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무 외롭고 쓸쓸했던 나는 마왕의 신부가 되버렸다-82화 (82/246)

82회

[ chapter # 7 ] 슬픈 용사는 시간을 되돌린다.

‘따뜻해요.’

불사조의 기사가 던져준 코트를 몸에 두른 저는 울음을 쏟아낼 것만 같았어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던 친구들과는 다른 따뜻함이었어요.

‘이런 상황이면 너무 곤란한데···.’

‘고, 곤란하시다니요?’

‘이제 내가 지내야 되는 집이니까.’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창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어왔어요.

붉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

차마, 인간이라고 말하기 힘든···

얼굴이 보였어요.

신이 있다면 어찌나 이렇게 진정으로 ‘잔혹’할 수 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 42(5).

그래··· 지금이 아니라면 평생 아르미엘에게 사과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르미···!’

‘다음 달에 사관학교로 갈 것 같아.’

하지만 아르미엘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최소 반년 정도는 이곳에 못 올 것 같아.’

‘바, 반년?’

‘1년, 2년이 될 수도 있다고 해.’

아르미엘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년. 최소 6개월 동안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없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붙잡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내 마음이 정리 된다면 확실하게 말하고 싶었다. 최소한이라도 내 마음을 아르미엘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사과도 감사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에밀리엘. 우리 도망치자.’

‘···뭐?’

아르미엘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어딘가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을 붙잡아 달라는 것처럼.

‘···안 될까?’

‘그, 그게···! 도망치자니, 무슨 말이야?’

아르미엘이 천천히 다시 물어왔다. 도망이라는 단어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르미엘이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주방 너머의 거실에서 어머님과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해야만 했을까?

이때의 나는 ‘도망’이라는 단어가 두려움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심장이 떨려왔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도망’이라는 것 자체가 두렵게만 느껴졌다.

내 부모님은 대륙의 서부출신이었다. 아빠는 그곳의 용병단의 병사였다. 엄마는 그곳 귀족의 영애 출신이었었다. 그토록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희망찬 내일로 도피했던 엄마와 아빠였다.

아빠는 용병단에서 불법으로 이탈한 죄로 어디에서도 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었다. 엄마는 아예 가문에서 파문 되어 애초부터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었다.

결국, 세상물정 모르던 엄마는 죽을 때까지 아빠의 빚만 갚다가 병으로 죽었다. 아빠는 이름모를 누군가에게 구타당해 죽었다.

···아르미엘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너무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밀리엘··· 아직, 내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없지만 에밀리엘만큼은 절대 고생시키지 않을게. 그것만은 내 목숨을 걸고라도 약속할게.’

‘그, 그게 무슨 말이냐니까?’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로 갈 거야. 거기에서 저렴한 가격에 마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고 해. 마계는 인간이건 마족들이건 평등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 해. 그러니까···’

아르미엘의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던 아르미엘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어두웠고 당장이라도 깨질 것 만 같았다.

‘아르미엘!’

내 주제에 아르미엘을 다그쳤다. 반쯤 울먹이던 아르미엘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아르미엘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 나도 알아. 미안해, 에밀리엘.’

‘괜찮아··· 나, 나도···!’

‘잘 자. 에밀리엘.’

나는 내 진심조차 말 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아르미엘이 나를 잡아끌었다면 도망치는 것에 대해 수긍했을지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르미엘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아르미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에밀리엘인 나를 선택’하려하는 아르미엘에게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11시쯤에 에밀리엘 방으로 갈게.’

아르미엘이 작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어쩌면 이 시점이 아르미엘을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분기점이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아밀레스’. 용사이자 국왕으로서 생각하건데,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발생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아르미엘은 내게 ‘목도리’를 선물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에게 ‘도망’치자는 권유를 하지 않았다. 그 밖에 아르미엘과 함께 했던 ‘몇가지 시간’들이 반복 되지 않았었다. 후회라면 후회였다.

그렇게 아르미엘의 방이었던 내 방으로 돌아와 숨죽이고 오후 11시를 기다렸다. 아르미엘의 말은 갈팡질팡하는 것 같았지만 마계로 도망치는 걸 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마계’였다. 몇몇 마족들도 왕국에 살고 있었지만 마계에는 마왕도 있었고 이곳보다 위험하다고 배웠었다. 그런데 아르미엘이 마계를 선택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미엘은 곧 ‘기사’가 될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르겠다. 도망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아르미엘의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나는 갈대 같은 마음을 억지로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막연했었던 것 같다. 당장 아르미엘과 거리는 멀었어도 따뜻한 집과 식사가 보장 되었다. 학교도 나닐 수 있었다. 아르미엘의 부모님들은 나를 진짜 ‘딸’처럼 대해주고 있었다.

아르미엘과 가족. 이 둘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했어야 했음을··· 시간을 무수히 되돌리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11시가 되었다. 거실의 벽장 시계에서 11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가 끝나자마자 무섭게 문고리가 돌아갔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노크를 하던 아르미엘이었다. 하지만 아르미엘은 문소리조차 숨긴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에밀리엘··· 자?’

‘아니. 아직··· 응?’

아르미엘의 손이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아르미엘의 손이었다. 떨리고 있었다. 어둠속으로 보이는 아르미엘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아르미엘의 감정에 감응 된 것 같았다. 아르미엘의 얼굴이 가까워져 왔다.

나는 갑작스러운 아르미엘의 행동에 숨을 참았다.

‘에밀리엘··· 나, 나는 너를···!’

아르미엘의 입술이 보였다. 나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 감정에 아르미엘이 응답해 준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르미엘은 애초부터 나를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아르미엘은 나를 미워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르미엘은 미사엘을 좋아할 지도 모르겠다. 아르미엘의 부모님조차 노골적으로 미사엘과 아르미엘을 이어붙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아르미엘과 내 사이는 분명 멀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미사엘이 있었다.

그 관계사이의 미사엘을 빼내고 이렇게 이루어질리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싫어···!’

아르미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어둠속으로 보이는 아르미엘의 넋을 잃은 표정이 보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려웠다. 이대로 아르미엘을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웠었다. 이때까지 나는 아르미엘과 미지근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평범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빠져 있었다.

‘···미안해. 에밀리엘.’

하지만 아르미엘은 분명 나를 사랑했었다. 나 역시 아르미엘의 감정은 지금도 ‘진심’이다. 이때의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당장의 배고픔과 추위가 두려웠던 내가 빚어낸 하나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미안해. 잘 자, 에밀리엘.’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린 채, 매정하게 아르미엘을 내찼던 나였다. 아르미엘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방에서 나갔다. 그의 좁아진 뒷모습이 보였다.

아르미엘은 더 이상 내게 이유모를 ‘사과’를 하지 않았다. 남도, 가족도 아닌 관계. 은혜를 원수로 갚은 나에 대한 ‘벌’이었다. 아르미엘은 더 이상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기사가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날 때까지 내게 말을 거는 일은 없어졌다.

아르미엘의 마음조차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미사엘이 있어도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던 미래를 꿈꾸었었다. 바보 같은 나였다.

* * *

“이 부분은 다시 검토해서 제출 할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국무회의를 개최해서 동의를 얻으라고 지시해.”

“예, 알겠습니다. 국왕폐하!”

맑은 오후의 집무실. 시시각각 바뀌는 서류더미를 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왕비와의 이야기로 밤을 샜다. 분명 육체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었지만 수없이 반복시킨 시간 덕분에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육체는 몰라도 영혼은 그대로 나이를 먹는 것 같다.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정신이 흐릿해지고 눈이 따가웠다.

“국왕폐하! 미사엘 부인께서 입실 요청하셨습니다.”

“좋아. 들어오라 해.”

집무실 밖으로 노년의 비서참모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미사엘이 집무실에 직접 찾아왔다. 나를 찾아오는 일은 저녁때로 하라고 확실하게 지시했었다. 고집부리는 성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깊은 밤 평안하셨는지요? 국왕폐하.”

“···잘 잤어?”

미사엘의 진한 향수냄새가 순식간에 집무실을 채웠다. 어젯밤 미사엘이 어디에서 밤을 지냈는지 아는 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최대한 표정을 관리한다. 집무실을 관리하는 비서관이 미사엘을 위한 의자를 준비했다. 내 집무실에는 내 책상과 의자를 제외하면 어떤 가구도, 장식도 없었다.

꾸벅 고개 숙인 미사엘과 눈이 마주쳤다.

미사엘··· 과거에는 악연. 반복 된 시간 속에서는 피해자. 지금은 내 후궁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미사엘이 덧없이 미운 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악연’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목숨을 붙여준 것이었다.

“편하게 앉아 있어. 미사엘.”

“감사합니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편하게 말하라고 했잖아. 아직도 내가 불편해?”

“네? 아, 네··· 응.”

미사엘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자신을 자꾸만 방치하는 나에 대한 원망. 분노가 느껴진다. 내가 억지로 목숨을 붙여 주었다고 말해준다면 절망할 지도 모르겠다.

“오, 오늘은 에밀리엘 꽃으로 우려낸 차를 준비해 왔어. 조금 쉬, 쉬면서 일하는 게 어때?”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아, 응! 바, 바쁘면 어쩔 수 없고···.”

미사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변했다. 마치, 에밀리엘 적의 나와 미사엘의 관계를 보는 것 같다. 지금은 완벽하게 반대 입장이었다.

“하필이면 에밀리엘 꽃이라니··· 내가 그 꽃 싫어하는 거 몰랐어?”

“죄, 죄송합니다!”

미사엘이 준비해온 다과세트가 무색해졌다. 에밀리엘 꽃. 그윽한 향기가 일품이라고 하지만 이름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긍정적인 꽃말은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는 당신만을 바라보며 살게요.’였다. 이 뜻은 부정적인 단어기도 했다. 그야, 과거의 내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미사엘이 내게 지극정성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그때의 미사엘도 그렇게 행동했다면 다시 이야기의 결말은 바뀌었을 것이다. 미사엘은 그때나 지금이나 ‘외로움’에 심각할 정도로 약했다. 혼자 있는 걸 공포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이해하기는 한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아르미엘의 가슴에 쐐기를 박는 행동은 지금도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미사엘에 대한 냉대는 그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한다. 아르미엘이 미사엘 때문에 흘린 고통만큼 미사엘도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 먼 옛날. 내가 스스로 죽였을 ‘에밀리엘’의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 다음 화에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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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_ㅠ.

어제 급작스럽게 야근이 터져서 연재를 못했네요.

(도망)

용사의 과거 이야기는 앞으로 3화 정도 남았네요!

조금만 참아주시면 본래 이야기가 나옵니다(부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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