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회
[ chapter # 13 ] 너와 내가 연주하는 작은 소음과 화음 # 62(5).
몽롱한 시선을 움직였다. 저항할 의지조차 잃은 손이었다. 마리아는 여전히 나를 깔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아마 내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미련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이 끈을 놓아버린 다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들이 내 탓, 내 죄가 되어 나를 욕할 것만 같았다.
“선장님! 선장님! 계십니까?”
“으으으··· 마, 마리아. 그만!”
“선장님! 손님께서 부두에 내려와 계십니다. 선장님!”
무거운 종소리가 부둣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항구를 경비하는 경비대원들의 호출 벨이었다. 이 야밤에 누가 나를 찾아온 다는 말인가?
“쳇! 누구야? 선장 씨, 내가 나가 볼게. 얌전히 있어.”
마리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호출 벨은 나를 지목하고 있었다. 어쩌면 벨튼 부인일지 몰랐다. 내가 시엘에게 손찌검까지 한 상태였다. 아마 내 죄를 추궁하려는 것일 지도 몰랐다. 나는 이를 쌔게 깨물었다.
“마리아···! 비켜줘. 내가 나가야 돼.”
“어라라? 잠깐만, 선장 씨. 안 돼! 지금 술기운이 잔뜩···!”
“비켜봐. 날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이건 더 중요한 문제이야.”
나는 마리아를 옆으로 밀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마리아의 기습적인 공격에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지만, 전장에 있을 때는 이보다 더 한 것에 취한 적도 있었다. 이 정도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다. 졸음이 천근만근 덮쳐오는 것 같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차라리, 이런 험한 몰 꼴을 벨튼 부인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벨튼 부인이나 요나엘에게 화살을 돌리고 싶은 것일 지도 몰랐다. 시엘은 요나엘과 외도를 한 것이고, 벨튼 부인은 잔혹하게 그들의 그런 행동을 묵인했다.
나는 내 행위에 대한 정당성과 항변을 찾고 있었다.
나는 마리아를 침대에 던져 둔 채, 비틀거리며 갑판으로 향했다.
“윽···!”
술기운을 억지로 떨쳐냈더니, 끔찍한 두통이 옆머리를 강타했다. 나는 격벽을 더듬더듬 집으며, 깜깜한 부둣가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뿌옇게 변해서 누가 와 있는 지도 분간이 가질 않았다.
“아르미엘!”
귀의 이명소리가 부둣가에서 들려온 소리조차 일그러뜨렸다. 누군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젠장, 마리아 녀석. 술이 깨면 반드시 보복하리라 다짐했다. 벨튼 부인인 걸까? 아니면, 내 행동의 악의를 품은 요나엘인 것일까?
“바래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비관님!”
“아, 아니에요. 일단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집사장님.”
“감사합니다!”
배와 부두를 잇는 수직 계단이 탕탕 울렸다. 멍청하게 신발도 안신을 걸까? 철과 신발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급히 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거친 숨소리가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아아, 빌어먹을! 귀에 울리는 이명소리 때문에 머리가 진짜로 깨질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회전했다.
“아르미엘! 괜찮아요?”
그새 비틀거리며 쓰러진 걸까? 몸이 허공에 정지한 것만 같았다. 뿌옇게 변한 시야 속으로 힘겹게 구분이 가길 시작했다.
“시엘···?”
“응! 누나, 저에요. 저!”
“저! ···라고 크게 말하지 말아줘.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멍청하게 신발도 안 신고 온 걸까? 울렁거리는 시야 속에는 피투성이가 된 시엘의 발이 보였다. 얼굴은 밤에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시엘의 이마에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왜 온 거야···?”
“아르미엘 누나는 정, 정말 빨라서 겨우··· 쫓아 왔어요!”
코끝에 시엘의 땀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그렇지. 시엘. 이 녀석은 정말 바보 중에 바보였다. 생각을 해보니까 시엘 용돈 떨어 질 때 다 됐지. 어제인가, 오늘인가가 시엘에게 용돈을 주는 날이었다. 어제가 내 월급날이기도 했었고. 아무래도 내가 재빨리 마차를 잡는 사이. 시엘은 마차를 잡을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아니면, 마차 값을 낼 돈도 다 떨어졌거나.
그렇구나. 날 쫓아오기는 했었구나···.
“바보 같아. 여기까지 뛰어 온 거야?”
“누, 누가 바보라는 거예요!”
“너, 말이야. 너. 무식하게 여기까지 뛰어오다니, 벨튼 가문의 집사장인지 뭔지 정말 맞는 거야? 그리고! 요나엘이 그렇게 하는 데도 가만히 있어?”
“그렇다고 요나엘도 여자애인데 내칠 수는 없잖아요···.”
“너는 인마, 어?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다정하게 구는 거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 바보같이 보여도, 냉혹의 시엘! 장악의 시엘이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녀석이 됐다니까요!”
“풉···푸하핫! 그런 바보 같은 별명은 어디서 만든 거야?”
시엘이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술기운에 깔깔 웃었다. 시엘이 겨우 내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몸을 가누기는 쉽지 않았다. 집에서 시엘에게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주먹까지 내던졌던 나였다. 그런데, 술에 취해 그런 시엘에게 지탱하고 있다니 연상자로서는 역시 실격이었다.
“그, 그야 바보 같아도. 이렇게 하면 여자애들이 무서워 할 거 같아서 그랬어요. 저, 제가 바보인거 알아서. 맹하게 있으면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특히, 누나 빼고 여자애들이 바보 취급하는 건 죽어도 싫어요!”
“바보? 하하핫! 그렇지. 시엘은 역시 바보야.”
나는 시엘의 어깨를 철썩철썩 때리며 말했다. 하지만, 금세 중심을 못 잡고 시엘의 가슴에 픽 쓰러져 버렸다.
“미안해요. 아르미엘··· 누나. 누나를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
시엘이 무거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남자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방금 요나엘이랑 싸우고 왔어요. 벨튼 부인한테 혼날 정도로요. 여자애한테 그렇게 말한 거는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아르미엘 누나. 저··· 변명이라도 할 기회를 주면 안 될 까요?”
술기운 때문에 언성이 높아지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요나엘과 말다툼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느 정도였을 지는 감이 오질 않았다. 요나엘이 빽빽 우기고, 시엘이 수긍만 하다가 요나엘을 울리는 것으로 마무리 되지는 않았을까?
“그래, 해 봐. 얼마든지··· 지금은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요. 아르미엘 누나···”
“정말로··· 단언컨대, 누나와 함께 맹세한 것에 대해서 한 점 부끄러운 짓은 한 적이 없어요. 제가 실수한 것이 하나 있다면, 요나엘에게만큼은 다정하게 대했다는 것 정도··· 같이 일하는 사이였으니까, 합리적인 업무를 위해서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어제,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같이 일하는 동생을 누나한테 보냈었어요. 그런데, 요나엘이 제가 보낸 사람을 방해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갑자기 저한테 입맞춤을 시도했던 것도 사고로 치부해 버렸어요. 그냥··· 기분이 들떠서 그런가보다 생각해 버렸어요. 하, 하지만 정말로 입을 맞추지는 않았어요! 정말, 열심히 회피했어요! 그래서 어젯밤에도 요나엘한테 싫은 소리 들었어요.”
“그렇구나···”
나는 넌지시 말했다. 시엘은 어린아이처럼 변명을 늘어두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푹 숙이고 겁을 먹던 녀석이었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내가 듣지 않을까봐 잔뜩 걱정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시엘을 애걸복걸하게 만들면 시엘의 자존심마저 꺾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극도로 예민했던 내 기분 탓일지 몰랐다. 아무래도 진짜 바보는 나일 것이다. 그 자리에서 시엘의 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시엘에게 화낼 거리는 애타게 찾던 내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구차한 변명 같은 내 질투심 때문일 것이다.
“방금 전에는 요나엘하고 절교까지 해버렸어요. 역시, 이성간의 친구는 힘든 것 같아요. 근데, 누나와의 관계와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시엘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정말···! 누나를 위해서라면 다 잃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아까같은 말씀은 절대 하지 말아주세요. 누나가 저를 미워하신다 하더라도, 저는 절대 누나를 미워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국면. 어딘가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렇구나. 그래. 아무래도 용사에게 구차하게 빌붙던 내 모습이 기억났다. 그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던 나였다. 사소한 것조차 그와 관련 되어 있다면 집착했던 나였다. 그가 내 세상이었고, 내 전부였었다.
어쩌면 시엘의 전부는 나고, 시엘의 세계는 내가 전부일 지도 몰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시엘에게 무책임하게 내 일방적인 감정과 폭언을 쏟아 냈을 뿐이었다. 반대로, 지금의 나는 시엘이 전부였고, 내 세상이었으니까.
사소한 것에 시엘을 잃을까 두려웠던 나는 시엘에게 모진 말을 내던진 것이었다. 내가 당하기 전에 싹을 잘라내자는 막연한 자기방어 심 때문이었다.
“저기, 시엘. 누나가 조금 취해서 그런데··· 하나만 물어 봐도 돼?”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시엘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날 버릴 거야?”
“누가 버려요! 누나가 저를 내버려주지 마세요. 아르미엘이 없으면 전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르니까···!”
시엘의 목소리가 바닷가에 울려 퍼졌다. 그렇구나. 나는 마지못해 체중을 시엘에게 실어버렸다. 사과해야하는데,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스르륵, 아예 눈이 감겨버렸다. 바짓단을 걷어 올린 시엘의 맨 발이 보였다. 상처투성이였다. 제대로 걸을 수는 있는 걸까?
“시엘··· 미안.”
나는 입만 우물거리면서 잠들어버렸다.
* * *
내가 시계를 확인했었던 것은 오후의 절반이 지나가 있을 때였다. 아득한 꿈을 꾼 것 같지만, 기분 나쁠 정도로 몸이 상쾌했다. 현창 밖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고서야 뒤늦게 한숨이 나왔다.
나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어제 있었던 일을 더듬어 보았다. 돌아오지 않는 시엘 때문에 하루종일 밤을 새고, 마리아를 고용하고, 벨튼 저택의 사람들이 우르르 배에 승선하고··· 그 다음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시엘하고 대판 싸웠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더라? 마리아의 기습에 독한 술에 취해 비틀거렸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어 보았다.
분명한 것은 절대 해프닝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협조하기로 했던 업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차피 오늘은 시운전 계획은 없었다. 협조라고 해봐야, 부두 사용료에 관련한 이야기뿐이었다. 오늘은 여유가 있는 만큼 선원들을 고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보니 그것도 물 건너 간 이야기였다.
망했군. 언제까지나 마리아 한명으로 배를 꾸려 나갈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배는 좁았기 때문에 어영부영 몸을 씻고, 얼굴을 단정하게 했다. 선장실의 테이블은 말끔하게 정리 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꽁초를 꼽아두던 재떨이도 말끔하게 정리 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실내에 풍기던 먼지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굳게 잠겨있는 선장실의 문을 열었다.
“여기, 마리아가 광을 낸 건가?”
나는 선장 실 벽면의 구리로 만든 장신구를 보며 말했다. 장신구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배의 마력을 공급하는 회로 밸브 중 하나였다. 신경 써서 약을 발라주지 않으면 금방 녹이 슬어 꼴 보기 싫은 곳 중 하나였다.
나는 곧장 선교 탑으로 올라갔다. 선교 탑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돛대 꼭대기에는 갈매기 하나가 끼룩끼룩 울고 있었다. 해도는 여전히 펼쳐져 있었다. 마리아가 손을 댄 것인지, 항해용 도구들이 해도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정말, 이봐요! 도대체 뭐하자는 거예요?”
“죄송해요.”
나는 마리아의 고함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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