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1화 〉특별한아이 (21/99)



〈 21화 〉특별한아이

이전과 달라진 아빠의 육아 방식에 복수를 다짐하고,
집에 마련한 작업실에 있는 아빠를 향해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아빠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손에 있는 수십 장의 A4용지를 아빠에게 내밀었다.

".....?"
"아빠가 하라고 해서, 정리한 거야."

아빠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아무 말 없이 내가 정리한 게임 목록 보고서를 쳐다보았다.

"....."

빽빽하게 적혀있는 글씨, 오랜만에 글씨로 가득한 종이를 봐서 현기증이 오는 아빠가 대충 덮고는 끄덕인다.

"우리  열심히 썼네~"

그냥 넘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같아, 아빠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난 꽤나 진심이라서 5일 동안 이것만 적었어, 아빠 말 따라 노력했는데 아빠도 보여줘야지, 대충 읽지 말고 다 외워. 시험  거야."
"...어?"

나는 아빠가 이해하기 힘들도록, 보고서 안에 전문 용어들을 가득 적어놨다.

"한 문제 틀릴 때마다, 용돈 만 원."
"....."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아빠.
내가 장난치는  알겠지만, 전혀 아니다.

"문제는  500문제야."
"시윤아?"
"문제는 이미 만들어놨어. 내용은 내가 기억하고 있고, 이건... 아빠가 자초했어."
"....."
"내가 5일 동안 조사하고 쓴 거고, 아빠가 제대로 안해주면, 아빠 딸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공부해."
"...딸?"
"내가 조사한 만큼 시간은 줄게, 시험은 5일 뒤야."

아빠는 안 한다는 소리를 끝까지 하지 못했다.
내가 컴퓨터 앞에서 보고서 작성하는 것을 흐뭇하게 쳐다봤기에...
나는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바뀐 아빠를 힐끔 쳐다보면서, 콧노래를 부르며 핸드폰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김지호는 어린 딸이 자신에게 준 프린트를 들고 앞집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저 시윤이 아빠입니다."
-"아!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김지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쩌씨!"

가연이가 뛰어오며 김지호를 반겼다.
그리고 그런 가연이가 엎어질까, 다연이가 가연이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가연이 안녕~, 다연이도 반가워~"

그리고 김지호랑 눈이 마주치는 이진석.
김지호의 표정을 단번에 파악한 이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나 지호랑 서재에 들어가 있을게."
"그래요."

김지호는 축 처진 어깨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마냥 이진석을 따라 서재에 들어갔다.



서재 안, 아무  없이 침묵하고 있던 김지호가 말을 꺼냈다.

"형님..."

이미 김지호의 손에 들린 프린트를 확인한, 이진석이다.

"그거... 설마..."

김지호는 말없이 이진석에게 A4용지를 넘겼다.
표지에는 굵은 글씨로 깔끔하게 게임 보고서라고 적혀있었다.
대충 넘겨본 이진석이 침묵을 이어갔다.
누가 보더라도, 아빠에게 '빅엿'을 먹이기 위한 보고서다.
이진석은 보고서에 익숙한 자신이 봤음에도 처음 보는 용어들이 가득했고 8~10포인트로 보이는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쉽게 말해 사전이나 성경보다도 읽기 힘들어 보였다.

"....."
"500문제를 내겠답니다..."
"...여기 안에서?"

대충 읽어보는 이진석, 50장 가량 돼 보이는 분량에 한 장당 10문제씩 제출한다면, 그냥 전부 외우라는 소리였다.

"예..."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가 시켰는걸요. 옆에서 시윤이가 하루 종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본 저로서는... 안한다고 못 하겠더라고요."
"....."
"시윤이의 아빠로서 시윤이의 노력에 보답하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겠지만... 제가,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이진석은 말없이 축 처져있는 김지호를 바라보았다.

"500문제라면... 공부하는 방식을 떠나서... 분량 전부 외워야  텐데..."
"하아..."
"기간은?"

이진석은 도와주거나 최소한 조언이라도 해주기 위해 물어봤지만, 김지호의 답변으로 더욱 암울해졌다.

"5일... 준답니다..."
"허어... 차라리 문제를 몰래 보는 것이..."

김지호는 퀭한 눈으로 이진석을 쳐다보았다.

"실언했군... 시윤이라면 어디에 적어놓지 않고, 머릿속에 있을 테니..."
"있다고 하더라도... 컨닝은 아빠로서는 조금..."

대한민국 재계 2위 한성, 그룹의 중대한 일이 결정되는 곳, 한성의 대표 이진석의 서재.
그곳에서  유부남이, 아이의 일 때문에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덩치 큰 꼬맹이의 고백을 지훈이를 이용해서 막은 뒤로, 다른 꼬맹이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이 엄청  산다는 말부터, 예쁜 척을 한다느니, 여시라는 소리를  앞에서 서슴없이 하는 꼬맹이들.
심지어 성형을 했다는 소리까지 나돌았다.
'여덟...살인데?'


특히나, 여자 꼬맹이들은 눈치를 보며 나를 피해 다녔다.

"허..."

박지훈은 체육시간에 남자꼬맹이들과 친해졌다.
매 쉬는 시간마다 지훈에게 달라붙는 꼬맹이들, 하필 옆자리라서 시끄럽다.

"정신연령이 비슷하니, 뭐..."
"부러우면 부럽다하쇼, 친구도 없으면서."
"...?"

주변을 둘러보니, 그렇다.
학교를 다닌 지 8일차... 나는 깨달았다.
‘왕따’를 당하고 있음을...

"허어..."

신경은 쓰지 않지만, 옆에서 슬며시 간을 보는 박지훈 이 새끼 때문에,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수업이 진행되고, 아무 생각 없이 소설책을 읽고 있으니, 국어선생이 말했다.

"김시윤."

나는 젊은 선생들 사이에선 슈퍼스타라서 그런지, 대부분의 선생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네."
"수업 시간에, 소설책... 읽는 거야?"

정색을 하면서 말하는 선생님.

"죄송합니다."

꼬맹이들이 키득거리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다만 옆에서 ㅈ같은 표정을 짓는 박지훈을 보고 있으니, 분노로 인해 산소가 부족해진다.
이 좀만한 새끼는, 원래 이렇게 재수가 없었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국어선생이 화를 냈다.

"김시윤! 104페이지 소리 내서 읽어!"
"아..."

주변 꼬맹이들이 키득거리는 건 좋다 이거다.
내 옆에 있는 이 새끼는 왜 쪼개고 있는지, 오래간만에 머리의 피가 가시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펴지도 않고, 104페이지의 시작인 '토끼와 자라'를 읊었다.

"".....""

책을 펴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국어책을 펼쳤지만, 보지 않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책을 보고 있지 않음에도 토씨 하나조차 틀리지 않아, 할 말을 잃은 국어선생님이 나를 앉혔다.
나는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싸해진 분위기에 맞춰 사과의 뜻으로 국어선생에게 고개를 숙였고,  모습을 본 국어선생은 말없이 끄덕이고 수업을 진행했다.
자연스럽게 국어책 104페이지를 펼치며, 박지훈의 발가락을 강하게 밟았다.

"끄어억!!!"
"무슨 소리야!!!"

박지훈은 국어선생님의 분노와 함께 교실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학교에 적응을 하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5일이 지났다.
지난 5일 동안 프린트만 닳고 닳도록 보던 아빠.
네 번이나 새로 만들어 줬을 정도였다.
나는 한 번 보면 기억하지만, 아빠는 마음이라도 먹었는지 진심으로 공부했다.

"이거 문제야."
"...응."

아빠는 나를 재우고 나서도 공부를 했는지, 눈엔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아빠의 집중력을 흐트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어떻게 복수할까 생각하고 있지?!"
"에이..."

아빠의 모습과 반응은 나에게 2차전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괜찮아, 이제 아빠가 어떻게 반응하더라도 앞으로 문제만 계속 낼 거야. 나도 딸로서 아빠가 바꾼 육아 방침에 따라야지~"
"...미안."

나는 웃으면서 핸드폰으로 스톱워치를 켰다.

"문제당 30초씩 총 4시간 10분이야."
"어?! 저녁밥 먹을 때까지 아니야?"
"지금 30초 지났어."
"이런 게 어디에 있어! 원래 시험시간은 통보해주고, 시험을 보는 거야"
"...저녁 먹기 전 까지라고 한 적도 없는데... 알았어. 지금 오전 9시니까, 저녁 시간까지 시간 줄게, 천천히 해."

내가 무선 이어폰을 꽂고 영화를 보고 있을 무렵 아빠가 말을 걸었다.

"...이건... 맞추라고 낸 문제야?"

아빠가 손가락으로 짚은 문제,
확실하게 틀리라고 낸 문제다.

- 단풍잎 게임, 보스 몬스터 라이언, 전용 아이템 드롭 확률은.
- 단풍잎, 아이템 중 영혼석에서 힘 9%가 나올 확률은.

"응 다 적혀있었어."
"....."
"억울해 하지 마, 나 문제  때 아빠한테 준 프린트 안 보고 만들었어."
'이 압도적인 기억력에 굴복하라,  어린 아버지여. 후후훗'

아빠의 집중력은 솔직하게 대단했다.
6시간을 문제에만 집중하며 풀고 있었다.

"휴우..."
"나 배고파."

나랑 기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배고프다는 소리에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아빠.

"어...? 어떡하지?"

결국 아빠는 나에게 밥을 주기 위해서 일어나려고 했고,
나는 아빠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때마침 우리 집으로 놀러 온 다연이와 이진석.
나는 이미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이진석의손엔 음식이 가득했다.
아빠와 나에게 샌드위치를 넘긴 이진석은 잠시 아빠의 뒤편에서 문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시윤아... 문제가, 어휴..."
"뭐가요."
‘토를 단다면 아빠와 똑같이 저기에 앉게  거다.‘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진석은 침묵을 지켰다.

"....."

아빠의 시험에 방해되지 않도록, 아빠의 옆에 커피와 간식거리를 두고 가는 이진석,
시간이 흐르고, 오후 6시가 되자, 아빠가 기지개를 폈다.

"다했다!"

나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이어폰을 뽑았다.

"진짜? 채점한다?!"
"잠깐! 채점하기 전에 아빠랑 약속하자."

나는 아빠를 쳐다보았다.

"문제당 1분씩 해서, 아빠가 틀린 개수만큼 시윤이 게임하는 걸로."
"싫은데?"

아빠는 오기로라도 나를 이겨보려고 하는지, 협박 아닌 협박을 시전했다.

"...그럼, 용돈도 없었던 일로 해."
"그래, 그러자."

내 쿨한 답변에 아빠는 할 말을 잃었다.

"....."

내가 아빠의 답안지를보려고 하자, 아빠가 나를 말렸다.
나는 아빠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빠가 반도  맞추면 4시간 10분 이상인데, 자신 있나봐?"

내가 다이아 수저라는 것을 알았고, 내 지갑에 이진석의 블랙카드가 있는 한, 나는 자본에 굴복하지 않는다.

"시윤아... 4시간도 엄청 많은 거야..."
"아니 시간을  정해두는 건데! 그냥 할 거 없을 때 하면 되지!"
"...아빠가 끄라고 하면 끌 자신 있어? 너도 몇 시간밖에 안했다고 말할 거면서..."

잠시 팔짱을 낀 채 턱을괴고 고민한 나는, 아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네."
"우리가 항상그래왔듯, 서로의 합의점을 찾는 거지."
"그게 4시간이야?"
"2시간."

자기가 히어로 영화의 빌런 타누스라도 되는 줄 아는지.
그새 반 토막으로 줄어든 시간에, 아빠의 모습에서 보여선 안 될 인물이 보였다.
박지훈 이 십새끼.

"와... 나 욕할 뻔 했어 아빠."
"....."

아빠는 3/4 이상 맞을 자신이 있었나 보다.

"이렇게 하자."

아빠는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시험은 용돈 선에서 끝내고, 아빠가 그만하라고 하면, 이유에 따라서 생각해보는 걸로."
"...알겠어."
"오케이 근데 용돈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해?"

원래의 목적은 아빠가 틀린 만큼 게임에 현질을 하는 것이지만,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빠르게 변명거리를 찾아, 대답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아빠가의욕이 생기고, 진지하게 시험에 임하지."
"....."
"채점한다?"

그제서야 아빠는답안지에서 손을 뗐다.
가사를 적는 직업을 가진 아빠라서 그런지, 서술형 답이  감성적이었다.
채점을 하다가 처음으로 틀린 것이 나오자 아빠가 말했다.

"그거 맞지 않아?!"
"내가 준 프린트 23페이지 17번째 줄."

아빠는 프린트를 가져와서 확인하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뒤로 시험지엔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아빠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경쾌하게 빨간 펜으로 긋는 내 모습에, 아빠는 트라우마라도 생겼는지 동공이 흔들렸다.

"시... 시윤아 그만할까? 아빠가 용돈 많이 줄게."

아빠는 방금까지 있던, 그 자신감의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를정도로 생각보다도 많이 틀렸다.
틀린 문제가 자신의 판단보다도 많았는지, 아빠가 시험지를  손으로 가져갔다.
나는 시험지를 달라는 듯이, 작은 손을 펼쳤다.

"시... 시윤아?"
"줘."

아빠는 눈을 질끈 감고는 나에게 자신의 시험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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