하녀가 아니라도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냥 솔직하게 제 손길을 받고 싶다고 하세요.”
“아, 그래그래. 솔직하게 너의 손길을 받고 싶어.”
나는 후후 소리를 내어 웃으며 부드러운 리안드로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이내 리안드로가 마차의 문을 두드리니, 밖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먼저 내린 리안드로가 내밀어 준 손을 잡고 가볍게 밖으로 뛰어내렸다. 중심을 잘못 잡아 비틀거리자 그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고마워요.”
“뭘.”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잠시, 마차 문을 열어 주었던 시종이 리안드로와 내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신분의 증명을 요구했다.
리안드로는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보여 주었고, 나는 품속에서 주섬주섬 황제가 보냈던 편지를 꺼냈다. 편지지를 훑어보던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벨라비티 공. 그리고 세뇨리나. 궁을 마련해 두었으니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나 혼자 궁에 머물러야 하는 줄 알고 내심 걱정했는데, 백작 이상의 대귀족들은 황실에서 내준 궁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제야 안심한 나는 시종을 졸졸 따라가며 물었다.
“저희는 같은 궁을 사용하나요?”
“두 분이 공식적인 연인 관계라면 가능합니다.”
“아…… 그러면…….”
“그러면 무조건 같은 궁이네.”
내가 말끝을 흐리자, 리안드로는 보조개가 파인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