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회
[ chapter # 10 ] 맹세했던 나는 희망을 꿈꾼다.
# 54(2).
“더 빨리 이렇게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르미엘은 어떻게 생각해?”
“···당장, 베르투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나는 미사엘이 안내한 찻집으로 향했다. 미사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스산한 분위기의 몽환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창문 하나 없는 찻집의 밀폐 된 방에 앉아 있었다. 마치, 과거 이교도들의 사원을 연상하게 하는 분위기가 가득 깔려 있었다. 하지만, 미사엘은 여전히 음침한 웃음으로 나를 내려 보고 이었다.
당장이라도 이성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뚝 끊어져버린 이성의 끈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심장이 요동친 적은 처음이었다.
나를 제외하고 생각한다하더라도, 벨튼 대 공작과 국왕성과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왕과 신하의 관계였지만, 뒤에서는 용사의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문제까지 섞어서 생각하니,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뭐가 어쨌든, 시엘에게 그 손을 뻗는 다는 것 자체가 나는 용납할 수 없었다.
“흠··· 아르미엘은 옛날에도 그랬었어. 아밀레스나,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면 불같이 화를 냈었지.”
미사엘은 천천히 천장으로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그건 한참이나 어렸을 적의 이야기였다. 나는 고향사람들 입에서, 미사엘과 아밀레스의 나쁜 소문을 듣는 게 싫었다. 둘 다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이었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과 동등한 친구로 남기 위해서, 나는 곧잘 화를 내곤 했었다.
“언제였더라? 우리가 초급학생 때였을까? 왜, 마을 골목 대장하던 애 있잖아. 평소에 마을 한복판에서 나를 놀리던 그놈. 아르미엘이 그놈을 물씬 때려주던 모습이 생각나네.”
“···그 다음에는 내가 피터지게 맞았었지.”
“그래! 그래 맞아, 아직도 기억하네? 분명 아밀레스 어머님의 유서를 찢어서 그랬던가?”
“···.”
“아아. 그때가 그리워. 우리를 위해 방패가 되어 주었던 아르미엘이 그리워.”
미사엘은 내게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나는 미사엘의 ‘우리’라는 단어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사엘은 엄연히 국왕의 후궁이었다. 법적으로 부부 사이였으니, 우리라는 단어가 맞았다. 지금에야 생각하면, 나는 용사와 미사엘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내 자기만족을 위해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렸을 적의 과거를 지워나가고 있었다. 내 과거를 모두 영웅시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용사에게서, 그리고 그렇게 내쫓겨났던 내 스스로가 지웠던 과거들이었다.
“그때, 나는 아르미엘에게 푹 빠졌었던 것 같아. 아르미엘은 모르고 있었지? 그 때, 다른 길목에 내가 서 있었던 거.”
“···.”
용사는 물론이고, 미사엘까지 잊으려는 과거를 선명하게 떠오르게 했었다. 특히 미사엘은 거의 잊혀졌던, 남자였을 적의 기억마저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남자로서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니지! 지금 이런 과거 이야기에 빠져들 여유는 없었다.
“또 언제였더라? 왜, 내가 도시 남자애들한테서 놀림 받을 때···”
“미사엘.”
나는 시엘에 대한 걱정과 미사엘대한 적개심을 억누르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대로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다.
“푸···푸하하핫!”
“왜, 웃으시는 겁니까?”
갑자기 미사엘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린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니! 그게 웃기잖아. 아르미엘! 방금 네 모습, 평생간직하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던 거 알아?”
“무슨 막말을···! 크윽!”
내가 귀엽다고? 미사엘의 조롱하는 것 같은 말투에, 도무지 분노를 감추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분노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미사엘이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내 앞에서 남자였었던 표정으로 지껄이지 마. 특히, 화를 마지못해 참는 모습. 나는 그런 네 모습이 죽을 만큼 싫었어.”
“···.”
“하하핫! 그래, 그 표정이야! 그 표정으로 내 말에 호응해줘.”
미사엘의 눈동자에 빛이 없었다. 미사엘은 내가 기억하던 미사엘이 아니었다. 만취해 있을 때조차, 맨 정신의 지금조차 미사엘의 이성은 옛날에 끊어져 있는 것 같았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빨리 들어와.”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미사엘이 얌전한 표정으로 바꾸었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미사엘에게서 시선을 고정했다.
“안녕하십니까, 천체의 항성만큼이나 아름다우신 주인님. 오늘 주인님의 밤을 담당하게 된, 매직스틱이라고 합니다.”
방문을 열고,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순간 숨을 참았다. 기분 나쁜 땀 냄새와 향수냄새, 그리고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거기에다가 앞치마에 속옷만 두른 차림새였다. 간판만 찻집이었지, 사실은 술과 남자를 파는 가게인 것 같았다.
“천천히 즐겨주십시오.”
그는 준비해온 과일들과 값비싸 보이는 과자들을 테이블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향긋한 커피나, 홍차대신 크리스탈로 장식 된 짙은 갈색의 술병이 얼음통과 함께 올라왔다. 그는 얼음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보른 듯이, 미사엘의 옆에 딱 달라붙은 모습이 당장이라도 구토 감을 일으킬 정도였다.
“전 필요 없어요.”
그는 내게도 가까이 붙어왔다. 하지만 손가락 한 마디 만큼이라도 접근해오면, 당장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손을 내밀어 거부했다.
“어머! 너 머리 바꾼 거야? 딱, 내 스타일이야. 눈이 즐거워.”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당신의 눈동자에 즐거움을 드렸다니, 오늘 밤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아, 황홀해···! 벌서 천국을 구경하고 온 것 같아!”
나는 역겨운 장면에 눈을 돌려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지금 장면을 안 본 눈이 있다면 전 재산을 들여서라도 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미사엘은 접객 남의 신체를 주무르고 있었다. 어디에서 굴러먹던 용병이었던 걸까? 아니면, 과거 기사단이었던 걸까? 그의 몸에는 검이 남긴 흉터들이 곳곳에 보였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저희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인님. 앞에 계신 수평선의 황혼 같은 여성은 친구신가요?”
“응, 고향 소꿉친구야. 나랑 결혼까지 약속했었던!”
“아아··· 결혼?”
“아니야!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그럼, 친구 분께는 어떤 노예들로 준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음··· 고마운데, 지금은 여기까지만 즐길게. 한 10분 정도에 다시 와주겠니?”
“알겠습니다.”
미사엘은 금화 하나를 접객 남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그는 앞치마 사이로 동전을 숨기며,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와중에도 미사엘은 남자에게서 손을 뗄 생각을 안했다.
“···역겨워.”
반라 상태의 접객남이 모습을 감추자, 나는 침을 뱉든 역겹다는 단어를 내뱉었다. 미사엘은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고는 빙긋 입 꼬리를 올렸다.
“이런 걸로 내 약점을 잡을 생각이라면, 당장 그만 둬.”
“약점? 아르미엘은 이런 곳 싫어해? 아아, 방금 온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헛소리 그만 해. 네가 이런 가게에서 무슨 짓을 하던 상관하지 않겠어. 당장, 시엘에 대한 거나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어.”
“후후후··· 상관? 뭐, 아르미엘 주제에 내게 무슨 상관을 했었다고. 그래, 좋아. 네 약혼자에 대한 건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
미사엘은 술을 삼키며 조소를 내뱉었다. 나는 테이블을 내려치려던 주먹을 다시 내렸다. 여기에서 분노를 표출해 봤자, 잘못하면 내 약점만 잡히는 꼴이 됐다.
“아까 방금 들어온 아이는 어때? 여기에서 제일 잘나가는 아이야. 예전에 잘나가던 기사였는데, 어쩌다가 쫓겨나서 여기에서 일하게 됐데. 아아, 걱정하지마. 저 아이는 이제 귀족이 아니야. 가문에서 파문당했거든. 그러니까 부담가지지 않아도 괜찮아. 오히려, 좋아할걸?”
“···.”
“팁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나, 여기 최고 우등회원이거든! 아르미엘, 마음에 안 드는 거야? 흐음··· 그래! 아르미엘은 더 어린 아이들이 취향이지? 그렇지?”
미사엘은 사람에 대해 음식 메뉴를 강평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나마 내게 남아있었던, 미사엘에 대한 순수했던 모습이 박살나는 것만 같았다. 이제, 분노보다는 연민, 동정··· 왠지 미사엘이 불쌍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나는 미사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물론, 시엘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야만 했었다.
“어느 아이가 좋을까? 아르미엘을 만족시켜줄만한 아이가 있을까?”
“그만해, 미사엘. 시엘··· 시엘은 어떻게 된 거지?”
“아르미엘, 기다려 주지 않을래? 지금 나랑 단둘이 시간을 가지기로 했잖아.”
“이만 돌아가겠어.”
나는 너스레를 떠는 미사엘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애초에 시간을 허비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미사엘에게서 대화할 가치를 느낄 수 없었다. 시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베르투아로 돌아가야만 했다.
“열차는 내일 오후에나 있어. 아르미엘이 베르투아에 도착하고 났을 때면, 시엘은 집에 없을 거야. 물론, 벨튼 할배네 저택에도 말이야.”
“···미사엘!!”
“귀 따가워, 아르미엘. 분위기 파악 못하겠어? 여전히 둔감하구나? 시엘이 얼마나 힘들어 할지 대충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네.”
“베르투아로 ···돌아간다. 내가 도착했을 때, 시엘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국왕성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겠어.”
“불바다? 불사조의 검도 없는 네가? 해보고 싶으면 해봐. 그렇게 되면, 시엘은 벌써 집에 없을 거고, 아르미엘은 뭐···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오른쪽 팔찌가 손가락의 힘까지 빼앗아가고 있었다. 미사엘은 여전히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지금 문을 열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거야. 자, 아르미엘. 가만히 나와 이야기 하는 게 어때? 나는 아르미엘을 도와주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우리 친구잖아?”
나는 문고리를 잡았던 손에 힘을 뺐다.
“후후훗! 그래, 아르미엘. 다시 자리에 앉아. 네가 좋든 싫든 시엘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줄 거니까.”
“시엘··· 시엘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용서하지 않겠어.”
“용서? 용서는 아르미엘이 내게 해줬으면 하지만··· 뭐, 지나간 일이니까 이쯤에서 덮어두자. 나도 잘한 건 없으니까.”
“···.”
“네 약혼자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둬. 아르미엘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미사엘은 술잔을 한 번에 비워버렸다. 술에 녹아내린 커다란 얼음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미사엘은 빈 술잔을 내게 내밀었다.
“혼자 따라 드시지요. 미사엘 부인.”
“싫어. 나는 누가 따라주는 술이 아니면 마시지 않아. 아르미엘, 내게 모욕을 줄 생각이야?”
미사엘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런 독한 술은 몸에 안 좋아.”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생수병을 미사엘의 컵에 부어주었다. 그녀는 벌써 술에 취했는지, 내 행동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표정을 바꾸었다.
“시엘은··· 네 약혼자는 네가 남자였다는 거 알고 있어?”
미사엘은 피식 입 꼬리를 쪼갰다.
“나랑 약혼했다가 깨졌다는 것도···? 지금 국왕폐하. 아니, 아밀레스하고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도? 그리고 아르미엘이 불사조의 기사였다는 거··· 시엘은 알고 있어?”
< 다음 화에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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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