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것-118화 (외전 4화) (118/124)

# 118

날것 외전 4화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받아들인다고는 안 했다. 이벨리나는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아예 양손으로 리안드로의 뺨을 잡아 늘렸다.

“그럼 10개월 내내 방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네?”

“자, 잠깐만 이것 좀 놓고…….”

“얼른 대답하지 않으면 이 밀가루같이 하얀 볼을 썰어서 빵을 구워 버리겠어요.”

“무슨 협박이 그래?”

“얼른요.”

“응당 그래야 하긴 하지만…… 네가 싫다면…….”

“싫다면?”

“…….”

그가 눈을 내리깔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뒷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꾸만 말끝을 늘렸다.

답답해진 이벨리나는 결 좋은 리안드로의 머리카락을 주욱 잡아당겼다.

“……알겠어. 공작저 밖으로 나가지만 않는다면…… 어디든 가도…… 좋아.”

싫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말은 참 잘했다.

이런 것까지 허락을 맡아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에 그녀는 자꾸만 심술을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다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녀는 그제야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기분이 약간 풀린 사이, 리안드로가 다급히 외쳤다.

“대신에 다치면 무효.”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덜렁대는 것처럼 보여요?”

“응.”

이벨리나는 새삼 리안드로 안의 제 이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는 듯한 표정이라 그녀는 허탈해하며 웃음을 흘렸다.

한편 이벨리나의 입끝이 말려 올라가자 그는 여전히 촉촉해진 눈가를 슬쩍 닦아 내며 곧장 그녀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

“원래 갇혀 살면 점점 성격 파탄자가 되는 법이라고요. 마치 예전의 리안처럼.”

“너는 참 못 하는 말이 없다.”

“제 장점이죠.”

그녀는 가슴을 활짝 펴며 뿌듯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리안드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그라드는 소리를 지껄이자, 이벨리나는 그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그런데 황성은 어쩐 일로?”

“황제가 네게 선물을 보냈던데. 오는 길에 던져 버릴까 싶었는데 네 거라서 참았어.”

“되게 당당하게 말하시네요.”

잠시 기다려 보라고 말한 리안드로가 곧 밖에서 붉은 리본이 묶인 자그마한 상자를 가져왔다. 그는 만지기도 싫다는 듯 리본 끄트머리를 잡고 상자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황금빛 보석이 박힌 귀여운 토끼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이벨리나는 인형을 품에 안으며 기뻐했다.

“너무 귀여워!”

“이제 봤으면 버리자.”

“뭔 소리예요?”

“황제가 준 거라 영 불길해서.”

“그건 그냥 리안 생각일 뿐이고, 이것 좀 봐요. 코도 보석으로 만들어졌네.”

“……너 언제는 황제가 싫다더니.”

“물론 싫지만 축하하는 의미로 준 선물인데 버리기는 좀 그렇잖아요.”

“네가 인형을 좋아할 줄은 몰랐어. 내일 나가서 사 올 테니 그건 그만 버리자.”

“이 사람이 진짜.”

이벨리나는 리안드로를 흘겨보며 인형을 더 꼭 끌어안았다.

디에고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인형은 매우 귀여웠다. 앙증맞은 하얀 귀와 새빨간 루비로 만들어진 코라니. 그녀는 히죽 웃으며 인형의 귀를 쓰다듬었다.

리안드로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다음 날, 공작저 앞으로 토끼, 곰, 강아지, 고양이, 다람쥐, 너구리, 여우, 기타 등등 백여 개의 인형들이 배달되었다.

스케일이 남다른 지랄이었다.

그러나 선물을 받았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으리. 침실을 가득 채운 인형들을 둘러보는 그녀의 입가에 웃음기가 걸렸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벽에 기대어 선 리안드로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때? 이제 이 토끼 필요 없지?”

“그래도 버리는 건 좀…….”

“그건 좀 그렇지? 태워 버릴까?”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인형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렇게 미움을 받아야만 하는 거지. 분명 리안드로가 내팽개쳤을 것이 분명한 토끼 인형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엎어진 뒷모습이 처량해 보여 이벨리나는 얼른 인형을 주워들었다. 리안드로의 입꼬리가 단박에 아래로 내려갔다.

“……어떻게 하면 그거 버릴래.”

“안 버려요. 그냥 여기 리안이 준 인형들 사이에 놔둘게요. 밤에 안고 자지도 않을게요. 그럼 됐죠?”

“내가 있는데 왜 그걸 안고 자!”

이상한 부분에서 그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리안드로는 잠시 열을 식히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래로 내려가는 그를 뒤쫓기 위해 그녀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이대로 구르면 큰일 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얼른 제 배를 감싸 쥐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벨리나가 우려했던 바와 달리 그녀가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비명소리를 들은 리안드로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몸을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허리를 감싼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그녀는 슬쩍 눈을 떴다. 참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리안드로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고 방 안에만 있으라고 한 건데, 너는……!”

화가 난 그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는 리안드로를 외면하려 귀를 막았다. 분명 다시는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겠지.

하나 이벨리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리안드로는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서슬 퍼런 안광이 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할 말이 없어져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은 뛰어서 그런 거고…… 다신 안 넘어질게요.”

“너는 일부러 넘어져야겠다, 생각하고 넘어지나 보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쌀쌀했다.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어 그녀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치맛자락을 밟고 또 한 번 넘어질 뻔했다.

“이비!”

리안드로는 숫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들어 침실로 데려다주었다. 잠시 나갈까 고민하던 그는 이벨리나를 차마 혼자 둘 수 없겠다 싶어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폐하께서 주신 인형…… 버릴게요.”

“이제 와서?”

리안드로의 눈치를 보던 이벨리나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을 걸자,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 풀릴 만한 분노가 아니었나 보다. 그녀는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고집 그만 부리고 얌전히 감옥살이할게요.”

“네가 퍽이나.”

“……하루 종일 리안 옆에 붙어 있을게요. 일할 때나, 식사할 때나, 단련할 때나, 씻을 때도요.”

“연무장에 갈 때 빼고는 이미 그러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 이벨리나는 울적하게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리안드로의 기분을 풀어 줄 만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는 점점 애벌레 고치가 되어 가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그녀가 이불 밖으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뭘 그렇게 봐.”

퉁명스레 말한 그가 고개를 획 돌렸다.

그녀는 그의 셔츠 자락을 슬쩍 잡아당기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화난 모습도 잘생겼다…….”

“너는 참.”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온 감탄이어서 리안드로는 결국 조금 웃고 말았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이벨리나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의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인상을 굳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뭐 하는데?”

“음…… 약간의 유혹?”

점점 위로 올라오는 손길에 리안드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당하면 제 꼴만 우습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벨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고민하는 순간은 아주 짧았다. 그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둥글게 말린 고치 속에 숨겨진 그녀를 찾았다.

* * *

작은 해프닝 뒤로는 꽤 평탄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리안드로는 점점 불러 오기 시작하는 이벨리나의 배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간지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제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다시 몇 개월이 흐르고, 이벨리나는 건강한 이란성 쌍둥이를 출산했다. 성별이 다른 쌍둥이는 각각 푸른 눈과 푸른 기가 섞인 보랏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양손에 아기들을 받아 든 리안드로를 바라보며 아기가 아기를 키우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너 방금 불순한 생각 했지.”

그리고 귀신처럼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리안드로가 고개를 들었다.

대체 저 입꼬리는 어디까지 올라가려고 저러나. 이벨리나는 슬그머니 웃음을 흘리며 말을 돌렸다.

“어디 얼굴 좀 보여 줘요. 누구 닮았는지 궁금해.”

“안타깝게도 나를 판에 박은 듯 닮았어.”

“그게 뭐가 안타까워요. 엄청 귀엽겠다.”

출산 후 이벨리나는 무서운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업무도 죄다 때려치우고 그녀를 보살핀 리안드로 덕분이었다. 그는 온갖 진귀한 약초들과 산후조리에 좋다는 음식들을 그녀에게 먹였다. 손가락도 까딱하지 말라며 직접 입에 넣어 준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벽난로 앞에 앉아 몰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이벨리나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리안드로는 얼른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 준 뒤 칭얼거리는 아기들을 달래 주었다.

울음소리에 잠에서 깬 그녀는 서투르게 아기들을 재우는 리안드로를 바라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일 좀 하러 가요. 언제까지 농땡이 피우실 거예요?”

“넌 나랑 있는 게 싫어?”

“아, 또 결론이 왜 그렇게 나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토라지는 리안드로를 달래느라 이벨리나는 진땀을 빼야 했다. 아기는 저가 낳았는데, 어찌 예민하긴 저쪽이 더 예민해? 그녀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지금 되게 천국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니까 방해하지 마.”

그의 따스한 눈길이 곤히 잠이 든 아기들에게 머물렀다.

리안드로는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해 부성애 같은 것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제 자식들을 바라보는 리안드로의 눈에서는 하트가 줄줄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이윽고 아기들이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뱉자,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 종아리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희 이러고 있으니까 되게 노부부 같지 않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래.”

“그렇잖아요. 요즘 아기 보느라 정신없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어깨를 간질였다.

리안드로는 움찔 몸을 굳히더니 놀란 듯 이벨리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의중을 살피려는 듯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

그들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이벨리나였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셔츠 사이로 드러난 리안드로의 목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열기가 섞인 한숨을 뱉어 낸 그가 그녀의 허벅지 위로 얼굴을 묻었다.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치맛자락에 묻혀 흘러나왔다.

“더 만져 줘…… 응?”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어깨 위로 올렸다. 피부에 직접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리안드로는 급히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잘게 떨리는 커다란 손이 시야에 들어와 이벨리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머그잔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가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이내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혀를 섞는 와중에도 그는 기어코 셔츠를 뜯어 버릴 듯 벗어 내렸다.

탄탄한 가슴팍이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진해지는 입맞춤이 오래 이어지자 그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리안드로는 이벨리나의 등허리를 단단히 받친 뒤 그녀를 안고 일어섰다. 숨을 내쉬는 그녀에게서 달콤한 초콜릿 향이 느껴졌다. 제 목을 휘감고 쪽쪽 짧은 키스를 퍼부어 대는 통에 그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자꾸만 웃는 것을 보니 이벨리나는 분명 제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 분명했다.

리안드로는 문을 박차고 나가 옆방의 침실로 향했다. 이윽고 침대 위로 그녀를 올려놓은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손이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를 꽉 깨문 채 초조하게 웃었다.

“괜찮겠어? 아직 몸이…….”

이벨리나는 리안드로가 말을 다 잇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달려드는 그녀 때문에 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위로 몸을 겹치듯 올라탄 그가 난폭하게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또 드레스 한 벌 버리겠네. 이벨리나는 그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며, 제 쇄골을 살짝 깨무는 리안드로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밤이 길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