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날것 79화
“엘레오노라는 어려서부터 내게 집착을 보였지. 하나 나는 내버려 두었어. 볼모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안타까워 도움을 준 것이 나였으니까.”
“그, 그렇군요.”
이미 알고 있는 얘기지만 나는 디에고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손을 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계속해서 디에고에게 말을 걸었다. 너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하지만 디에고가 내 속마음을 알아줄 리는 없었다. 그는 텅 빈 제 손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애를 만난 건 아주 어렸을 적이었으니. 그러다 후에 나이가 더 들어 엘레오노라가 대뜸 나를 껴안으려고 하거나, 내가 낮잠을 자던 사이에 입을 맞추려고 한 적이 있었어. 그제야 깨달았지. 엘레오노라가 나를 마음에 두고 있구나.”
“상당히 둔하셨던…… 것은 아니고, 그래요. 그랬군요.”
“그 앤 내가 다른 여자들과 말을 조금이라도 섞을라치면 온 황성이 떠나갈 듯 울어 댔어. 성인이 되어선 저도 체면이라는 걸 아는지 그러지 않지만……. 어쨌거나 아직도 생각이 어린 여자다. 아까도 어디서 들었는지 너와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오기까지 했지 않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매우 곤란해.”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뒷이야기였다. 나는 엘레오노라가 디에고를 어려서부터 짝사랑해 왔다는 것만 알았지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왕녀님께서 태자 전하를 정말 좋아하신다는 걸 알겠네요.”
“그런 건 나도 알아. 다만 귀찮을 뿐이지.”
디에고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대하는 태도엔 굉장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엘레오노라를 옹호하고 싶어져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제가 하녀였던 시절에 말이에요. 저희 공작님도 저를 언제나 졸졸 쫓아다니셨어요.”
“싫었겠군.”
“좋았는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태자 전하가 본인 좋다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밀어내시는 이유가 뭘까 궁금해서요.”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싫었다. 사사건건 간섭당하는 건 딱 질색이야.”
디에고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디에고와 엘레오노라의 관계가 묘하게 나와 리안드로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나는 내게 매달리고 질투하는 리안드로가 귀엽게만 느껴졌었다. 디에고처럼 성가시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리안드로는 내 최애였지. 최애가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게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 디에고의 경우는 매우 달랐다. 한번 보인 친절에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엘레오노라를 디에고는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런데 네 어디가 그리 특별하기에 벨라비티가 너를 쫓아다녔던 거지? 흥미로운데.”
내가 내 무덤을 팠다. 그저 엘레오노라가 안쓰러워서 그녀를 감싸 주려고 했던 발언이었는데, 디에고가 또 과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내 예상이 들어맞은 것 같다. 디에고는 엘레오노라가 아닌 내게 플래그를 꽂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 흥미를 왕녀님께로 돌리시는 것이 어떨는지.”
“내가 왜?”
디에고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20년이 넘게 봐 왔지만 단 한 번도 여자로 느낀 적은 없어.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나?”
“네.”
“어찌 그리 단언할 수 있지?”
“……부부가 되실 사이잖아요. 혹시 모르죠. 지금이라도 색다른 매력을 느끼셔서 반하게 되실 수도 있고.”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하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는 것만 말해 두도록 하지.”
내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디에고의 감정을 바꿀 수는 없나 보다.
더 이상은 이래서는 안 됐다. 디에고가 내게 더 큰 감정을 가지려고 하기 전에 그를 끊어 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으로 혼란스러워진 내 머리 위로 디에고가 제 손을 턱 올려놓았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내가 디에고를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그는 내게 호감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의 수작을 받아 주어야 하는가? 그건 또 싫었다. 이왕이면 디에고와는 조금이라도 덜 엮이는 편이 나았다. 이미 진득하게 엮여 버린 듯한 불길함이 들긴 하지만 아직은 벗어날 길이 분명 있을 것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이만 가 봐야겠어.”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창밖을 내다본 디에고가 중얼거렸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기뻐 미소 짓자 디에고가 내 뺨을 살짝 건드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쳐 내려다, 이런 내 행동이 오히려 그의 오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아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렸다.
그에 의외라는 듯 디에고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인사를 건네니 디에고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일 보도록 하지. 아, 또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군. 그럴수록 더 괴롭히고 싶어진다니까.”
디에고가 고개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어 보였지만 이미 늦어 버린 것 같다.
내 표정을 확인한 그가 코웃음을 치며 내 볼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곤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나갔다.
밖으로 나서는 디에고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 * *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는 디에고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침실 앞을 막고 선 릴리와 에마누엘이 그를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끝까지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대답을 해야 디에고가 저 짓거리를 그만둘 것 같았다.
“진짜 또라이 아니야……?”
“다 들린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건데 어떻게 들었다는 거지.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젯밤 내내 잠을 설치며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지만 그다지 명쾌한 해답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냥 놔두면 어떻게든 되겠지. 리안드로가 휘말리지만 않는다면 어찌 되든 좋다.
“얼른 준비하고 나오도록 해라. 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디에고는 완전히 제멋대로였다. 나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갑자기 숫자를 10부터 거꾸로 세기 시작해서 나는 허겁지겁 머리를 빗다 말고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디에고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비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꼴이 그게 뭐지?”
“전하께서 서두르라고 하셨잖아요.”
“이리 가까이 와라. 꼭 귀신 같은 꼴을 해서는.”
“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친한 척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대충 머리를 매만지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디에고가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도적으로 그를 무시하며 응접실로 들어가자, 테이블 위에 놓인 여러 권의 책과 편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뭐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들어온 디에고가 편지를 낚아채며 물었다. 편지 봉투에는 정갈하고 반듯한 글씨체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양손을 내밀었다. 감히 황태자에게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을 수도 없어 나는 예의 바르게 부탁했다.
“주시면 안 될까요, 전하?”
“네게 온 것인가?”
“봉투만 딱 봐도 제 이름이 적혀 있지 않나요?”
“……벨라비티가 보냈군.”
그가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돌려주시겠어요?”
“내가 훔쳐 가기라도 했나?”
말 한마디라도 곱게 하는 법이 없는 디에고가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편지를 받자마자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심스레 편지지를 꺼내 펼치니 별로 길지는 않은 내용이 보였다.
리안드로는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으며 이상한 그림을 그려 놓았다. 짧은 머리를 새카맣게 칠해 놓은 동그라미 하나와 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쭉쭉 뻗쳐 있는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그 둘의 사이에는 커다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진짜 너무 귀엽다.”
속마음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절로 헤 벌어지려는 입꼬리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다 잘하면서 그림은 어쩜 이렇게 못 그리지? 너무 못 그렸는데 하필이면 열심히 그린 티가 나서 더 웃겼다.
“좋아 죽겠나 봐. 기분 나쁘게.”
“……왜 전하 기분이 나쁘신데요?”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 보며 히죽거리는데, 디에고가 비아냥거리며 찻잔을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세 권의 책 표지에 리안드로가 내 이름을 써 놓은 것이 보였다.
굳이 책에 이름을 써 놓은 이유가 뭐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귀엽다. 나는 맨 위에 있던 책을 집어 들어 내 이름이 적혀진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디에고가 다시 찻잔을 감싸 쥐며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글쎄, 왜 기분이 나쁠까. 나도 모르겠네. 아침부터 네 얼굴을 봐서 그런 건지.”
“……저는 계속해서 궁으로 돌아가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폐하의 명이라니까.”
“…….”
“나보고 황명을 어기라는 건가?”
“제가 언제 또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그러세요…….”
나는 목을 움츠리며 급속도로 쭈그러들었다. 책을 품에 안고 웅얼웅얼 변명하자, 디에고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
“또 뭐죠?”
“또 뭐냐니, 그런 식으로 나한테 말하는 사람은 진짜 처음 본다.”
디에고가 잘그럭 소리가 나는 무언가를 던지듯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뭔가 싶어 봤더니 다름 아닌 푸른빛 감도는 보석이 달린 은색 목걸이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잽싸게 목걸이를 낚아챘다.
“드디어 돌려주시네요. 제 보물.”
“그딴 거 내가 가지고 있어 봤자 뭐 하겠나?”
그럼 애초에 왜 가져갔는데?
“네가 너무 소중하게 여기길래 어쩐지 뺏고 싶어졌던 것뿐이야.”
디에고는 대체 어디에서 배워 먹은 사고방식인지 모르겠는 소리를 잘도 해 댔다. 그가 입매를 비틀며 웃자, 나는 뱀 앞의 생쥐가 된 기분으로 목걸이를 등 뒤로 감추었다.
“그까짓 게 보물씩이나 된다니.”
“누구에게나 소중히 여기는 것 하나쯤은 있는 법이죠.”
“대체 벨라비티와 얼마나 깊은 사이이길래.”
디에고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제 턱을 쓸었다. 그저 표정 하나 바꾼 것뿐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팽팽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고압적인 말투로 물었다.
“언제부터 저택에서 일했지?”
“……17살 때부터요.”
“어떻게 벨라비티와 연인 관계가 된 거고? 어린애를 구워삶았나?”
“엄밀히 따져서 말하자면 연인 사이는 아닌데요.”
“사귀는 게 아니라고?”
의외였는지 디에고가 제 허벅지를 두드리던 것도 멈추고 다시 한번 되물었다.
“사귀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입까지 맞춰 놓고.”
“……네, 아직은요.”
“그렇단 말이지.”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음 지었다. 의미를 몰라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더니 더 진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