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특별한아이
어두운 서재 안, 김지호는 이진석에게 자신의 시험지를 부끄럽다는 듯이 내밀었다.
"500점 만점에 210점... 문제를 다 꼬아서냈네..."
"창피합니다..."
이진석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김지호가 내민 시험지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이야... 문제 낸 거 봐... 이게 8살짜리가 낸 거라고?"
"형님... 솔직하게 시윤이가 채점할 때, 무서웠어요..."
이진석은 자신에게 따지러 온 시윤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끄덕였다.
"맞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때마다... 자기가 준 프린트 페이지랑 몇 번째 줄 읽어보라고 말하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김지호의 말에, 잠시 상상했는지 움찔하는 이진석.
"1점당 1만 원...?"
"네, 그 돈이 왜 필요하냐고 물어보니까. 그래야 제가 의욕이 생긴다고..."
"흠... 8살짜리가, 290만 원을 용돈으로... 요구를 하네... 이거 나중에 크면, 얼마나 쓸지...."
김지호는 자신의 딸이 어디에 쓴다는 건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떤 걸요?"
"들으면 내가 말해줬다는 거, 시윤이한테 안 걸릴 자신 있어?"
"...아뇨."
"그럼... 듣지 말게."
"넵..."
나는 아빠와의 합의를 마치고, 정해준 게임을 틀었다.
통화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한 뒤, 박지훈과 대화를 시작했다.
-"아니 형님, 무슨... 이런아기자기한 게임을 합니까?"
"이게 최선이다."
-"아... 요즘 게임이 얼마나 많은데 RPG가 뭡니까..."
"하아... 전체 이용가 말고는 절대로 안 된다는데 어떻게 하냐? 내 주민번호로 만들 수도 없어 인마!"
-"난 아빠가 다해주던데..."
나는 잠시 집에 아빠가 있는지 확인하고 말했다.
"십새끼 자랑하냐?"
-"엌"
화면의 내 캐릭터는 달팽이를 때리고 있었다.
-"와... 우리 호랑이들 다 죽었네... 무슨 몽둥이로 달팽이를 때리고 있어."
호랑이들이란 태백의 행동파, 즉 우리를 칭했다.
"이왕 하는 거 1위가 목표다."
-"영상 보니까 밤새우면서 하는 사람들 있던데요?"
"...그렇다면 나도 밤을 새워야겠지..."
-"그러다 걸리면 일주일동안 못한다면서요."
"난... 두렵지 않다."
-"전 동참 안 합니다?"
"치사한 새끼."
한참을 사냥하고 있을 때, 전직을 하라는 안내문이 나왔다.
'전직이 뭐야.'
화려한 애니메이션이 나오며 대사를 하는 캐릭터.
'흠... 너무 유치한데?'
갑자기 화려한 액션신과 엄청난 설정이 나왔다.
'오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금 나오는 영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놈보다 내 캐릭터가 더 강하게 만들고 만다."
나는 이 게임에 대해 공부했던 내용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자본은 10만...'
즉시 결제창에 들어가서 10만 원을 클릭하자, 인증 번호를 입력하라고 나왔다.
핸드폰을 두고 간 아빠.
나는 빠르게 아빠의 주민번호를 치고, 핸드폰 결제를 했다.
'후환이...두렵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거래 시장에 들어가, 가장 효율적인 투자를 위해 아이템의 가격을 전부 외우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박지훈이 말했다.
-"형님 아직도 30레벨이오?"
"스펙 업을 위해서..."
-".....형님?"
"난... 물러서지 않는다."
컴퓨터 앞에 눈이 붉어진 채로 앉아있는 8살... 아빠가 보면 기겁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학교 수업 중에 나는 엎드려있었다.
아직도 들려오는 나를 뒷담 하는 소리, 꼬맹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어려서부터 친목질이라니 커서 뭐가 되려고... 아니지, 한국에선 저렇게 크면 성공할지도...?'
아직 꼬맹이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자 박지훈이 말했다.
"게임에 투자 꽤나 하더구만, 어떻게 됐어?"
"조용히 해라..."
"...? 얼마 벌었는데?"
"손해 봤다."
"....."
"1만원 남았어..."
"엌? 스스로 천재 천재 하드만 어엌."
내가 눈에 살기를 띄운 채 박지훈을 쳐다보자, 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생각보다... 어려워... 오늘 다시 10만 원 도전한다..."
"...그냥 아이템을 직접 사지?"
"...그러기엔 하루에 충전 가능한 한도가 있어서."
"와... 안 한다고는 안 하네..."
"오늘도 들어와라, 본때를 보여주지..."
앞에서 더하기 문제를 적던 담임이 나를 큰소리로 불렀다.
"김시윤! 누가 수업 시간에 떠들라고 했어!"
나는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박지훈을 힐끔 쳐다보았다.
"박지훈! 밖에 나가있어!"
"네?! 갑자기요?"
"어허!"
나를 바라보는 박지훈.
"....."
나는 언제 떠들었냐는 듯이, 도도하게 인형처럼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내 옆에 베타가 앉아있었다.
알파와 베타를 보면서 전부터 느끼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빠가 노르웨이 숲 고양이라고 말했지만 베타와 알파의 크기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나와 비교될 만큼 커졌다.
"아빠."
"응?"
"얘네 노르웨이 숲 고양이 맞아?"
"음... 지은 이모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알파와 베타가 누워있었고, 그 크기는 나와 비슷했다.
"이정도면 사자 아니야?"
".....잠시만."
아빠는 잠시 전화를 하더니, 나랑 알파와 베타를 찍어서 사진을 보냈다.
나는 베타의 배를 빗으로 쓸어내렸다.
"허어... 너네, 너무 큰 거 아니냐?"
내가 털을 빗어주자, 가만히 몸을 맡기는 고양이들.
아빠가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받더니 전화를 끊었다.
"메인 쿤 이라는데?“
"메인 쿤?"
처음에 산책을 목적으로 산 고양이 산책용 가슴 줄이 작아져서, 새로 사야 할 판이었다.
"손."
내 작은 손바닥에 손을 올리는 베타.
나는 가볍게 베타를 쓰다듬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단풍잎 게임을 하고 있었고, 아빠가 불렀다.
"시윤아."
"응."
"밥 먹어."
아빠의 부름에 컴퓨터를 켜놓은 뒤, 거실로 향했다.
식탁에 한가득 있는 반찬들, 대부분 할머니가 한 음식들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빠는 밥을 먹고 있는 나를 지켜봤다.
그 모습에 아빠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아빠가 말했다.
"시윤아."
"응?"
"왜 아빠 통장에서, 30만 원이 빠져나갔을까?"
아빠의 의문문에 밥을 먹다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크흠... 체했나? 오늘은 조금 배부르네, 잘먹었....."
"야! 김시윤!"
"...미안."
아빠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진지하게 물었다.
"하아... 아빠가 우리 딸 잘못 키우는 걸까?"
"아니? 난 충분하게 행복하고, 잘 크고 있어~"
내가 어색해하면서 대답하자, 아빠가 실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 돈 훔쳐 가면서?"
"헐... 딸한테 훔쳐 가다니..."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자, 아빠가 나를 한심하단 눈빛으로 말없이 쳐다보았다.
"....."
"미안, 내 통장 290만 원에서 30만 원 빼! 아니다, 기분이다! 60만 원 빼.
돈이 많은 아빠에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겠지만, 나에게 60만 원이란 큰돈이었기에 크나큰 선심을 쓴 것이다.
"시윤아."
"...응?"
"어딜 날로 먹으려고, 1층 내려가서 애호박 3개, 아보카도 2개, 그리고 간장사와."
"....."
"심부름 값은 1,000원."
"...아버지?"
아빠는 내 반응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1,000원씩 30만 원 채우고, 밥 다 먹은 뒤에 사와~ 우리 딸."
나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1,000원은 오바야... 300번을 어떻게 갔다 와."
"그럼 얼마가 좋을까?"
"...3,000원으로 합의 봅시다."
"1,500원."
"..... 2... 하아. 알겠어..."
나는 밥을 먹은 뒤, 옷을 대충 입었다.
아파트 복지시설 2층에 있는 마트.
심부름을 위해 돌아다니고 있을 때, 아빠가 젖동냥을 하던 시절 나에게 젖을 먹였던 아줌마를 만났다.
"어머! 시윤이 심부름 나왔니?"
"네~"
"시윤이 혼자 돌아다니는 건 처음 보네~"
"하아... 저도 처음이네요. 저기 뒤에서 아빠가 따라오고 있지만, 모르는척하고 있어요."
"...?"
아줌마는 아빠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빠가 멀리에서손가락으로 '쉿'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급격하게 초라해지며, 어디 내놓기 창피하게 느껴지는 우리 아빠.
"하아..."
나는 장바구니를 들고, 아보카도를 골랐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꼬맹이.
나보다 키가 큰 꼬맹이가 벙찌더니 갑자기 나에게 다가온다.
"안녕."
"그래, 반갑다."
"너 되게 예쁘다..."
"그래, 고맙고."
나는 애호박을 쥐려고 팔을 뻗자 닿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꼬맹이가, 애호박을 쥐어서 건네줬다.
"2개 더."
"응..."
힘겹게 애호박을 꺼내는 꼬맹이, 주변을 보더니 머쓱해하며 나에게 건넸다.
"그래, 고맙다. 고생하고."
"저..."
나를 불러 세우는 꼬맹이, 나는 무시하려다 꼬맹이를 쳐다보았다.
"좋아해!"
역시나...
초등학교로 들어가면서 나에게 고백하는 꼬맹이들이 많아졌다.
"그래, 고맙다."
"...사..."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려는 것 같아, 선을 그어줬다.
"거기까지."
나는 간장을 사기 위해 짧은 다리를 움직였다.
나를 따라오는 꼬맹이, 그 뒤엔 아빠가 숨어있었다.
아빠는 숨었다고 한 거겠지만,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아빠의 위치를 알 수가 있었다.
간장을 넣자 무거워진 바구니, 나는 따라오던 꼬맹이한테 말했다.
"들어."
"응."
계산대로 향하자, 몸에 명품을 두른 덩치 큰 아줌마가 나타났다.
"아들 뭐해."
"으응?"
나는 상황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꼬맹이의 어머니에게 빠르고 가볍게 인사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가식적이고 옅은 미소를 보내며, 살갑게 인사를 하자 끄덕이는 아줌마.
"그래... 넌 누구니?"
"시윤이라고 해요, 김지호 딸."
"아! 맞네 TV에서 봤어."
"네~"
하지만 아줌마의 시선은 자신의 아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근데... 우리 아들이 왜 네 짐을 들고 있니?"
"아! 들어주겠다고 해서요, 너무고마운 거 있죠!"
내 말에 꼬맹이가,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시간을 끌면 더욱 곤란해질 거라는 생각에 빠르게 마무리를 지었다.
"들어줘서 고마워~ 아드님이 착하네요!"
"...시윤이 보다 오빠란다..."
"아! 그렇군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오빠 잘 가고."
나는 아빠가 준 카드를 꺼내며, 계산한 뒤 카운터를 빠져나왔다.
빠르게 자리를 뜨는 나에게, 손을 흔드는 꼬맹이.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정면을 응시하고 말했다.
"아빠 이제 그만 나오지?"
"....."
"출발할 때부터, 따라오는 거 알았거든? 어차피 집에 들어가면 들킬 거잖아."
"...응."
나는 초라한 행색의 아빠를 보았다.
급하게 따라오느라, 잠옷 바람이었다.
"다연이랑 수영장 가기로 했어, 빨리 와."
"응..."
"걱정되면서 왜 시킨 거야?"
"...잘하나 보려고?"
아빠와 나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안 들어줄 거야?"
아빠는 내 말로 인해, 내가 들고 있는 짐을 빠르게 들었다.
"....."
조용해진 엘리베이터 안.
"나를들라고."
"앗."
아빠는 나를 품에 안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며, 훌쩍 큰 내 키.
하지만 남들보다는 작은 편이라 아직 아빠가 들 만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네~"
"...너 8살인 건 알고 있지?"
"그러면... 내 삶의 절반 정도 전의 생각이 떠오르네... 아빠로 따지면 15살 때."
"...그래... 옛날이 맞긴 하네..."
나는 내 몸만 한 아빠의 팔뚝을 보며 말했다.
"아빠 요즘 몸 커지고 있는 거 알아?"
아빠는 고된 운동을 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지, 아니면 내 입에서 멋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건지, 말을 돌렸다.
"살쪘나?"
"응."
"그치? 요즘 운동을...? 아빠 살쪘어?"
갑자기 팔에 힘을 주는 아빠로 인해 팔이 딱딱해져서, 불쾌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뭐해?"
"미안..."
아빠는 한 손에는 바구니를, 한 손에는 나를 안고 문 앞까지 왔다.
"...시윤아 비밀번호 좀 눌러줄래?"
"하아... 어차피 현관에서 신발 벗어야 되는데 내려놓지?"
아이처럼 고개를 흔드는 아빠, 나는 한참 아빠를 바라보다가 포기하고는 아빠의 품에서 불편하게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