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지?
파지지지지지지직!
섬광휘전을 펼친 유주혁이 뒤쪽에 내려섰다.
목표를 놓친 살수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는 새로 나타난 사람들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끌고 있는 자.
유주혁의 눈이 연신 괴소(怪笑)를 흘려 대고 있는 중년인을 향했다.
대장군부의 장군보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큰 중년인.
‘……그렇군.’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녹림왕, 혹은 총표파자라고 불리는 녹림의 주인.
‘투신.’
투신 양지학.
그런 별호를 부여받은 건, 그가 무림십일존 중에서도 가장 전투에 능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유주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총표파자를 직접 만난 건 전생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애초에 전생에서는 녹림과 전혀 연이 없었다.
‘녹림은 음신마존의 담당이었지.’
그들의 대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었기에 모른다.
다만 음신마존이라면 분명 어렵지 않게 정리했을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분명 편안한 안식을 선물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흠.”
돌연 그의 옆에 서 있는 자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살짝 굳은 표정의 노인.
그럼에도 그 표정 속에는 짙은 자부심이 엿보였다.
‘……누구지?’
처음 보는 자였다.
총표파자랑 같이 서 있긴 하지만, 그와는 다른 소속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의 경지로 보건대-
‘사사련의 당주나 호법이겠군.’
잠시 노인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고개를 쳐들며 물어 왔다.
“그대가 뇌강마신이오?”
유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
그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노인의 눈동자에 분노 어린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도신도 그렇고, 뇌기를 쓰는 자들은 하나같이 오만한 것 같구려.”
“내가 할 소리다. 혈수마종도 그러더니 사사련 놈들은 모두 혀가 긴가 보군. 날 죽이러 온 거면 빨리 덤비기나 해라.”
으득.
농락하듯 비아냥거리는 말에 노인이 이를 바득 갈았다.
“진정하시오.”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노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뇌강마신. 나는 은악교라는 사람이오. 사사련의 대호법을 맡고 있지.”
그 말에 유주혁의 눈이 번뜩였다.
‘대호법까지 동원했나.’
보통 어떤 단체이든, 부련주 정도의 직책으로는 대호법까지 움직일 권한이 없다.
그런 대호법이 동원되었다는 건-
‘이번 일은 사사련주가 관련되어 있었군.’
그동안 잠자코 있던 수라마제가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유주혁은 그와 같은 소속으로 보이는 두 명에게 시선을 주었다.
“다른 자들도 호법이겠군.”
“……육상풍이오.”
“고청우요.”
조금 전 이를 악물었었던 노인과,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노인이 답했다.
“그래서, 굳이 이름을 밝히는 이유는?”
그의 물음에 은악교가 빙긋 웃었다.
“자신을 죽인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가는 게 낫지 않겠소.”
사파의 인물치고는 꽤나 올곧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니.”
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
패배는 상정하지도 않는 모습에, 육상풍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대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나랑 담소를 나누러 온 건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그들이 시간을 끌고 있는 이유.
그 속셈이 뻔히 보였다.
“…….”
굳은 표정의 호법들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래그래, 꼭 힘없는 새끼들이 주둥이만 나불대지.”
그런 말과 함께, 총표파자가 시선을 향해 왔다.
“뇌강마신, 뇌강마신.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겠어.”
그가 씨익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네놈이 내 사업을 방해했으렷다.”
아마 녹림의 총부채주를 죽인 일을 말하는 걸 거다.
실상 그 일을 벌인 건 뇌천궁의 하정윤이었지만, 굳이 정정해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 또한 녹림도들을 학살했고, 그들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렇게 만난 이상, 자신을 위해서도 그를 죽여야 했다.
유주혁은 그의 뒤에 서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총표파자의 수하들인가.’
거친 얼굴의 사내들.
녹림칠십이채의 채주들일 것이다.
해 봤자 화경의 초입 정도.
산적 따위가 화경에 오른 것이 놀라운 일이긴 하나, 의외로 녹림에도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은 있었다.
본인의 문파가 멸문해서, 혹은 큰 범죄를 저질러 갈 곳을 찾지 못한 고수들이 산적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주혁은 시선을 돌렸다.
화경 정도의 무인들은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정도로는 전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신경 써야 할 건…….’
수하들도, 사사련의 호법들도 아닌 총표파자 쪽.
‘생사경이라.’
꽤나 명성이 자자하기에 완숙한 자연경 정도에 올라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전신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투기는 분명 생사경의 그것이었다.
‘꽤나 안정되어 있군.’
눈앞에 있는 근육질의 거한 또한 주승명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물론 완숙한 생사경이라 한들 신화경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신화경은 단계를 밟듯이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심(心), 기(氣), 그리고 체(體)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비로소 신의 끝 쪽 세계에 발을 디뎌야지만 오를 수 있는 경지.
그것이 신화경이었다.
그 경지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생사경과, 그렇지 못한 생사경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혈천삼존이 다른 자들보다 압도적인 무위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들이 신화경을 엿볼 수 있는 경지에 달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유주혁은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무시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생사경 하나와 현경 셋, 그리고 화경 아홉이라.’
거기에 더해 현경과 화경의 살수들까지.
“…….”
웬만한 문파들은 한 시진 내에 쓸어 버릴 수 있는 전력.
그 정도로 끔찍한 힘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야말로 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 언제까지 보고 있을 거지?”
그것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우우웅!
손에 든 검이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들은 유주혁의 입꼬리는,
“시작하자고.”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 * *
먼저 달려든 것은 은악교를 비롯한 사사련의 호법들이었다.
“앞뒤로!”
은악교와 호법들이 유주혁을 둘러싼 채, 진신내력이 실린 절초를 풀어 내었다.
은악교의 구천연폭장(九泉連爆掌).
육상풍의 천풍혈응조(天風血鷹爪).
고청우의 호령지검(浩零之劍).
사방에서 밀려드는 공격들.
그 공격들이 유주혁의 몸에 닿는 순간-
휘이이이이이익!
그의 몸이 회전을 시작했다.
써어억!
은악교가 허공을 격해 발한 장력이, 검에 갈라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본 육상풍이 표정을 굳히며 신중히 손을 뻗었다.
끼이이이이익!
한 마리의 매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그의 손끝에 붉은 강기가 맺혔다.
그는 강기를 만들어 내자마자 유주혁을 향해 찔러 넣었다.
몇십 년 전 강호를 공포에 몰아넣었었던 금나수법(擒拿手法).
육상풍의 조법은 상대의 팔다리 할 것 없이 닿는 순간 부숴 버리고, 또한 그 안에 있는 혈맥을 끊어 버리는 악명이 자자한 무공이었다.
그 악공(惡功)이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 한 사람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육상풍의 날카로운 손이 유주혁의 호신강기에 닿았다.
그리고-
“……!”
경악한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거뒀다.
“무, 무슨……!”
육상풍이 당황한 비명을 토해 내며 본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덜덜 떨려 왔다.
무공과 부딪쳤기 때문이 아닌, 단순히 호신강기의 내력에 밀려서 생긴 떨림이었다.
손을 거두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혈맥이 찢기는 건 그였을지도 모른다.
‘어찌 호신강기가 이 정도로……!’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같이 달려들던 고청우가 소리쳤다.
“공력을 더 불어넣으시오!”
그런 말과 함께, 그의 검이 호신강기에 맞닿았다.
호신강기는 강기로 만들어지긴 하나, 얇게 막을 펼치는 것인 만큼 강기 정도의 강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시작부터 전 내력을 실은 고청우의 검은 생각보다 간단히 호신강기를 꿰뚫었다.
그의 검이 회전하는 유주혁의 몸에 닿는 순간.
쾅!
회오리치고 있는 몸에서 한 줄기의 빛이 튀어나왔다.
“커헉!”
한 수만에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고청우.
볼품없는 광경이었으나, 이십수신성인 그였기에 검으로라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방금의 벽력섬멸에 가슴이 벌어져 온갖 장기들을 쏟아 냈을 것이었다.
“한심한 것들.”
호법들의 공격을 보고 있던 총표파자가 피식 웃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그는 뒤쪽에 여유롭게 서서, 팔짱을 낀 채 유주혁의 무공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렇게 있기를 잠시.
“계획을 잊지 마시오!”
은악교의 다급한 외침이 들리고 나서야, 그는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
유주혁은 총표파자가 나서자 회전을 멈추고 신중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무공은 견식 해 본 적도 없었으며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다만 나타나면서 펼쳤던 일수를 봤을 때 그의 무공은-
총표파자가 주먹을 쥐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권법.’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을 때,
파앗!
다시 은악교와 호법들이 달려들었다.
후웅!
절묘한 합겹술.
아까와는 달리 모든 내력을 쏟아붓고 있는 그들이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화아아아아악!
마침내 총표파자까지 전투에 끼어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난무하는 초식들과 연이어 들려오는 폭음.
“거리를 유지하시오!”
은악교가 장을 내지르며 외쳤다.
총표파자에 이어 그의 수하들까지 참전하자 유주혁의 주변이 사람들로 가득 차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 봤자, 그리고 합격술을 연마하지 않은 자들이 모여 있어 봤자 큰 힘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 공격의 궤도를 차단할 수도 있어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한 건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된 듯했다.
간격을 벌려, 자신들의 자리를 지킨 채 공격해 오는 사람들.
자유롭게 움직이는 건 투신, 총표파자가 유일했다.
“…….”
유주혁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제법이군.’
자신의 주변에 형성된 거대한 방진.
전생에서 펼쳤던, 나한승들과의 전투가 생각나게 하는 광경이었다.
‘우선…….’
사사련의 호법들과 총표파자, 그리고 그의 수하들을 한 번에 상대하며 자연진기를 퍼트렸다.
초반부터 주위를 휘돌며 틈을 노려 오던 살수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전투에 정신이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휘익!
뒤에서 달려든 은악교가 장심을 내질러 왔다.
동시에 좌측에서 육상풍의 조법이 맥문을 노려 왔고, 우측에서는 고청우가 검으로 옆구리를 베어 왔다.
또한-
쿠우우우우우우!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총표파자가 발한 권력이 심장을 노리고 들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검을 빙글 돌렸다.
휘릭!
검을 역수로 잡은 유주혁.
그가, 강기가 터져 나오는 검을 땅속에다 박아 넣었다.
뇌화문의 권법, 뇌전폭멸권의 초식 중 하나인 뇌폭.
그리고 그와 동일한 이름인, 뇌천수영도법의 육초식 뇌폭.
그 초식의 운용 방법을 가져왔다.
콰자자자자자자작!
땅속에서 퍼져 나가는 뇌강.
마치 땅속에서 용 수십 마리가 유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용들은 쇄도해 오는 자들의 다리를 향해 질주하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내 땅을 뚫고 올라와, 사람들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쿠헉……!”
비교적 무위가 약한 녹림의 채주들이 허공에서 피를 토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
그 소리들을 들으며,
팟!
땅에 반쯤 박힌 검을 지지대 삼아, 물구나무서듯 몸을 띄웠다.
유일하게 뇌강을 견뎌 내며 땅에 붙어 있던 총표파자.
그의 주먹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방금 있었던 곳을 지나쳤다.
직후 들려오는 굉음.
‘……운용이 특이하군.’
막대한 권력에 비해, 의외로 총표파자가 사용하는 내력의 양은 많지 않았다.
‘특수한 심법이라도 익힌 건가.’
타앗!
총표파자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유주혁 또한 땅에 내려서 검을 뽑아 들었다.
부딪치는 검과 주먹.
콰짓!
강기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를 꿰뚫었다.
그 순간-
피잉!
예상하고 있던 순간에 암기들이 날아왔다.
유주혁은 빠르게 검을 비틀었다.
총표파자를 쳐 내고, 암기들을 튕겨 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턱!
“……!”
총표파자의 왼손이 검의 호수(護手), 손잡이 위의 방패막이를 쥐어 왔다.
움직이지 않는 검.
믿기 힘든 괴력이 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동시에-
츠읏!
날아온 암기들이 호신강기를 뚫고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암기 따위가 호신강기를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런 것이 가능한, 특수한 암기들이 있었다.
당문의 인물들이 애용하는 암기.
호신강기를 전문적으로 파훼하는 비수.
‘파쇄비(破碎匕)……!’
전생에서 겪어 본 적 있던 이기(利器)가, 전신에 꽂혀 들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