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죽음의 의미
[……알겠소이다. 제갈 소저께선 본파의 제자들을 돌봐 주시길 바라오.]
어쩌다 보니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지만,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제갈수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파앗!
운양자가 거세게 땅을 박차, 환영마존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마치 한 자루의 검과 같은 모습.
그런 모습을 본 환영마존은,
“단조로운 공격이구려.”
무심한 눈빛을 보이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곧 새하얀 강기를 두른 무예검과 그의 검은 수강이 부딪치고-
콰앙!
검과 손이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쾅!
빛살 같은 빠르기로 급소를 찔러 가는 수강.
“큭……!”
그 공격들을 막아 가던 운양자가 이를 악물었다.
‘아까와는 다르다.’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경력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 육신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환영마존.
운양자는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모든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상대가 이상을 눈치챈다면, 그때부터 남는 것은 혈투(血鬪)뿐.
자신 혼자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상황이 급변해 위험해진다 해도, 제 몸 하나 빼내는 건 충분하다.
다만,
‘분명…… 아이들이 휘말리게 될 터.’
앞으로의 무당파가 어찌 될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 이곳에 있는 제자들만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
그러니-
“……하압!”
운양자가 낭랑한 기합성을 터트리며 남은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무예검을 움직여 찔러 오는 손을 밀고 당겼다.
스으으으읏-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이화접목(移花接木)이 힘을 역이용해 상대의 힘을 중화시키는 것이라면, 사량발천근은 역이용한 힘으로 상대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는 태극(太極)의 기예였다.
“호오.”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내력에, 환영마존이 흥미로운 탄성을 발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끊길 때 즈음에는, 사라진 내력이 배의 힘을 가진 채 그의 몸을 덮쳐 오고 있었다.
“재밌는 수법이군.”
묘한 웃음을 흘린 그가,
콱!
팔을 타고 오르던 검신을 붙잡았다.
“……!”
운양자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현재 무예검의 검신에는 본인의 내력과 더불어 상대의 내력까지 휘돌고 있는 상태다.
아무리 강기를 두른 손이라 해도, 그런 막대한 내력이 담긴 검신을 상처 하나 없이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많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야…….’
저런 건, 내력의 양보다는 내력의 질이 월등해야 가능한 것.
그 말은-
운양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선천진기.”
중얼거린 그가, 어리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역천을 행함으로 잠시의 힘을 얻을 수는 있소. 다만, 그 힘은 결국 본인을 자멸시킬 것이오.”
“글쎄, 그것이 이 몸의 끝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
운양자는 숨을 들이마시며, 검에 흐르는 내력의 길을 변화시켰다.
핏!
굳세게 붙잡혀 있던 무예검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듯 상대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뒤이어,
휙!
운양자가 본인의 검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후우웅-
머리 위에 자리 잡은 검.
그 검은 시간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기어검.
본래 이기어검에는 많은 내력을 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전투 중에 사용되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다만-
후우우우웅!
태극선인 운양자는, 그 본래를 다른 방법으로 극복한 자였다.
“흠…… 태극혜검인가.”
단번에 꿰뚫어 본 환영마존이 중얼거렸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무당의 최고 절기이자, 오직 상대의 힘만을 통해 극을 선보이는 무공.
많은 내력을 담을 수 없다면, 본인이 아닌 상대의 힘을 이용해서 싸우면 된다.
운양자는 지금껏, 이기어검과 태극혜검을 합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었다.
이제는, 그 결과를 확인할 때였다.
“본 검은, 본파의 무공 중에서도 유독 날카로운 무공이오.”
본능적으로 경고를 발한 운양자.
그의 손이 검결을 맺었다.
“죄업을 짊어진 악귀여, 본파의 이름으로 당신을 베겠소.”
“추상적인 말이군.”
동시에 새로운 수법을 준비한 환영마존이 불쾌한 웃음을 흘렸다.
“고작 태극혜검이 끝이라면, 그대는 날 이길 수 없소.”
츠으으읏!
돌연, 환영마존의 손안에 검 하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심검?”
순간 눈을 부릅뜬 운양자가 중얼거렸으나-
‘……아니, 심검이 아니다.’
그는 곧바로 본인의 말을 부정했다.
심검은, 사람의 기와 세상의 이치가 조화해서 탄생하는 검.
그런 검이 저렇게 불길한 기운을 내뿜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저것은-
“환영이구려.”
저건, 환영이다.
무림십일존인 자신마저 속일 정도의 환영.
“……환영은 단지 환영. 아무리 진실 같아 보여도 빈껍데기일 뿐이오. 그런 검으로는 그 무엇도 벨 수 없소.”
“아니, 상대가 이상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그때부터 환영은 진짜가 되는 것이오.”
그렇게 말한 환영마존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츠팟!
돌연, 그의 몸이 잔상으로 남아 흐트러졌다.
이형환위.
운양자는 주변의 기운에 집중하며, 검결을 맺은 우수(右手)를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채채채챙!
주변에서 소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다가가려는 환영마존과 막아서는 무예검.
“대단해…….”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도사들.
그들이 치열한 격전에 입을 벌렸다.
그들에겐 그저, 검고 새하얀 무언가가 번쩍이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사백조님과 대등한 실력이라니.”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제갈수란이 고개를 돌렸다.
“상태는 어떤가요?”
운기조식을 마친 운항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음, 여전히 좋진 않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나아졌소.”
“다행이네요.”
확실히, 혈색은 아까보다 좋아 보였다.
“그나저나…… 사백조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구려.”
상황이 끝났다는 것 같은 말투에, 제갈수란이 고개를 저었다.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지금 불리한 건 태극선인 쪽이니까요.”
“……지금 같은 광경을 보고 있는 것 맞소? 어떻게 보아도 대등한 상황인데…….”
“당장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이대로 수십여 합이 지나가면, 저자의 검은 태극선인께 닿게 돼요.”
“……그걸 어찌 아시오?”
“예측이에요. 조금씩 조금씩, 검이 부딪치는 곳이 태극선인께 가까워지고 있으니까요.”
멀리서 보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이랑 상황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대등한 대결을 펼쳤던 처음.
그러나, 그 대등한 대결은 환영마존이 공격보다는 회피를 택함으로써 성사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방어가 아닌, 오직 공격만을 하고 있는 중.
거기다 선천진기까지 사용하고 있는 듯하니, 처음이랑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 당장 상황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아……!”
바로 옆에서 탄식 어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 검이……!”
제갈수란의 시선이 급히 움직였다.
기어코 운양자에게 다가간 환영마존이, 그의 빈틈을 노리던 무예검을 강하게 올려쳤다.
그리고-
팽그르르!
단번에 내력이 끊어진 무예검은, 초라하리만큼 가벼운 모습으로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 버렸다.
“사백조님!”
검의 모습을 좇던 도사들이, 운항의 외침에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큭……!”
가슴에 긴 검상을 입은 운양자.
그가 피를 흩뿌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도와드려야……!”
운항이 서둘러 땅을 박차려 했으나,
“안 돼요.”
제갈수란이 냉정하게 끊어 말했다.
“저희가 가 봤자 방해만 될 뿐이에요.”
“그렇다고 두고 볼 수는 없잖소!”
“……당신의 사백조를 믿으세요. 무림십일존이란 이름은 그리 가벼운 게 아니에요.”
적어도, 그녀가 아는 무림십일존은 그랬다.
누구보다 빛나던 그 별은 언제나 당당했으며, 언제나 강인했고,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보였다.
그러니, 그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라면-
‘이 정도 상황은…… 견뎌 낼 수 있을 거야.’
그래 줘야만 한다.
그것이, 모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엇……!”
주먹을 쥐던 운항이 당황한 비명을 내질렀다.
츠르르르릇!
그동안 잠잠하던 공간이, 다시 한번 구부러지고 있었다.
운양자의 발밑.
“……!”
왜곡된 공간에 발이 빠진 그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촤앗!
불길하게 빛나는 검은 검신이, 운양자의 심장에 박혀들었다.
“아아……!”
경악한 운항이 털썩 주저앉았을 때,
스르륵!
가슴을 꿰뚫린 운양자의 신형이 안갯속으로 흩어졌다.
“……어?”
운항의 얼빠진 목소리와 함께,
팟!
환영마존과 일 장 정도 떨어진 허공 위에, 운양자의 신형이 나타났다.
제운종(梯雲縱).
유운신법과 대를 같이하는 신법이자, 이형환위의 묘리가 담긴 신법.
“하압!”
허공을 밟고 솟아오른 운양자가, 그대로 환영마존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태극혜검의 태초는 태극검법(太極劍法)에서.
태극검법의 태초는 태극권(太極拳)에서.
그리고 태극권의 태초는, 태극기공(太極氣功)에서.
무당파의 무공은 시작과 끝이 하나인 무공이다.
검이 없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의 손이 검봉이고, 그의 발이 검병이며, 그의 몸이 곧 검신이었다.
모든 갈래의 흐름은 종극에 달해 하나가 되는 법.
만류귀종(萬流歸宗)의 이치가 담긴 운양자의 쌍장이, 환영마존의 검과 충돌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귀를 꿰뚫는 굉음과 함께, 천주봉의 대지가 거칠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으, 으억!”
“중심을……!”
돌연 찾아든 지진.
앞쪽에서 폭발한 내력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
내력을 이용해 중심을 잡은 제갈수란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단번에 모든 힘을 끌어다 쓴 운양자.
그가 형편없는 꼴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환영마존은-
“큭……!”
그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는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찮은 수작을…….”
아니, 타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 역시 내상을 입은 것 같긴 하지만, 꼿꼿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작은 충격에 그친 듯했다.
그렇다면, 그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어째서인가.
순간.
“……!”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렇군, 그대가 시작인가.”
츠팟!
또다시 허공에 잔상을 남긴 그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상대는 빈도라 했을 텐데……!”
쾅!
그들의 사이에 나타난 운양자가 두 팔로 환영마존을 막아섰다.
“쿨럭……! 떨어지시오!”
피를 내뿜으며 외치는 운양자 덕에, 제갈수란과 도사들은 더욱 멀찍이 물러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 사백조님이…….”
그들 대신 희생한 운양자는 끔찍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촤촤촤촤촤촥!
연속으로 휘둘러지는 환영검(幻影劍)이 운양자의 전신을 베어 갔다.
조금 전의 일격에 모든 내력을 끌어다 쓴 그는, 제대로 된 방어 자세조차 취할 수 없었다.
그저 상대에게서 전해지는 내력을 이용해 간간이 공격을 흘려내는 것.
오직 그것만이, 그가 당장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스으으으읏-
물론, 그것 또한 한계는 존재했다.
촤랏!
“큭!”
흘려내지 못한 공격 하나가, 어깻죽지를 베고 지나갔다.
동시에 자세를 다잡을 새도 없이, 상대의 수강이 심장을 찔러 들었다.
‘……피할 수 없다!’
아까처럼 이형환위의 신법을 펼치기에는 내력의 보충이 충분치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운양자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을 펼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무당의 제자들은 당장……!”
그 목소리가 끝맺어지기 전.
“커헉!”
돌연,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투두둑!
갑작스레 피를 쏟아 내는 환영마존.
그를 본 운양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타앗!
그는 모든 힘을 다해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백조님!”
“다가오지 마라!”
운양자가 도사들을 만류하며, 이상 행동을 보이는 환영마존을 응시했다.
‘내상이 도진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리는 상대.
“…….”
지금 공격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운양자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공격할 수단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제자들을 빼내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이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구나…….’
왜곡된 공간 탓에, 제자들을 도망치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더 버티는 것만이-’
그런 생각을 하던 운양자.
그의 상념이, 단번에 끊어졌다.
“뭐, 뭐야!”
“하, 하늘이……!”
어린 제자들의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운양자는 환영마존을 경계하며 빠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개천(開天)의 광경을 목격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 끝.
하늘이 깨져 나가고, 새로운 하늘이 태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치지이이이이이이이이익!
듣기 거슬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무언가 갈리는 것 같기도 하고,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기묘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았던 소리.
그 소리가, 점점 거슬리는 소리를 뛰어넘어 사방을 잠식해 갔다.
쿠르르르르르르르릉!
세상을 뒤덮는, 뇌성.
그 뇌성에 뒤덮인 세상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촤아아아아악!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한, 마치 물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묘한 느낌.
참았던 숨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에, 운양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어…… 어어!”
경악한 비명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설마……!’
운양자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는 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상대는, 악귀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 서 있었다.
다만-
“자, 장로님……?”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더 이상 처음 보는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운양자 또한 알고 있는 얼굴.
무당파의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얼굴.
“……청유.”
청유진인이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이번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잠시 숨을 고르던 청유진인이, 불쾌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얻은 게 적진 않군.”
그가 말을 잇는데도, 사람들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흠…….”
그런 그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환영마존은 고개를 돌렸다.
“떠나기 전, 중요한 일 하나만 끝내야겠소.”
그의 시선이, 운양자에게 자리 잡았다.
“……오시오, 악귀여.”
잠시 동안 힘을 보충한 운양자.
그가 고개를 끄덕-
“……!”
운양자가 다급히 땅을 박찼다.
상대가 노리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피하시오!”
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환영마존의 신형이 제갈수란을 향해 쇄도했다.
“으, 으아아악!”
두려움에 사로잡힌 무당의 제자들이 황급히 도망쳤다.
“진으로 향하라!”
그들을 따라, 운항 또한 신법을 펼쳤지만-
“……뭐, 뭐 하는 거요!”
뒤를 돌아본 그가 경악했다.
아직까지 자리에 서 있는 제갈수란.
그녀는 다가오는 환영마존을 바라보며,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큭……!”
운항이 신법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달려들지는 못했다.
이성을 뛰어넘는 두려움이, 그의 발에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결국, 운항이 이를 악물었을 때-
“……?”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왜, 다들 움직이지 않…….’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시선 끝의 사람도, 사백조도, 그리고 괴물 같은 상대도, 모두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
“…….”
침을 꿀꺽 삼킨 운항이, 천천히 떨리는 발을 옮겼다.
차마 다가가지는 못하고, 옆으로 돌며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보였다.
등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
츠츠츠츠츳!
아까 전보다 밝게 빛나는,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검.
무당파의 신물이, 허공에 뜬 채 청유진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운항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무예검이 어디서-’
그 순간.
콰직-
돌연 성스러운 무예검 위로, 어떤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유의 소리와,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운.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환각으로나마 봤었던 것.
그런 기운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협.”
제갈수란의 목소리였다.
“아.”
운항은 깨달았다.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은 청유진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았던 건, 두려움에 몸이 굳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청유진인의 뒤쪽.
그곳에서, 한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터벅.
공간을 울리는 발소리.
나직한 소리였지만, 운항의 귓가에는 그 어떤 소리보다 커다랗게 들렸다.
마치, 하나의 뇌성을 듣는 듯한-
“여기 있었군.”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용하지만, 귀를 꿰뚫는 듯한 목소리.
감히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어둑한 무언가가 가득 찬 목소리.
그런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오늘, 네놈에게 가르쳐 주겠다.”
유주혁은, 말했다.
“죽음의 의미를.”
섬광이, 세상을 뒤덮기 시작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