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이상(理想)
“아, 오라버니!”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중,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마침 찾아가던 중이었어요.”
유화림이 방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같이 가도 괜찮죠?”
“뭘 새삼스레.”
미소 지은 유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들어오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방 안에 들어선 유화림이 불쑥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찾아온 적이 없네.”
자신이 남궁세가에 가며 바빠지기 전에는, 자신이 회귀해 오기 전에는 매일같이 방에 찾아와 시간을 때웠었던 그녀였다.
“오라버니가 바빠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다니시는데 어떻게 찾아와요.”
그녀가 입술을 내밀며 눈을 흘겼다.
“사람들이 보면 문파의 일이란 일은 전부 오라버니가 처리하는 건 줄 알겠어요.”
그 말을 들은 유주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장로원의 일이 있고 나서 칠 일.
그 칠 주야 동안 자신은 쉴 틈도 없이 여러 일을 처리하고 다녔었다.
‘근래 중 가장 바빴을지도 모르겠군.’
문파의 내부 일을 처리하는 것도 손이 많이 갔지만,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은 빈객과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고작 스무 살에 이십수신성이 된 뇌화신성과 그런 그를 배출한 명문(名門).
그런 뇌화문에 몸을 담고자 하는 자들과 연을 맺고자 하는 자들은 넘쳐날 정도로 많아, 하루마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저 그런 객이나 문파에 지나지 않았다면, 굳이 자신이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명망 높고 무림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뇌화문의 미래와 입지를 생각한다면 소문주인 자신이, 뇌화문의 최고수인 자신이 직접 그들을 맞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소문주 역할도 꽤나 피곤하군.’
전생에서도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바쁘신 건 알지만…… 무슨 일이든 쉬엄쉬엄하세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운 유화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항상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셔야 해요.”
“…….”
유주혁은 살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이런 일로 쓰러질 만큼 약하지는 않으니까.”
피로가 쌓이고 있는 건 사실이나, 고작 이 정도로 쓰러질 정도였으면 전생에서 혈존이라고는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걱정스레 쳐다봐 오는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그것보다, 어르신과 대화는 나눠 봤어?”
“황 할아버지요?”
“응, 너한테 진법에 관해 말씀하셨을 텐데.”
곧 뇌화문 전체에 걸쳐 펼칠 대진(大陣).
유화림은 그 진법의 수호자 역할을 맡게 될 예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 사흘간 그것 때문에 머리 아팠어요.”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에 간단한 거라고 하셔 놓고…… 외워야 할 게 산더미더라구요.”
단순히 펼치고 끝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앞으로 진의 유지 관리를 도맡게 된다.
그때를 위해선 고등 진법을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배워 둬. 확실히 익힐수록 본문이 안전해지는 거니까.”
“그래서 힘내고는 있지만요…….”
유화림이 불안한 시선을 향해 왔다.
“정말 저로 괜찮은 거예요? 그런 중대한 역할은 더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네가 해 줘야만 해.”
유주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펼칠 진법의 수호자는, 앞으로 뇌화문의 출입을 비롯해서 진의 효과에 관련된 수많은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 권한을 생각했을 때 수호자를 맡는 것은 문주의 직계 인물이어야만 했다.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맡을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문 내에 머물고 있을 수 없다.’
밖에 있을 시간이 더 긴 자신은 진의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버지도 맡으시기엔 부담이 되시겠지.’
지금도 일이 넘쳐나는 그에게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유화림이 수호자를 맡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뇌화문 내에서 지내고, 외부 사람과의 접촉 또한 극히 드물었으니 진의 관리를 하기에도 좋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리고, 너는 충분히 똑똑하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넘칠 정도였다.
“네?”
“누군가 그러더라. 네가 기재 중의 기재라고.”
이틀 전의 일이었다.
방으로 향하다 만났던 구양소화.
자신을 본 그녀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었다.
어째서 지금껏, 저런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냐고.
무엇을 가르치든 흡수하듯 배워 버리는 아이.
그녀가 말하길, 유화림은 뭐든 빨아들이는 천 같은 존재라고 했다.
“기재라니…… 제가요?”
수긍하지 못하겠단 표정의 유화림이 되물었다.
“소화 언니가 그러신 거죠? 그냥 의례적인 말일 거예요. 언니가 가르쳐 주시는 것도 헤매고 있는걸요.”
“글쎄.”
고작 칠 일 만에 연검을 익힌다면 그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검의 흐름을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잘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오라버니로서가 아니라 무인으로서 해 주는 말인데, 너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
“……정말요?”
“그래. 다른 무인이 본다면 굉장히 부러워할 정도의 재능이야.”
“…….”
“물론 그렇다고, 재능만 믿고 안주하는 건 안 돼. 그런 자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재능만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해낼 수 있지만, 그 이상 나아가려 하면 반드시 벽에 부딪히게 된다.
재능은 지름길을 터 주는 것일 뿐,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자신 또한 지금의 경지에 달할 수 있었던 건, 전생에서의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알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듯한 유화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 할아버지와 소화 언니한테 배우는 것 모두, 오라버니를 믿고 더 열심히 해 볼게요.”
“그래, 그거면 돼.”
유주혁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 내가 없어진다면, 네가 본문을 지켜 내는 거야.”
“……오라버니?”
“난, 밖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아, 밖에서 말이죠? 알겠어요! 저도 오라버니만큼 강해져서 우리 가문을 지켜 낼게요!”
표정을 굳히던 유화림이 방긋 웃고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기대되는데.”
“헤헤, 아, 참참! 들어 보세요, 오라버니. 어제 아저씨들에게 들은 건데요!”
신나서 이야기를 쏟아 내는 유화림.
유주혁은 재잘거리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밝고 포근한 기분.
이제는 생소하기까지 한, 전생의 이 방 안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
“…….”
과연 이 포근한 기분을 언제까지 느낄 수 있을까.
자신의 목적은 혈천회를 무너트리는 것.
그 위험천만한 길의 마지막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일지도, 혹은 자신의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느낌을 마지막까지 잊히지 않도록 가슴 깊숙이 간직해 두자.
“그래서 말이에요!”
“그래, 그래.”
유주혁은 따듯한 감정을 음미하며,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한 달 후.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명을 받고 떠나는 무사들을 지켜보며, 유주혁은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뇌화문에 복귀하고 한 달.
오늘날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움직인 덕분인지,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들은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이제는…….’
내부의 일이 아닌, 외부의 일로 눈길을 돌릴 차례.
유주혁은 주변의 기운을 파악해 본 후, 품에서 둥글게 말린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무당과 화산이라…….’
신창의 명이 담긴 전서.
남궁도진이 가지고 있던 이 전서는, 그가 정의련의 일로 뇌화문을 떠나며 맹주의 신분패와 함께 건네준 것이었다.
‘천궁환단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천궁환단 지급에 대한 건 이미 검성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니 이제 하나의 일만 처리하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
그 일에 대해 생각하던 유주혁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곧 떠난다고 했나.’
남궁도진과 남궁백은 세가로 돌아갔지만, 남궁세가의 대장로인 남궁성과 남궁소소는 아직 문 내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슬슬 미뤄 둔 말을 할 때인가.’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피해 왔던 남궁소소.
이젠 그녀를 만나야만 했다.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군,’
미간을 찌푸린 그는, 높이 솟아오른 한 전각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오라버니?”
문을 연 남궁소소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세요?”
“곧 세가로 복귀한다길래.”
“아, 들으셨어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들어오세요. 마침 차를 끓이려 했는데 오라버니 분도 준비할게요.”
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차는 나중에 마시자. 오늘은 네가 말한 부탁을 들어주러 왔어.”
“부탁이요?”
“검을 봐줬으면 한다며.”
“아……!”
남궁소소의 얼굴이 환해졌다.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미안, 그래도 손님인데 신경을 못 썼네.”
“죄송하실 필요 없어요. 오라버니가 바쁘시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걸요.”
그녀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게다가 제 일방적인 부탁이었잖아요.”
“음…… 그래서 말인데, 시간은 괜찮아?”
“전 괜찮아요. 오라버니야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나도 상관없어. 급한 일은 끝났거든.”
“그럼…… 지금 부탁드려도 될까요?”
남궁소소가 상기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러려고 온 거야. 준비하고 내려와, 밑에 있는 뜰에서 기다릴게.”
“아! 검만 챙기면 되니까 같이 가요!”
다급하게 외친 그녀가 방 안으로 사라졌다.
“…….”
유주혁은 그녀를 기다리며 주변의 기운을 살펴보았다.
‘빈객도 제법 늘었군.’
귀빈각은 뇌화문에 몸을 의탁한 자들 중에서도 명성 있는 자들이 배정받는 곳이다.
그런 귀빈각 내에서 적지 않은 기운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전의 남궁도진처럼 잠시 머무는 자들도 있긴 하나, 그들을 제외한다고 해도 상당한 수인 건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힘을 보인 후에 단숨에 늘어났어.’
빈객의 급과 수는 그 문파의 위상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그것으로 볼 때, 뇌화문은 이제 중소문파라고 부르기에는 미묘한 위치에 서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점점 커져 간다면…… 오래지 않아 대문파로 발돋움할 수 있겠지.’
머지않은 미래.
그 미래를 생각하던 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덩치를 키우는 건 그만둬야 한다.’
힘을 얻는 것도 좋으나, 문파가 감당하기 어려운 힘은 쓸데없는 분란만 가져올 뿐이다.
이젠 지닌 힘을 안정되게 다져야 할 때였다.
문주 직계만이 이용할 수 있는 넓은 연무장.
“최근엔 어디서든 오라버니 이름이 들려와요.”
검을 뽑아 든 남궁소소가 선망의 눈빛을 보내왔다.
“이십수신성…… 직접 보니까 신기한 느낌이에요.”
“처음 본 듯이 말하네.”
“그야 처음이나 마찬가지인걸요.”
“남궁가주님도 그렇잖아. 너 옆방에서 지내는 분도 그랬었고.”
게다가 그녀의 조부는 무림십일존이다.
이십수신성을 봤다고 해서 색다른 감정을 느끼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고개를 저어 왔다.
“그래도 아버지나 대장로님은 연세가 있으시잖아요. 오라버니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경악할 일이라고요.”
“…….”
“분명 무림사에 기록되어 후세까지 전해지겠죠. 전 그런,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거고요.”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그 검법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만 있다면.”
유주혁의 말에, 남궁소소가 본인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사양 말고 펼쳐 봐.”
그가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자신의 경지라면, 상대의 검법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것보다 확실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더욱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날 죽일 생각으로 덤벼.”
살심이 담긴 상대의 검을 직접 받아 보는 것.
상대를 파악하는 것에 있어 그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원래는 그냥 지켜보려고만 했지만…….’
그러고는 간단한 조언 몇 개만 던져 주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그녀의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을 들은 후로는 생각을 바꿨다.
남궁소소가 품은 높디높은 이상.
‘그러고 보니…… 전에 검후의 검법도 배우고 싶다 했었지.’
현 무림십일존이자, 무림 사상 최강의 여고수라는 검후.
그런 그녀가 창시한 천해검법.
남궁소소는 제왕검형과 더불어, 그녀의 천해검법 또한 배우고 싶어 했었다.
당시의 자신은 단순히 그녀가 상승 무공을 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물론 그 생각은 그녀 본인이 인정했듯 틀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본심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상승 무공이 아닌, 최강의 여인 검후에 대한 동경.
그녀가 천해검법을 배우고자 했던 마음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역사에 남을 여고수라…….’
남궁세가의 남궁소소가 아닌, 모든 곳에 발자취를 남기는 검후 남궁소소.
그것이 남궁소소가 바라 온, 마음속에 항상 품고 있던 진짜 이상이었다.
“…….”
여류 무인이라면 누구나 품어 봤을 꿈.
다른 시대에, 지금이 아닌 평온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녀는 그 꿈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재능이 있는 여인이란 건 틀림없었다.
다만-
‘힘든 꿈이군.’
그러나 현세대에는 괴물 같은 강자들이 넘쳐났다.
당장 그녀 위로 같은 검법을 수련하고 있는 남궁선옥이 있었으며, 세상의 끝에는 무력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혈천회 또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런 틈에서 이름을 남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생각을 바꾼 것이다.
진동을 시작하는 남궁소소의 검을 보며, 유주혁의 눈은 빛을 발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자신이라고 해도 그녀의 이상을 실현시켜 주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꿈에 가까이 데려다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자신은 만인이 우러러봤던 혈존이자, 만인이 우러러보고 있는 뇌강마신이니까.
그러니까-
콰아아악!
유주혁의 검에서, 짙은 살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