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무 외롭고 쓸쓸했던 나는 마왕의 신부가 되버렸다-185화 (185/246)

185회

[ chapter # 13 ] 너와 내가 연주하는 작은 소음과 화음

푸른 불꽃에 절명하는 굉음이 내 귀를 찔렀다.

푸른 불꽃이 타들어가는 경광이 만화경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몰아치는 파도같은 화재의 중심에 선 여기사는 투구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저 붉고 푸르게 타오르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그녀가 여기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매캐하게 올라오는 연기가 호흡을 괴롭게 했다.

하지만, 불꽃을 두른 여기사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족쇄라도 걸린 것 같은 발목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그마한 마력구슬이 여기사의 투구를 때렸다. 투구가 깨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자그마한 그리움을 느끼면서, 수증기가 되어 흐르는 여기사의 울음을 올려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지켜주었던 인간 기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밖에 남지 않은 마력으로 결계를 만들었다.

그가 남긴 흔적을 조금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여기사의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여기사는 고개를 나를 향했다. 나는 인간 기사가 준 휘장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도망쳐. 더 이상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의 검을 쫓아 움직였다.

# 62(1).

“오오! 그래. 시엘. 금방 내려가마. 마리아, 이따가 보자꾸나.”

벨튼 부인은 시엘의 안내를 따라 움직였다. 잠시 시엘이 내게서 시선을 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왜지? 어째서? 나는 시엘을 뒤쫓아 추궁하고 싶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 자리에서 시엘을 추궁해봐야 천박한 시비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이성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의 시엘은 벨튼 가문의 집사장으로서, 벨튼 조선소의 간부로서 이 배에 승선한 것이었다.

“선장 씨? 무슨 일 있어? 왜,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

“마리아가··· 잘못해써?”

“귀여운 척 하지 마. 고용하기로 얘기한 이상 철저하게 부려 먹어 주겠어.”

“흐익!”

마리아가 지레 겁먹으며 내게서 살짝 떨어졌다.

“미안. 선장 씨. 내가 괜히 얘기해서 삐진 거 아니지? 그,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고. 오늘은 특별 서비스로 일해 줄 테니까! 대, 대신 무르기 없기다?”

“···침실하고 매끼니 식사 지원. 일단 그걸로 만족해.”

“으응! 고마워, 선장 씨!”

마리아가 소매를 걷어 붙이며, 함교 탑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달려갔다.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린 채, 시엘이 내려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판에 남아있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제일 넓은 공간인 선원 식당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입안에 퍼지는 씁쓸한 맛을 지우기 힘들었다. 차라리, 내게 뭐라도 얘기해주었다면 속이 편할 텐데. 공무적인 자리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괜스레, 마음만 더 복잡해져 버렸다.

“그런데, 선장 씨. 선장 씨는 높으신 분들한테 인사 안 해도 되는 거야?”

“필요 없어. 내가 애지중지 관리했어도, 이 배는 내 배가 아니야. 월급 받고 관리해주는 그런 사람일 뿐이야.”

“호옹~ 그렇구나. 어쨌든 선장이라는 직함이 낮은 거는 아니잖아? 선장 씨, 선장 씨, 나 담배 피워도 돼?”

“저기 갑판으로 나가서 피워. 재하고 꽁초는 깨끗하게 처리하면 상관없어.”

“응응!”

마리아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현측 외부 갑판으로 달려 나갔다. 일단 얼버무리기 위해 일을 시켜준다고 했지만, 딱히 무엇을 시켜야 할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매캐한 담배향을 따라 선교 탑의 외부 갑판으로 나갔다.

“마리아.”

“응, 선장 씨?”

“뱃일을 했다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밤일?”

“아니, 그거 말고.”

“후훗, 난 또 뭐라고~? 남자한테 차인 것 같은 표정이여서, 내 몸이 필요한 줄 알았지. 아아, 걱정하지마. 나는 남녀 안 가리···읍!”

나는 마리아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마리아는 화들짝 놀라 내게서 떨어졌다.

“저, 정말! 농담이라고. 그러다가 담뱃불에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됐어. 내 앞에서 음담패설은 금지. 이것도 고용조건이야.”

“왜 그래? 설마, 당신 처··· 꺄아아악! 죄송합니다. 그만 할게요!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내가 꽉 움켜 쥔 주먹을 올려들자, 마리아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이봐,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이래보여도 내게는···. 시엘이.

“하아··· 다시 한 번 물을게.”

“넵! 저는 도선과 항해가 전문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위제르아 제독으로서, 순수하게 아버지의 기술을 이어받은 장녀입니다!”

“위제르아 제독? 마계에서 그···.”

“서, 선장 씨! 우리 아버지를 알아?!”

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마리아는 담배를 급하게 깊게 들이마시고는 바다에 꽁초를 내던졌다. 걸리면 벌금인데··· 어쨌든, 마리아는 놀란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해군··· 기사단 시절에 들어봤던 이름이야.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 그렇구나! 우리 아빠 유명하긴 했었어. 아하하핫.”

자세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위제르아 제독의 딸이라니. 내가 봤던 위제르아 사령관과 마리아의 인상은 전혀 달랐다. 위제르아 제독은 마계의 막강한 해군력을 붕괴시킨 주역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마계 쪽에서는 급진파 정도로 알고 있었다. 용사의 침공과 함께 마왕에게 배신한 제독이기도 했었다. 그 덕분에 원정대가 비교적 큰 손실없이 마계 본진에 입성할 수 있었던 큰 공로자였다.

그 다음에는 용사가··· 그를 처분했었다··· 배신자는 또 배신할 수 있다면서. 내 손으로 직접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마계 육상에 상륙한 용사를 환영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와 동시에 용사는 나에게 처분 명령을 내렸었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였다.

“···어, 어쨌든 그 유명한 아버지에게 모든 능력을 전수 받았다는 말씀이지! 어때? 조금은 신뢰가 가지?”

“그러면 당장 이 배를 움직일 수 있겠어?”

“물론이지! 하지만···.”

마리아가 자신있다는 표정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바꾸었다. 자신이 도선(배를 부두에 정박시키는 항해술)과 항해가 전문이라고 단언했으니, 최소한 나보다 뛰어날 것이다. 선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내 입장에서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배의 성과를 보여주어야만 했었다. 마리아는 이곳 항구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장 씨가 선장이야. 나는 조언만 해줄 뿐이야. 이 배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당신이잖아. 조타는 내가 직접 할게. 고용주가 사용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큼 배의 위상이 죽는 것이 없지.”

“···그, 그렇군.”

“이 배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배야. 당신 같은 주인을 만나서 뒤늦게 사랑을 듬뿍 받았어. 그 사랑을 가로채는 건 밥버러지들도 하지 않는 짓이라고. 일단, 날 믿어 봐. 놀라서 뿅 가게 해줄게.”

“뿅 가기는 뭘 가, 인마.”

“헤헷. 어쨌든 믿고 맡겨봐. 오늘은 처음이니까 내가 상냥하게 조언해 줄게.”

“···.피곤해. 일단, 출항준비부터 하자.”

“오우! 좋아! 출항준비 수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게 혀를 비죽 내밀며, 총총걸음으로 선교 탑으로 들어갔다. 마리아에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지만, 해맑은 미소가 묘하게 신뢰가 갔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그 웃음이 자그마했을 적의 시엘을 닮아서 그런 것 같았다.

“아아··· 방송장치 시험 중. 방송장치 시험 중. 전 갑판 잘 들리시나요?”

“뱃머리 갑판 잘 들려요~”

“예예! 꼬리갑판도 잘 들립니다.”

신났네. 마리아는 방송장치의 마이크를 붙잡고 있었다. 어차피 기사단도 아니었으니, 내가 뭐라고 지적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님들도 승선한 상태여서 그런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마리아 항해사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오, 그 유명한 마리아 아니신가?”

“좋은데 취직해서 다행이구려.”

“헤헷! 잘 부탁드립니다! 배가 너무 좋아서, 폭주할 수도 있으니까 잔뜩 긴장해 주세요!”

“또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네. 여튼, 잘 부탁드립니다.”

“벨튼 조선소 시운전 팀을 믿어보셔요.”

방송장치를 타고, 뱃머리 갑판과 꼬리갑판에서 갑판장들의 목소리가 오고 갔다. 꽤나 친분이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나한테는 딱딱하게 굴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내가 갑판 작업으로 지시할 때면, 격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던 사람들었다. 근데, 마리아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유순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후후훗, 놀랐어? 저 사람들 말 참 안 듣지? 걱정하지마, 선장 씨. 저 사람들은 나한테만큼은 말 잘 들으니까.”

“약점··· 같은 거 잡고 있는 거 아니지?”

“비밀이야!”

마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내가 항해일지를 점검하는 사이, 마리아는 선교 탑 내부의 조타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마력기관이 두 대라니. 엄청 호화스러운 배구나. 군함으로 써도 손색없겠어.”

“나중에 항해할 때, 마력기관은 웬만하면 안 쓸 거야.”

“왜? 비싸서?”

당연히 비싸지. 나는 마리아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가득 충전해 두면 저속으로 항해했을 때,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충전비용이 문제였다. 본사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돛대가 있는데, 왜 그런 기관을 사용 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지금은 출항이나 입항 할때가 아니면 웬만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가격은 걱정하지 말고, 우리 팍팍 쓰자. 내가 충전해 주면 되잖아.”

“뭐? 여기에 들어가는 마력이 얼만지 알고 그래? 나는 여기서 네 시체를 뒷수습하고 싶지 않아.”

“에이, 그런 무서운 소리하지 말고. 말했잖아. 여기에 내 동료들도 있다고. 우리 한명이 마력을 최대로 짜내면 하루 반나절은 충전할 수 있겠는데? 아, 물론 식사와 휴식이 넉넉하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마력 발전소에서 돈 주고 사오는 게 편하겠다.”

“그건 별로··· 좋지 않아.”

마리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뜨끔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마력은 마족들이 생산한 것들이었다. 물론, 고임금이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마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엘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단칸방에서 생활할 때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고 사용했었다. 벨튼 부인의 집으로 이사한 뒤부터는 시엘이 꾸준히 자신의 마력을 충전하고 있었다.

“형제, 자매님들 감사하게 사용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빙긋 웃었다. 나는 마력 기관의 시동을 걸었다. 각종 계측기에 마력이 들어갔다. 조타기와 마력탐지기도 종소리를 울리며, 작동 준비를 알려주었다.

“벌써 출항시간이네. 자자, 선장 씨.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마리아는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어 올렸다. 자신이 당당하게 마족이라는 것을 알리려는지,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마리아를 따라 우현의 현측 외부 갑판으로 나갔다. 마리아는 외부 현측 갑판의 조타기를 움켜쥐었다. 돛대 조종 장치까지 점검한 마리아는 까치발로 다른 구조물에 발을 올렸다. 키가 작은 탓에 조종 장치 앞에서는 외부 갑판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출항과 동시에 환경사랑 91호는 평탄하게 항구를 빠져나갔다. 출항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항해 역시, 내가 무리에서 조종하지만 않는다면, 부둣가나 암초에 배를 부딪치는 일도 없었다. 마리아는 묵묵하게 조타기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확실하게 조타실에 두 명이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편리했다. 마리아는 타기와 돛대를 움직이는 것이 무척이나 능숙했다. 나는 앞만 보고 위험물들을 식별 할 수 있었다. 기관이며, 돛대, 조타기와 마력 탐지기까지 혼자 작동하는 것은 확실하게 무리가 있었다.

마리아가 배를 조종하면, 나는 방향 지시와 마력탐지만 관찰하고 있으면 됐다.

내가 방향을 지시하면, 마리아는 깔끔하게 배를 변침시켰다. 기사단에서 배를 몰았던 내 입장에선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마력기관에 시동이 걸려 있었지만, 마력기관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권고할게요. 마력기관으로 10번만 물차기 부탁드려요.”

“좋아. 기관 앞으로 열. 하나 둘, 셋, 넷···. 기관정지 끝.”

“고마워요!”

근근이 마리아가 마력기관 사용을 요청하고 있었다. 아마 바람이 멈추어서 속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럴 때는 존칭을 사용해주는구나. 나는 망원경으로 항구 밖을 움직이는 어선을 관찰했다. 어선들은 언제 어디로 움직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험했다. 배는 말이나 마차와는 달랐다. 충돌할 것 같다고 생각되면 백이면 백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야지.

“선장님.”

“···네.”

무겁게 깔린 미성이 노크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정장의 시엘이 조타실 입구에 서 있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다시 앞을 살폈다. 그것도 부족해서 망원경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세요, 집사장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시엘. 시엘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나는 공적인 자리답게 시엘에게는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아도 있었다. 복받치는 내 감정을 신성한 선교 탑에서 쏟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엘이 내 뒤에 바짝 섰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아르미엘 누나···.”

“여기에서는 선장 직책입니다. 말을 가려서 해주세요.”

들릴 듯 말 듯 한 시엘의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단칼에 잘라내 버렸다. 시엘의 공손한 손이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움직였다. 나는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기로 마음 먹은 상태였다. 그것도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리아가 있었다. 당장 오늘 고용한 마리아 앞에서 쓸데없는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네. 죄송합니다.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아요. 무슨 용건으로 오셨나요?”

“배에 따로 사무장이 없어서, 부득이하게 저희 쪽에서 다과를 준비해서 내었습니다. 참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이게 무슨 여객선도 아니고. 사무장을 왜 찾아? 아마, 높으신 분들이 부릴만한 사람들이라면 시엘과 요나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시엘이 먼저 자처해서 다과를 준비했을 지도 모르겠다. 높이신 분들이 모인만큼 사실상 의전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 배에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준비하지 않았었다. 당장 본사 직원들이나 길드 직원들이 내게 홍차와 과자를 준비하라며 성을 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시엘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모양인 것 같았다.

“다른 분들이 다른 말씀은 안 하시던가요?”

“네.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대게 배에 대한 칭찬과 감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걸로 내 마음을 추스르기에는 힘들었다. 시엘이 자처해서 행동한 것일 뿐. 내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아까, 우리 배에 대해서 설명하던 것 같던데, 그건 왜 하신 건가요? 필요하면 저를 불러 주었으면 좋을 텐데. 벨튼 조선소에서 왜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하기 힘들던데요.”

아아. 이건 그냥 심술이다. 내가 아는 시엘이라면, 하다못해 고개를 숙이고 쩔쩔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엘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나를 향해서 미안해하는 기색도, 평소의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없었다. 철저하게 냉철하고 기계적인 눈빛이었다.

시엘과 공과 사를 나눈 것은 내가 아니라 시엘이 먼저 시작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엘의 이런 태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벨튼 조선소 쪽에서도 거액으로 투자한 선박입니다. 관련해서 사업도 추진 중에 있습니다. 아이작 환경 쪽에서도 관련 사업의 위험성으로 인하여 저희 조선소 사업으로 이양하고 있습니다. 모르셨나요?”

“뭐?! 나는 그런 얘기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나는 다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추진한 사업이니까요.”

“···?”

“모쪼록 본 조선소 사업진행에 지금 같은 열정으로 근무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쯤, 관련해서 본 조선소에서 회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다음에 담당자들 통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환경사랑 91호가 벨튼 조선소로 넘어갔다는 건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사업이 아이작 환경에서 벨튼 조선소로 넘어갔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배가 넘어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아이작 환경의 직원이었다. 벨튼 조선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살짝 시엘이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왜? 왜, 내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지? 하다못해 조금은 해명하려는 태도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공과 사를 구분하겠다고는 했지만, 시엘이 냉철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시엘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벨튼 공작님께서 이곳을 시찰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문제는 없어요. 단, 10분 후에 다시 항구로 입항 작업 할 거예요. 위험한 작업이니까, 방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네, 잘 알겠습니다.”

시엘은 내게 꾸벅 목례를 하고는 조타실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엘이 내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냉철하게 자기 할 말만 하리라고는 생각할 줄 몰랐다.

“자자, 선장 씨. 침착해.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바람을 읽어줘. 바람이 상당히 온순해. 절대 무리해서 배를 움직이면 안 돼.”

“···알고 있어.”

온순한 바닷바람을 타고 돛대가 끼릭끼릭 움직였다. 마리아는 능숙한 솜씨로 배를 고요하게 부둣가로 몰아섰다. 입항하는 순간은 무척이나 위험했지만, 동시에 가장 지루한 시간이기도 했었다. 배는 정지하기 위한 장치가 없었다. 점점 줄어드는 미속만을 가지고 배를 움직여야만 했었다. 한참이나 남은 부두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까. 벨튼 가문의 집사장 맞지?”

“맞아.”

마리아가 조타기를 움직이며 물었다. 나는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마리아는 낮은 목소리로 숨을 내뱉었다.

“장악의 시엘···. 그런 무서운 동족하고 만나다니. 으으, 오싹해.”

“장악의 시엘은 또 뭐야?”

“아니, 선장 씨. 그 유명한 장악의 시엘을 모른단 말이야?!”

장악의 시엘이라니. 웃기지도 않은 별명이 시엘에게 붙어 있었다. 마리아는 갑작스레 기겁하며 나를 놀란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장악의 시엘이라니. 그런 웃기지도 않은 별명은 어디에서 나왔데?”

“아니아니! 아까, 그 사람 장악의 시엘이잖아! 벨튼 가문의 실세를 모른단 말이야?”

“실세라니? 그냥 평범한 집사잖아. 벨튼 가문의 실세는 제르바엘인가 하는 사람 아니야?”

“정말로 답답한 선장님이네! 제르바엘 예비공작님은 전 실세였고, 지금있는 시엘 집사장하고는 완전히 다르다고! 소문에 의하면, 베르투아 일대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왕도의 귀족들하고도 친분이 있다고 하나봐! 단순히 시동아이로 들어와서, 그 짧은 시간에 그 위치에 오른 마족이라니까?”

마리아는 마치 유명인을 자랑하는 것처럼 말했다. 시엘이 그렇게 유명했던가? 조선소 직원들한테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시엘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아니지··· 방금 같은 태도라면 조금은 납득이 갔다. 더욱 복잡한 것은 벨튼 가문의 실세라는 것. 그 부분이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

“으으! 그 살인적인 눈빛.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역경을 거쳐야 그런 표정이 만들어지는 걸까? 아차! 분명, 선장 씨를 ‘누나’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내가 잘 못 들은 거 맞지?”

“잘 못 들은 거겠지.”

나는 쌀쌀해지기 시작한 바다바람을 후하고 내뱉었다. 그래, 침착하게. 깔끔하게 배를 입항시켜서, 시엘에게 내 실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감정을 털어 놓기로 했다. 시엘이라면, 내가 무섭게 말한 것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해주겠지.

분명, 어젯밤 시엘이 외박을 한 것도 일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시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누가 시엘을 신뢰하라는 것일까? 의심은 의심을 낳고, 곧 불화로 이어질 것이다. 연상 된 사람으로서,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일 것이다.

“쿡쿡쿡! 그렇지? 뜬금없이 그 표독한 사람이 선장 씨랑 결혼할 리가 없잖아. 있지, 있지! 그 반반한 집사장 옆에 요나엘이라는 여자가 있거든? 그 사람이 약혼녀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부모 잘 만나서 부럽네. 누구와는 다르게 복 받았지. 꺄아-!”

···빠득하고,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다음 화에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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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렇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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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글 쓰는 기계가 되고 싶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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