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넘실거리는 파도는 하늘을 뒤덮더라
“…….”
유주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때도 다른 게 없군.’
똑같은 건물, 똑같은 분위기, 똑같은 소음.
기억 속에 있는 장소와 모든 것이 똑같다.
‘……아니, 하나는 다른가.’
자신의 전생.
삼 년 뒤의 이곳과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죄다 처음 보는 놈들뿐이군.’
투혈장(鬪血欌)의 상석에 앉아 있는 낭인들이,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자들이라는 것.
‘뭐,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낭인이라는 존재들은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초개처럼 살아가는 무인들.
‘결국…… 삼 년이 되기 전에 모두 죽는다는 뜻이군.’
하긴, 자신이 알던 낭인들 역시 결국엔 모두 죽음을 맞이했었다.
개중에는 높은 급을 가진 자들도 있었고 상당히 뛰어난 무공 실력을 지닌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결말 또한 하급의 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순히,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의 차이일 뿐.
“…….”
잠시 비명이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던 유주혁.
그가 고개를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투혈장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신이 찾고 있는 상대는 낭인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살짝 정신이 나간, 돈 많은 일반인 여럿도 투혈장 이곳저곳에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자신이 찾는 사람은 아니었다.
‘분명…… 이쪽 방향이었나.’
조금은 희미해진 기억에 의지하며 몸을 움직였다.
거의 십오 년 전에 달하는 기억이긴 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상당히 강렬했었기에 아직도 많은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지금 와서 보니 더 커 보이는군.’
낭인들의 터, 낭인들의 구역이라고 하면 음지에 있는 작고 어두운 곳을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웬만한 성도의 시장에 비할 수 있는, 양지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곳이었다.
이런 곳이 버젓이 존재할 수 있는 건, 한 거대 세력이 낭인 시장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사련.’
중원의 낭인 시장들은 사사련의 비호를 받는다.
무림에 발을 걸치고 있다곤 하나 직접적인 연이 적은 낭인들.
자칫 관에 간섭받을 수도 있는 그들은 불가침 조약이 있는 무림과 깊은 연을 맺기를 원했다.
그것을 알게 된 사사련은 낭인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살아남기 위한 낭인들은 그들이 내민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관이 개입하지 못하게 힘 써 주는 대신, 일정한 상납금을 지불하라는 조건을.
‘정파도 개입하지 않으니……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군.’
자신들이 정의라 부르짖는 정파도 낭인들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사파의 무사들인 건 아니니 건드릴 명분도 없거니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가는 여러 곳에서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낭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자들이다.
수가 넘쳐나는 그들이 한곳에 뭉치면 꽤나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게 될 터.
때문에 정파 역시 낭인들과는 상생하는 방향을 택했다.
‘뭐, 이곳이 이렇게까지 커진 건 제갈세가가 의도한 거겠지만.’
낭인 시장이 사사련의 관할이긴 하지만, 양양은 제갈세가의 영역이다.
낭인들이 귀찮은 존재라고 한들, 그들이 달갑지 않았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없애 버렸을 것이다.
‘그자들이라면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었겠지.’
그럴 수 있는 머리와 행동력을 가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방치해 둔 건, 이곳이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보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미간을 찌푸린 유주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의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 원하는 소리가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
결국 기억 속의 건물을 찾지 못한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금속과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곳.’
그런 곳을 찾아야 한다.
뜻이 이는 동시에, 백회를 통해 자연진기가 퍼져 나갔다.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수많은 기운들.
병장기를 지닌 낭인들이니만큼 금속의 기운의 수가 너무 많았다.
다만-
‘……이쪽이군.’
화상을 입을 것 같은 극염의 기운.
그런 기운과 함께 전해져 오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유주혁.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
잠시 건물을 올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하군.’
안에 들어서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덮쳐 왔다.
동시에,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귀를 꿰뚫었다.
곳곳에 놓인 수많은 병장기들.
그리고 그사이를 지나다니는, 여러 명의 대장장이들.
유주혁은 대장장이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없다.’
찾는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곧바로 찾는 건 무리인가…….’
그가 근처의 장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
“여쭤볼 게 있습니다.”
“……검을 사려면 옆 가게로 가고, 의뢰를 하려면 파란 천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시오. 일을 받는다는 뜻이니까.”
손을 멈추지 않는 장인이 퉁명스레 말했다.
“의뢰를 하려고는 하는데, 지정한 분이 제작해 주길 바랍니다.”
“누구에게 맡기나 비슷할 거요. 뛰어난 무기를 원하는 거라면 잘못 찾아왔소.”
그의 말대로, 이 대장간에서 뛰어난 무기를 의뢰하는 건 무리였다.
장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대장장이들의 실력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장인들은 다른 대장간에서 쫓겨나,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흘러들어 온 자들.
본인의 작품에 긍지도 없으며 단순히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쇠를 두드리는, 밖의 낭인들과 같은 처지의 인간들이었다.
유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뛰어난 무기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
“하지만, 꼭 그분이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찾는 자가 누구요.”
그는 재빨리 말했다.
“공(公)가 성을 쓰는 분입니다.”
“공가…… 공가라면…… 공소천(公燒玔)? 그 노인을 말하는 거요?”
“맞습니다.”
대답하는 순간, 장인이 코웃음을 쳤다.
“하필 의뢰를 해도 그런 사람에게 하려 하다니.”
“…….”
“원하는 게 뭐요? 혹 싸울 상대에게 선물할 무기라도 찾는 거요?”
“제가 사용할 검입니다.”
“허어…….”
눈살을 찌푸리는 장인.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요. 일회용 검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오.”
이곳의 장인에게조차 무시당하는 공 노인.
만약 자신이 그의 내력을, 공소천의 실체를 몰랐다면 이 장인의 말에 따랐을지도 모른다.
“일단은 대화라도 나눠 보고 싶습니다. 혹시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글쎄. 또 어디서 술이라도 퍼 마시고 있겠지. 오늘은 안 나왔소. 아니, 애초에 나오는 일이 드문 자요.”
“그럼, 나중에 만나시면 말씀 좀 전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말에, 장인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씀만 전해 주시면 됩니다.”
물러서지 않고 재차 말하자, 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기대는 마시오. 말했듯이 만나기도 힘든 자니.”
“감사합니다. 그분에게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고귀한 봉황이 날아오르니, 넘실거리는 파도는 하늘을 뒤덮더라’.”
“그게 무슨 뜻이오?”
“뜻은 없습니다. 그냥 전해 주시면 알아들으실 겁니다.”
“흠…….”
인상을 찡그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알겠으니 이제 저리 좀 가시오. 정신 사나워서 일을 못 하겠소.”
감사의 뜻을 전한 유주혁은 곧바로 대장간을 나왔다.
공 노인이 없는 대장간에서 시간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아쉽군. 기운이라도 알고 있다면 직접 찾아봤을 텐데.’
무려 십 년도 더 된 시기에 만났던 자이며 그리 연이 깊지도 않았던 자다.
그런 자의 기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특정 인물의 기운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살아갔던 시절.
천인지체의 고통에 휩싸이고, 주변의 상황에도 휩싸였었던 자신.
무너져 가는 정신 상태를 다잡는 것도 벅찼던 때이다.
특정 인물의 기운을 읽고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공 노인이 제 발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면 그쪽에서 날 기다리겠지.’
만약 지체될 것 같다면, 무당을 먼저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리라.
유주혁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양양에 도착한 날로부터 사흘.
벌써 사흘이 흘렀지만, 공 노인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내일까지 진척이 없으면…… 일단 검 제작은 미뤄야겠어.’
다녀올 곳이 적지 않으니,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
계획을 다시 세운 유주혁은 객잔의 방을 나와 일 층으로 향했다.
오늘도 무공 수련을 하며 하루를 보낼 생각이었다.
‘오늘은…… 권법으로 시작해야겠군.’
자신의 주무기가 검이라고는 하나, 권각(拳脚)에 대한 수련 역시 게을리할 수는 없다.
전투 중에 생길 갖가지 변수.
그것들에 대처하기 위해선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어야 했다.
손목을 풀어 주는 유주혁.
그가 가문의 권법 초식을 되새기며 출구로 향하고 있을 때,
“그게 뭔 소린가?”
“나도 모르겠네. 근데 어제부터 여기저기서 들리더구먼.”
한 무리의 대화 소리가 그의 의식을 붙잡았다.
“뭐라고 했지? 벼락과 꽃…… 뭐?”
“그러니까…….”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중년인들.
그중 한 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벼락 밑에 피어난 꽃. 그 꽃을 가진, 가진…….”
“뭐라고?”
“가만있어 보게. 그러니까…… 아! 그 꽃을 가진 여인은 하늘의 달 속에 잠들어, 언제까지고 임을 기다리더라. 이거네.”
“흠, 임을 기다린다니…… 뭐, 시구절인가?”
“그런 것 같긴 한데, 낭인들이 읊고 다니니 이상한 게지.”
“낭인들이라…… 맨날 목숨 걸고 싸워 대더만, 드디어 돌아 버렸나 보군.”
“그러게 말일세. 이젠 문인이 되려는 건지.”
시시덕거리던 두 사람.
“자, 슬슬 가세. 조금 늦었구먼.”
식사를 끝낸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실례하오. 좀 지나가겠소.”
유주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
출구 앞을 막아선 그는,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 뭐요?”
피풍의로 몸을 가리고 있어 그런지, 상대가 경계하는 태세를 취해 보였다.
“…….”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유주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이야기, 다시 한번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야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중년인.
“무슨 이야기 말이오?”
“방금 한, 낭인들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혹시 낭인이시오? 그렇다면-”
“전 낭인이 아닙니다.”
유주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어디서 들어 본 구절 같아 궁금해서 그럽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 그렇구려. 난 또.”
시비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들이 경계를 풀었다.
“음, 난 잘 모르지만, 그냥 어제부터 낭인들이 입에 올리곤 하더군.”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네요. 다시 한번 읊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벼락 밑에 피어난 꽃. 그 꽃을 가진 여인은 하늘의 달 속에 잠들어, 언제까지고 임을 기다리더라’.”
“…….”
“뭔지 아시겠소?”
잠깐 생각하던 유주혁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시가 아니네요.”
“그렇소? 하긴, 시라고 하기에는 운율도 엉망이니까. 시구절이라기보단 글귀에 어울리는군.”
“그렇네요. 길을 막아 죄송합니다.”
사과와 함께 비켜선 그에게, 중년인들은 신경 쓰지 말라며 웃어 준 후 객잔을 나섰다.
“…….”
그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본 유주혁.
그 역시 객잔을 나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권법을 위주로 수련할 생각이다.
간만에 뇌전폭멸권을 펼치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벼락 밑에 피어난 꽃.’
하지만, 그 전에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
벼락 밑에 피어난 꽃. 그 꽃을 가진 여인은 하늘의 달 속에 잠들어, 언제까지고 임을 기다리더라.
이건 시구절도 아니고, 글귀도 아니다.
이건-
‘누가…….’
이건, 전서다.
자신을 향한 전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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