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말했을 텐데.
“인간이 아니군요.”
이유하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의 몸에서 번쩍이던 섬광이, 여전히 눈 안에 맺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가장 입이 가벼운 하정윤에게선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조금 전의 비무를 떠올리며 손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강인호는 자신의 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력한 건 처음이구나…….’
솔직히 뇌화신성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건,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본궁의 궁주를 생각나게 하는, 압도적인 권위감.
그 위엄을 느낀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자신보다 강하다고 해도, 그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자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뇌천마도라는 대단한 별호로 불리며 모든 이들을 이겨 왔었던 자였으니까.
그러나 그와 일도를 나누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그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을 느낀 것은 강인호가 감각에 굉장히 민감한 자였거니와, 또 그의 무공이 유주혁의 기세를 알아볼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유주혁의 기운은 그의 심령을 더욱 빠르게 제압해 왔다.
적의 힘을 모르는 것보다, 적의 위대함을 알아 버리는 것이 무인에게 있어선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궁주의 명마저 어기며 오의를 시전한 강인호였다.
그랬는데…….
“…….”
강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이, 조금 전까지 유주혁이 서 있었던 장소를 더듬었다.
그는 이미 객잔에 들어가 버린 후였지만, 강인호의 눈에는 아직도 유주혁이 그 자리에 서서, 자신에게 검을 들이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커헉···!”……
돌연 하정윤이 눈을 번쩍 뜨며, 거센 기침을 토해 내었다.
“사형!”
당황한 이유하가 주저앉아 그를 살폈지만, 특별히 내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왜 그래요?”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하정윤이 헛웃음을 지었다.
“머릿속에서라도 싸워 봤는데…….”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들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유주혁과 싸웠다.
그 결과는-
“어떻게 해도 도를 들 수가 없더라…….”
도를 들기도 전에, 모든 시도가 그에게 차단당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유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소문과…… 아니, 소문이 잘못된 수준인데요.”
그들이 직접 겪은 뇌화신성은, 절대 이십수신성급의 무인이 아니었다.
단 몇 초식이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십수신성이 아닌, 그 위의-
그 말을 하려던 이유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걸 인정한다는 건, 그가 자신들의 궁주와 동급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인호는 달랐다.
“궁주님과는 어떨지 몰라도…… 절대 무림십일존보다 약하다고 할 순 없겠구나…….”
물론 모든 무림십일존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느낀 바로는 그랬다.
“뇌강마신에 이어 뇌화신성이라…… 어떻게 두 명의 절대고수가 이렇게 한 번에 등장할 수 있는지…….”
하정윤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을 때, 그 말을 들은 강인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뇌강……마신……?”
“대사형?”
이유하가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으나, 그는 머릿속에서 떠도는 조각을 맞추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가.”
강인호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왜 그러세요?”
이유하와 하정윤이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애초부터,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자였군.”
“예?”
강인호는 자신의 사제와 사매를 쳐다보았다.
“한 시대에, 그것도 동일한 시기에, 뇌기를 쓰는 무림십일존급의 절대고수가, 두 명이나 나올 수 있다 생각하느냐?”
“그거야…….”
실제로 나왔으니 뭐라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강인호는 고개를 저었다.
“확률을 떠나, 불가능한 일이지. 왜 몰랐을까…….”
타인으로 취급하는 소문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선입견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뇌화문에서, 그런 강자가 나올 리 없다고.
강인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나직하게 말했다.
“뇌화신성이…… 뇌화문의 소문주가 바로-”
그는 망막에 맺힌, 그의 강렬한 뇌강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 * *
‘흥미롭군.’
침상에 드러누운 유주혁이 허공에 팔을 휙휙 그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강인호와의 비무가 너무나 빨리 끝나 버려, 생각보다 얻은 것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예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뇌전화륜지검에 잘 섞으면 이점이 있겠어.’
도법의 묘리를 검법에 집어넣는다는 건, 다른 사람이라면 생각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유주혁은 알고 있었다.
모든 무공의 끝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
무공의 시초로 올라가 보면, 전혀 상반되는 무공이더라도 비슷한 점은 반드시 있었다.
그 부분만 잘 가져올 수 있다면-
유주혁은 팔을 내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한 것이 있었다.
‘뇌천궁이 왜 녹림과 싸우고 있는 거지?’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
중원에 있는 산들을 점령하며 크기를 키워, 어느새 하나의 단체라는 말까지 듣게 된 산적 집단.
그들은 사파의 인물들이긴 했으나, 사사련 소속의 단체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행하고 싶은 것을 행하며 사는 자유로운 집단.
그것이 녹림이었다.
유주혁은 잠시 그들끼리 적대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서로 싸우든 서로 죽이든, 자신이 알 바는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계획된 일만 행하면 될 뿐.
* * *
다음 날 아침.
일 층에 내려온 유주혁은 시선을 돌려 객잔의 안을 훑어보았다.
‘이미 떠났나 보군.’
뇌천삼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객잔 어느 곳에서도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난 듯했다.
‘들러붙던 것치고는 쉽게 떨어졌군.’
그들의 목적은 뇌기의 새로운 발현법을 얻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도 그들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거 들었는가?”
유주혁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주위에 있는 탁자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슬쩍 눈을 돌려 그들을 바라본 순간,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정주에 그가 나타났다는구먼.”
“정주? 정주라면…… 가만, 설마…….”
무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흰 무복을 입고 있는 다른 무인이 입을 벌렸다.
“설마, 뇌강마신이 행차하신 건가?”
그 소리를 들은 유주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소문이 난 건가.’
해검문의 일로 무림맹에 가는 것이니, 어느 정도 소문이 돌게 될 것은 알고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뭐야, 기대했잖나.”
흰 무복의 무인이 실망했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나 이야기를 꺼냈던 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지금 이분이 등장한 거로, 정주에는 아주 난리가 났다네.”
“흠…… 대체 누군데 그러나?”
“최근 뇌강마신과 비견되는 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
“뇌화신성?”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대단한 무인 말일세.”
“뇌화신성보다 대단하다면…… 혹시……?”
두 무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흰 무복을 입은 무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혹 도신을 말하는 건가?”
도신, 전왕 등 여러 개의 별호를 가지고 있는 자.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뇌천궁의 뇌천궁주라는 직함이었다.
“뇌천궁주가 정주에는 왜?”
“뻔하지 않은가.”
“……그렇군.”
흰 무복을 입은 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바탕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겠구먼.”
“솔직히 우리 같은 무인들에게, 그런 일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
“하긴, 잘하면 절대고수들의 격돌을 볼 수 있는 건가?”
“그것 때문에, 지금 정주는 발 디딜 틈도 없다더구먼.”
“음…….”
잠시 생각하던 흰 무복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도 갈까?”
“당연하지. 난 이미 짐을 챙겨 뒀다네.”
“뭣이! 미리 말해 줬어야지!”
“나도 아까 일어나서 알게 된 일일세. 어찌 미리 말해 주겠나. 자자, 서둘러 먹고 준비부터 하세나.”
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고, 유주혁은 시선을 돌렸다.
‘뇌천궁주라…….’
자연스레 전생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귀찮아지겠군.’
* * *
“그래도 다행이네.”
하정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검성을 만나겠다고 출타하셨을 땐, 찾는 데만 몇 달이 걸렸었는데.”
이렇게 빠르게 소식을 듣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조금 아쉽네요.”
이유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표정을 본 하정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유 공자님이랑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요.”
“음…….”
하정윤이 묘한 침음을 흘렸다.
“뭐, 대사형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가는 방향은 같겠지만…….”
그가 뒤에서 걷고 있는 강인호를 흘낏 보며 말했다.
“일단 궁주님을 찾는 게 먼저니까. 그를 만나게 되면 무슨 일을 벌이실지 뻔하잖아.”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그래도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목적지가 같다면 또 만나게 되겠지.”
하정윤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발현법이라도 캐내 보려고 했더니. 진짜 단점을 극복한 거 같던데.”
“그러게요.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유하가 입술에 손을 대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응?”
앞쪽.
그들이 오르고 있던 가파른 언덕 위에서, 돌연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하정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어 소리의 원인을 찾아보았다.
그 원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또 시작이네.”
“거봐요. 포기할 머리가 없는 놈들이라 했잖아요.”
하정윤과 이유하가 한숨을 쉬었다.
“환단 얼마나 남으셨어요?”
“음…… 세 개.”
하정윤이 가슴팍에 달린, 가죽 주머니의 안을 들여다보며 답했다.
“그럼 이번엔 제가 할게요.”
“오, 어쩐 일로?”
“어제 비무를 보고 느낀 게 있거든요.”
이유하가 옆구리에 반듯하게 매달린 도집을 붙잡았다.
그녀는 굉음을 내며 굴러오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파직!
아직 뽑혀 나오지도 않은 도에서 뇌전의 소리가 감돌았다.
바위가 그들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해 올 때, 이유하는 한 걸음을 내디디며 도를 뽑아 올렸다.
뇌천수영도법의 오초식.
파짓!
짧은 소리와 함께, 그녀는 낭랑한 기합성을 내질렀다.
“뇌룡승천(雷龍昇天)!”
콰아아아아아악!
도에서 쏟아져 나온 뇌기가, 바위를 반으로 가르며 용솟음쳤다.
이유하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었을 때,
“조심해!”
하정윤이 다급히 외쳤다.
갈라진 바위 뒤에서, 거세게 회전하고 있는 수많은 도끼들이 튀어나왔다.
바위는 함정이고, 진짜 공격은 뒤에 숨겨진 도끼였다.
바위의 속도에 맞춰 도끼들을 투척한 것이었다.
이유하는 도끼들을 바라보며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몸을 회전시켰다.
삼초식.
“뇌천반전(雷天反轉)!”
그녀의 도가 몸과 함께 회전하며 도끼들을 사방으로 튕겨 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또 화살이네요.”
이유하가 코웃음을 쳤다.
“진짜 학습 능력이 없나!”
사초식 벽력파천도.
그녀의 도가 하늘을 찢으며, 쏟아지는 화살들을 녹여 버렸다.
마치 예전 하정윤이 행했던 것의 재연인 듯했다.
그러나,
“세 번째.”
전과는 크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철을 긁는 것처럼, 불쾌한 목소리였다.
이유하가 다급히 자세를 고치며 도를 당겼을 때, 그녀의 바로 앞에 누군가의 신형이 나타났다.
“……!”
세 번의 공격을 마치면 반드시 긴 호흡을 내쉬어야만 한다.
그것이 일도(一刀)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뇌천수영도법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자.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수염을 휘날리고 있는 중년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왔다.
콱!
강인호와 하정윤이 재빨리 도를 떨쳤으나, 상대는 이유하의 목을 틀어쥔 채로 땅을 박찼다.
“사매!”
하정윤이 이를 악물며 도를 휘둘렀다.
뇌천수영도법의 일초식 뇌전일-
“감히 본좌 앞에서, 뇌기 따위를 사용하려 하다니.”
도가 미처 휘둘러지기도 전에,
화르르르르르르륵!
거센 염화가 하정윤을 강타했다.
“커헉!”
황급히 도를 거두며 막았지만, 염화는 그의 방어를 쉽사리 뚫어 버렸다.
강인호는 서둘러 땅을 박차 하정윤을 받아 냈다.
그리고 눈앞에서 웃고 있는 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십수신성 중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자.
그 별호 하나만으로, 정파의 장로들마저 공포에 물들게 했던 대마두.
“홍염광마…….”
홍염광마.
그가 광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인호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눈만 굴려 하정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일단 방어를 해서 그런지, 중상이라 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강인호가 하정윤을 눕혀 놓고, 그의 앞에 서며 말했다.
“본궁은 당신과는 은원이 없을 텐데?”
그 말을 들은 홍염광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와는 없지.”
“……뭐요?”
강인호가 그를 노려봤을 때,
“와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사내들이, 저마다 병장기를 꼬나쥔 채로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녹림.”
녹림도들이 그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왜 당신이 녹림을 돕는 것이지?”
“이쪽도 사정이 있단다, 애송아.”
홍염광마가 혀를 찼다.
그는 녹림의 우두머리인 총표파자에게 빚이 있었다.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악우였던, 사사련의 부련주가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거니와, 그 자존심 강한 도왕의 부탁이라는 것이 흥미로워, 홍염광마는 그 부탁을 들어 주게 되었었다.
그렇게 그 쉬운 부탁은, 그의 예상대로 쉽게 해결되어 갔었다.
어떤 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
홍염광마가 이를 악물었다.
그 일은 어느 한 놈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거기다 큰 부상을 입은 채,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창궁단이라는 벌레 놈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그를 숨겨 주고 흔적을 지워 준 것이 녹림의 총표파자였다.
그 광기 어린 자에게 빚을 지는 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에겐 휴식이 시급했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창궁단의 추적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고, 상처 또한 깔끔하게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총표파자는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해 왔다.
그 부탁은 사소한 것들뿐이었지만, 천하의 홍염광마가 그런 일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수치였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뇌천궁과 척을 진다는 건 조금 불편한 일이긴 했으나, 자신의 흔적만 잘 지워 놓는다면 뇌천궁주가 알 수는 없을 것이었다.
홍염광마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그의 뒤에서 사내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덩치 큰 사내.
그를 본 강인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날에도 본 적 있는 자였다.
그 사내는 우렁차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대들지를 말았어야지.”
그 말을 듣자마자, 홍염광마에게 붙들린 이유하가 표독스럽게 외쳤다.
“본궁의 궁주님이, 당신들을 가만둘 것 같나요?”
사내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무림십일존은 네년의 궁주만 있는 게 아니란다.”
이유하가 이를 악물었다.
“거기다 이렇게 일을 키운 건 네놈들이지 않나.”
“…….”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들과 시비가 붙은 건 정말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소하게 끝나지 않았다.
마침 오랜만에 강호에 나와, 조금 흥분해 있던 하정윤.
그는 녹림의 한 산채를 그대로 몰살시켜 버렸다.
그러나 하필 그 산채는-
“부채주님을 죽여 놓고, 그냥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일반 산채의 부채주가 아니었다.
하정윤이 죽인 그는 녹림칠십이채를 총괄하고 있는 부채주였다.
즉 그가 몰살시킨 곳은, 총표파자의 바로 아래 있는 자가 이끌고 있는 산채였다.
물론 부채주라고 한들 하정윤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녹림은 무림십일존인 총표파자만 빼면,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단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러나…….
“시끄럽다.”
홍염광마가 혀를 차자, 사내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
강인호는 도를 우그러트릴 듯 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림도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를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이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는 달랐다.
‘홍염광마…….’
과연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잠시 이를 악물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기고 말고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사제와 사매를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반드시 해야만 했다.
강인호는 강하게 땅을 박차, 홍염광마의 머리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일초식 뇌전일도.
“호오.”
조금 전의 애송이가 펼친 것과는 다른 기세에, 홍염광마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강기?”
그의 도에, 노란색의 강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요즘은 개나 소나 강기를 써 대는군.”
혀를 찬 홍염광마가 이유하의 혈을 짚은 후, 맹렬한 기세가 담긴 주먹을 내질렀다.
홍염광마의 독문무공, 염화멸세권.
그 절세무공이 다시 한번 세상에 드러났다.
화르르르르르륵!
“큭……!”
강인호는 자신의 강기가 염화에 잠식되자, 서둘러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그만.”
쾅!
홍염광마의 다리가 그를 걷어찼다.
“커헉…….”
피를 토하고 있는 강인호를 보며, 홍염광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게 본좌다.’
팔을 잃어 전보다는 약해졌지만, 그럼에도 이딴 벌레 새끼들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홍염광마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그 새끼는 대체 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예전의 그곳에서도 벌어졌어야만 했다.
대체 그때랑 지금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쯧.”
또다시 분노가 머리를 잠식해 가자,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네놈들의 목적은 저놈이라 했느냐.”
“예, 저 검은 옷을 입은 놈이 이번 일의 원흉입니다요.”
“그럼 다른 놈은 죽여도 되겠군.”
“……예?”
“괜히 흔적을 남기는 것보단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낫겠지.”
“어…….”
사내가 말릴 틈도 없이, 홍염광마의 염화가 강인호에게 떨어져 내렸다.
“큭……!”
강인호가 전력을 다해 땅을 밀어냈다.
화르르르르륵!
땅을 굴러 염화를 피해 내긴 했으나, 그다음 이어지는 공격들까지 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강인호가 이를 악물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자라면…… 그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착잡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
돌연 강인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던, 홍염광마의 발이 멈춰 있었다. 아니,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멈춰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
홍염광마가 어느 한 곳을 쏘아보았다.
저벅.
누군가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뭐야?”
녹림의 사내가 험한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저벅.
그 순간에도, 그 누군가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으나, 태양이 그의 바로 위쪽에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쫓아내라.”
혀를 찬 사내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장 수하들이, 거대한 병장기를 쥔 채로 그에게-
서걱!
“……?”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다가가고 있던 자들의 몸이-
저벅.
마지막으로 걸음을 내디딘 그 누군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던 구름이, 조금씩 태양을 가려 가고 있었다.
“말했을 텐데.”
그림자가 지워지며, 그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막아서면 죽을 것이라고.”
그는, 유주혁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늘, 녹림을 지우겠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