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날것 110화
하녀들이 목욕 준비를 마치고 나갔다.
갈아입을 드레스를 침대 위에 올려놓은 나는 손을 뒤로 뻗어 단추를 풀어 나갔다.
“도와줄까?”
“앗, 시커먼 속마음이 다 보이는데요.”
“……말을 말아야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리안드로가 내 뒤로 다가왔다. 기다란 손가락이 서투르게 조개 모양 단추를 톡톡 풀어냈다.
단숨에 소매를 잡아당겨 드레스를 벗자, 리안드로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뭘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아니, 이런 거 좀 오랜만인 것 같아서.”
내 잠옷을 종잇장처럼 찢어 놨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만, 대체 무슨 소리람.
리안드로는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네글리제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쉬이 벗기질 못했다.
그게 답답해진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물렸다. 그리고 리안드로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리안드로는 눈을 내리깔며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바르르 떨리는 기다란 속눈썹이 촛불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나지 않아요? 리안 주먹만 했을 때 제가 종종 씻겨 줬었잖아요.”
“누누이 말하는 것 같은데, 주먹만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대충 그랬잖아요.”
“안 그랬다고.”
입술을 비죽 내밀며 하는 대꾸를 귓등으로 흘려넘기며 나는 대리석처럼 희게 빛나는 리안드로의 상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무 꼬챙이처럼 앙상했던 시절이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건한 육체였다.
“몸매가 아주…….”
“뭐라고?”
“아니요,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얼른 네글리제를 벗어 던지고 욕조 안으로 쏙 들어갔다. 물 위로 거품과 꽃잎이 둥둥 띄워져 있어 쇄골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들어온 리안드로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나를 제 앞에 앉혔다.
노곤하게 몸이 풀려 오자, 나는 리안드로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평화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얼마나 있었을까, 리안드로의 꽉 잠긴 듯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
“물어봐도 되는 거였어요?”
나는 정면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주제였기에 차마 먼저 말을 못 꺼냈던 건데 리안드로가 먼저 물꼬를 틀 줄은 몰랐다.
내 어깨 위로 얼굴을 묻는 리안드로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왔어. 아버지는 나를 보려 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내게 닿기를 꺼려 했지. 사용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어. 나를 괴물 보듯 하던 그 시선들을 영원토록 잊지 못할 거야. 홀로 처박혀 살아왔던 그 세월들을…….”
말을 잇기가 쉽지 않은 듯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자코 리안드로의 뒷말을 기다렸다.
“아무도 내게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어. 어차피 곧 죽을 놈이니 예의 차릴 필요도 없다 지껄여 대는 녀석들도 있었지. 나름 쉬쉬한다지만, 앞을 거의 못 보았던 대신 귀가 잘 들렸으니까. 난 다 들었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를 혐오하는 인간들 속에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무력하게 살아간다는 건…….”
“저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의 리안처럼 그렇게 멀쩡하게 있지도 못했을 거고요.”
나는 몸을 틀어 리안드로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작게 웃었다. 내 등을 단단히 받친 그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다 네 덕분이잖아. 네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거야.”
하지만 내가 리안드로를 만난 것은 그가 모든 괴로움을 겪고 난 이후였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저주가 풀릴 것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니 얼마나 두려웠을까. 털을 바짝 세운 짐승처럼 나를 경계했던 리안드로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니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넌 처음 봤을 때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덥석덥석 만져 댔지. 내가 불쌍하다고 대놓고 말하지를 않나, 밀어내는데도 자꾸만 다가오고…….”
리안드로 역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그는 연신 웃음을 흘려 댔다.
“그래서 지금도 사실 괜찮아. 제 아들 살리겠다 남의 목숨 이용한 황제가 원망스러운 건 여전하지만, 조금 전에 같이 씻자고 찾아온 너를 보니까 황제 같은 건 생각조차 나지 않더라.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네가 자꾸 날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저는 계속 생각이 나는걸요.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됐어요. 죗값을 치르길 바랐어요.”
“이미 다 죽어 가던 놈을 뭐 하러 살려. 그리 허무하게 죽어 버릴 줄은 몰랐지만…… 난 그 정도로도 나쁘지 않았어. 저주는 예전에 풀렸고, 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으니까. 그리고 내 곁에는 네가 있고.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과거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아.”
대체 얼마나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가지고 있으면 저런 생각이 가능한 거지. 나는 언제 울적한 적이 있었냐는 듯 제 뺨을 부벼 대는 리안드로를 슬쩍 밀어냈다.
그러자 그는 내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더니 혀를 죽 내밀어 손바닥을 핥아 내렸다.
“아앗, 간지러워요!”
“간지럽기만 해?”
리안드로가 눈을 접으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붉은 혀는 벌어진 손가락 사이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오, 오랜만에 머리 감겨 드릴까요?”
갈수록 농밀해져 오는 행위에 시선을 피하며 묻자,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느릿하게 입술을 핥았다.
아주 대놓고 유혹을 해 오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짙어져 가는 눈빛에 숨이 막혀 와 나는 몸을 돌려 애꿎은 머리카락만 배배 꼬았다.
“목 되게 얇네. 어깨도…… 가냘프고.”
물에 젖은 손가락이 내 목선을 따라 움직였다. 물 위로 떠오른 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그러쥔 리안드로가 뒤로 바짝 달라붙었다.
“내가 씻겨 줄래. 그러고 싶어.”
“씻겨 주기만 하는 거죠……?”
의심을 가득 담아 물었으나 리안드로에게서 나오는 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획 돌렸다.
리안드로는 나를 뚫어지듯 쳐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입꼬리를 올린 그가 내 어깨 위로 물을 부었다.
“글쎄.”
누군가를 씻겨 주는 것은 처음일 텐데도 그의 손길은 퍽 자연스러웠다.
절로 몸이 움찔거려 옆구리를 비트니, 그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비누 거품이 잔뜩 묻은 내 등을 끌어안았다.
“자꾸 그러면 힘들어.”
“힘들기는 제가 더 힘들다고요.”
나는 볼을 씰룩이며 리안드로가 쥐고 있던 비누를 빼앗아 그의 몸에 문질렀다. 그러자 딱딱한 몸이 긴장한 듯 굳어졌다.
그제야 샐쭉 웃음이 나왔다.
“자, 어때요? 받는 입장이 더 힘들죠?”
“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
“당연…….”
그가 갑작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묘하게 풍기는 위압감에 눈을 동그랗게 뜨니 리안드로가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가렸다.
“빨리하고 나가자. 빨리…… 응?”
거의 애원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렇게 갑자기 다급해진 목욕을 끝내고 난 뒤, 나는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감고 일어섰다.
뺨에 튄 거품을 닦은 리안드로가 아쉽다는 티를 풀풀 풍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얼른 욕조를 벗어났다.
“침대로 가면 되잖아요…….”
“응.”
쑥스러움을 숨기며 한 내 말에 리안드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는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고 얼른 일어나 나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내려 달라고 외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 * *
리안드로의 품에 안겨 깜빡 잠이 든 나는 아침나절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어깨며 허벅지가 달달 떨리는 근육통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단잠에 빠져 있는 리안드로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으응…….”
“으응, 은 무슨.”
그는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했다. 혈색 좋아 보이는 저 얼굴이 어찌 이리 얄미운지. 나는 리안드로의 뺨을 쿡쿡 찔러 대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기도 하며 있는 힘껏 그를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리안드로가 번쩍 눈을 떴다. 새파란 눈이 나를 보자마자 부드럽게 휘어졌다.
“좋은 아침.”
“안 좋은데요.”
“왜?”
“왜겠어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그의 눈빛에는 순수하게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 한껏 뾰족해져 있던 내 기분이 사르르 녹고 말았다.
리안드로는 제 팔을 내밀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나는 입술을 비죽거리면서도 얌전히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허리도 아프고요, 발목도 덜렁거리는 것 같고요.”
“그거 큰일인데. 지금 나가서 의사를 불러올게.”
리안드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군살 하나 없는 그의 배를 살짝 꼬집으며 다시 그를 눕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가 눈을 깜빡거리자, 나는 리안드로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 그의 가슴팍을 깨물었다.
“아.”
“안 아픈 거 다 알 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제 고통을 느껴 보시라고.”
“어제 너무 많이 움직여서 그런가…… 마사지라도 해 줄까?”
“싫어요! 마사지하는 척하다가 또 막 그럴 거면서.”
“막 그러는 게 뭔데?”
“…….”
“응? 막 그러는 게 뭐야? 궁금해서.”
리안드로가 몸을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싱글거렸다.
그의 어깨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내려치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좀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려나. 넌 오늘 하루 움직이지 마. 내가 다 해 줄게.”
“그건 그거대로 무서운데…….”
“내가 무서워?”
리안드로가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리며 물었다.
잘난 얼굴을 어찌 저리도 잘 이용해 먹는 것인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리안드로는 조금의 틈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나를 꽈악 끌어안았다.
“오늘 리안은 뭐 할 건데요?”
“일해야지. 침대 위에서.”
“일은 집무실에서 보시는 게 어떠신지.”
“어째서? 나랑 있기 싫은 건가?”
또, 또 저 불쌍한 척하는 것 좀 봐. 하지만 가장 짜증 나는 것은 리안드로가 일부러 저런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넘어가고 마는 내 자신이다.
리안드로의 간절해 보이는 눈빛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가 볼우물을 패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