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것-95화 (9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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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 95화

10장 Vivere o morire

사냥 대회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 암브로세티의 사절단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나라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은 결국 이루지도 못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사고를 물고 늘어지며 엘레오노라는 황태자비의 자격이 없다 반발했다. 암브로세티의 핏줄이 이제껏 평화로웠던 제국을 망쳐 놓을 것이 틀림없다 주장한 것이다.

또한 제국의 수사관은 기어코 디에고의 말에 흥분제가 과다 투여되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귀족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암브로세티의 소행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냥 대회 당일, 황태자의 말에 가까이 갈 수 있었던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사정을 공작저로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리안드로가 신문의 1면에 떡하니 쓰인 ‘란도 백작의 죽음- 세뇨리나 클로틸드의 비애’라는 제목을 보여 주었을 때에서야.

“황제의 속이 말이 아니겠어. 되레 귀족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으니.”

“나라가 영 뒤숭숭하네요. 이래서야 태자 전하와 왕녀의 약혼으로 얻는 게 있을는지.”

나는 수프에 든 콩을 골라내고 있는 리안드로의 손등을 꼬집으며 말했다. 리안드로는 눈을 치켜뜨면서도 꿋꿋하게 아침 식사에 들어간 모든 야채들을 남겼다.

“공작님, 지금 몇 살이게요?”

“19살. 곧 생일이 지나면 20살.”

“그 나이 되도록 편식이라니 말도 안 돼요.”

“맛없으니까 어쩔 수 없어.”

“저희 2세가 공작님 편식하는 버릇 그대로 따라 하면 어쩔 거예요?”

그가 마시고 있던 주스를 내뿜으며 헛기침을 했다. 귓가에서부터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리안드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런 식으로 협박하면 누가 들을 줄 알아?”

“들을 거잖아요. 자, 거기 완두콩부터 시작해 보세요.”

“나는 네가 제일 무서워.”

“칭찬이죠?”

그가 힘겹게 콩 한 알을 삼켰다. 나는 기뻐하며 리안드로가 기껏 골라냈던 완두콩을 한 숟가락 가득 퍼 그의 입가에 대 주었다.

“……이건 고문이야.”

“떠먹여 주는 거 싫어하세요? 어렸을 적에는 먹여 달라고 찡찡거리셨으면서.”

“그런 적 없어.”

리안드로가 딱 잘라 말하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머리도 쓰다듬어 달라며 어리광을 부렸던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구만.

“아, 모레가 란도 백작의 장례식이에요. 가실 거죠?”

“너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이번에는 꼭 반지를 써 볼게요. 이렇게 손가락 튕기고 속으로 보낼 방향을 생각하면 되는 거 맞아요?”

“식당을 태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후에 나가서 연습하도록 하자.”

“네.”

* * *

아침을 먹은 뒤, 리안드로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에게 업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듯하다.

어린 나이부터 일에 찌들어 사는 그에게 유감을 표하며 나는 정원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아무런 방해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나는 정원을 돌아다니며 라일락이나 푸른 수국의 꽃향기를 맡았다. 거대한 상아빛 대저택을 뒤로하고 있자니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여기서는 그 어떤 험한 일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얼마 전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분수대를 지나자 막 잎사귀가 피어나기 시작한 꽃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연둣빛 새싹을 보니 자연스럽게 엘레오노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냥 대회에서 그녀가 내게 뭐라고 했더라. 다시 친하게 지내자는 말이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말이 뇌리에 박혀 다른 내용은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대체 엘레오노라는 무슨 속셈인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시 우울해졌다. 나는 발끝에 걸리는 돌부리를 쳐 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엘레오노라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역시 모종의 이유로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역시 원작의 인물들과 엮이게 되면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나는구나. 빨리 리안드로를 설득해서 외국으로 뜨는 게 답인 것 같다.

나는 분수대 옆에 놓여 있는 벤치에 드러눕다시피 하며 햇빛을 쬐었다. 지나가는 하인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수롭지도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잠시 쏟아지는 졸음에 하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와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아, 누군가 했네. 오랜만이에요, 로렌조.”

로렌조가 턱을 괴고 주저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로렌조에게 손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뭐, 그럭저럭이요. 이비는 살이 좀 빠졌네요.”

“고생을 좀 했거든요. 당분간은 요양할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밖에 드러누워 있는 건가요?”

로렌조의 호박색 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로 내 얼굴을 가려 주며 말했다.

“귀족들은 하얀 피부를 선호한다는데, 곧 주인마님 될 사람이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공작님은 그런 거 신경 안 쓰실걸요.”

“하긴, 그건 그렇다.”

“지금 근무 중이에요? 저랑 농땡이 피우는 거 알면 또 공작님한테 한 소리 들으시겠다.”

“맞아요. 가주님 무서워서 얼른 다녀와야겠어요.”

“어디 가는데요?”

“가주님께서 맡기신 전보를 부치러요. 지나가다 이비가 보여서 잠시 멈추었을 뿐.”

“그럼 얼른 다녀와요. 저 오늘은 종일 여기 있을 예정이니까 다녀와서 얘기해요. 로렌조한테 물어볼 것도 있고.”

“어, 뭔데요?”

“저 온실이요. 공작님이 다른 곳은 모두 출입을 허락해 주시면서 저 온실만 들어가지 말라고 그러는 거 있죠. 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길래…….”

“아하.”

로렌조는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씩 미소 지었다.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대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건 비밀이에요. 제가 아무리 이비랑 친하다고 해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온실에 뭐, 꽃 말고 더 있나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꽃이라도 피는 건가? 다들 쉬쉬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언젠가 밤늦게 쳐들어가고 말 거야. 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다.”

“무슨 그런 위험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가주님께서 어련히…… 음, 저 이만 가 봐야겠네요.”

에이, 안 넘어가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로렌조는 전보를 부치고 온 뒤에 얘기하자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벤치에 덜렁 드러누워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고 심호흡을 고르게 내뱉고 있을 때였다.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와 나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떠났던 로렌조가 저 멀리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사색이 되어 팔을 마구 휘저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로렌조의 신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이비! 가주님을 찾아가요! 어서-!”

도저히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그의 질린 듯한 얼굴에 나는 불길함을 감지하고 치맛자락을 부여잡은 채 저택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굽이 꽤 있는 구두를 신고 있는 것이 못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이비! 더 빨리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로렌조가 내 손을 힘주어 잡고 달렸다. 나는 그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며 정원의 입구에 다다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간헐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로렌조, 대체 무슨, 일인지는 설명을 해 줘야…… 난 또 뭐가 쫓아오는 줄 알고…….”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 둘이 목이 꺾인 채 죽어 있었어요. 얼른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네?!”

나는 경악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대저택의 규모가 미친 듯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비, 우선 저택 안으로 들어가요. 저는 기사 숙소로 가 볼게요.”

“만약 그런, 암살자…… 그런 게 들어온 거라면 혼자 가면 위험하잖아요.”

“제 걱정은 말고…….”

그가 말끝을 흐리며 내 등을 떠밀었다. 로렌조를 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당장은 리안드로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그때였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은 복장을 한 남자 하나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무게 중심이 급작스레 뒤로 쏠리자 나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내 목에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을 들이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기를 버려. 아니면 여자를 죽이겠다.”

남자의 복면 사이로 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몸이 절로 떨려 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로렌조는 낭패 어린 얼굴로 품 안에서 꺼내려던 단검 한 자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곧이어 우거진 녹음 사이로 또 다른 검은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로렌조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뒤로 꺾었다. 로렌조의 악다문 잇새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힘겹게 쥐어 짜내듯 말했다.

“……여자는, 보내 줘.”

“그럴 수는 없지. 목적은 여자다. 갈색 긴 머리에 보라색 눈. 네 이름이 이벨리나가 맞나?”

“안 돼, 대답하지 마요!”

“닥쳐.”

남자가 로렌조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이내 콰드득-! 끔찍한 소리가 들리며 로렌조의 팔이 기이하게 꺾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마법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런 젠장, 그걸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떻게 해!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왼손을 움찔거리자 칼끝이 내 목을 스쳤다. 따끔한 정도였건만 삽시간에 피가 흘러나왔다. 끈적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차라리 심장 마비로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

“남자는 죽여. 이미 우리를 목격했으니.”

“자, 잠깐만요!”

“계집은 닥쳐.”

한마디 말한 것뿐인데 칼날이 더 깊이 들어오려고 했다. 눈물이 절로 흘러나와 시야를 가렸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로렌조라도 구하고 죽자. 나는 속으로 욕설을 마구 지껄이며 세차게 손가락을 마찰시켰다.

제발, 한 번에 성공해 줘. 제발…….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닦아 내기 위해 나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그 순간,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나타난 커다란 불길이 로렌조의 뒤에 서 있던 남자를 덮쳤다.

화아악-!

귀를 긁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불길에 휩싸인 남자가 바닥을 구르면서 괴로워했다.

“이 계집년이……!”

내 뒤의 남자가 이를 갈았다. 손아귀에 쥐인 머리채가 뽑혀 나갈 듯 아찔했다. 나는 눈을 꽉 감으며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칼을 내 목 안으로 깊숙이 찔러 넣으려고 했다.

공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나 칼이 들어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제 죽는구나.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뜬금없이 나타난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하는구나. 이게 엑스트라의 결말인가 봐. 나는 서러워하며 얼른 불꽃이 남자에게 닿기를 기도했다.

“윽!”

그때, 머리채를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사라졌다. 잔뜩 겁을 먹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내게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를 맡으며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로, 로렌조?”

내 목을 향했던 남자의 단검이 로렌조의 가슴팍을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나는 까무러칠 듯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로렌조를 따라 주저앉았다. 콧속이 꽉 막혀 오기 시작하고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꺽꺽거리며 제 팔을 덮친 불길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려 하자 남자가 기겁하며 빠르게 사라졌다.

“이, 비-”

그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는데, 로렌조가 더듬더듬 나를 불렀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하지 마요! 내가, 지금 그러니까- 아, 당장…… 의사를 불러…… 아니지, 당신을 두고 갈 수는 없어! 어떡하면 좋지! 로렌조, 대답 좀 해 봐요!”

나는 울면서도 정신없이 그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로렌조가 힘없이 미소 지으며 내 뺨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비. 이, 비-”

“나 여기 있어요. 그러니 눈감지 마요. 지금 그러면 안 돼. 제발, 제발 좀.”

내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복해서 내 이름만을 불렀다. 갈라진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로렌조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내면 그가 살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저택으로 달려가 의사를 불러오면 되는 걸까? 그의 가슴팍에서 새어 나온 피는 이제 하얀 셔츠를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말을 해! 조금만 더! 제발…….”

나는 그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더 이상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내 뺨을 만지고 있던 로렌조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비명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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