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기다리고, 기대하던 게임을 하다.
‘지나가는행인’을 참교육 한 다음날.
수업시간에 지훈이는 핸드폰으로 옆집 형님에 출연한 내 영상을 보고 있었다.
"와... 이건 진짜 불공평하네..."
나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다가, 지훈이의 말에 영상을 힐끔 쳐다보았다3.
영상 속, 교탁 위에 앉아있는 나.
"뭐가."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조사를 해봤거든요?"
박지훈의 입에서 조사라는 단어가 나오니, 나는 피식 웃었다.
끽해야 녹색 창의 검색해본 것이 전부이지 않겠는가.
"뭘."
"형님 아버지가 벌어들이는 돈이요."
지훈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수업을 하고 있는 선생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이미 거의 다 완성된 그림.
"뭘 알려고 그러나? 알면 알수록, 애초에 인생은 불공평한 것을..."
"....."
칠판에 글을 적어내리는 선생과 눈이 마주쳤지만,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나에 대한 정보를 모두 공유한 것 같았고,
내가 한 번 본 것만으로 전부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알면서도 못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다그린 스케치북 한 장을 뜯어서, 가장 밑에 날짜를 적고 싸인도 했다.
그림을 보니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와서 끄덕이며 책을 펼쳤다.
"와... 사진이네 사진..."
나는 수업이 끝나고, 선생에게 그림을 주었다.
"선생님, 이거 선물."
선생님은 내 그림을 잠깐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선생님이니? 고마워~ 잘 받을게~"
"넵."
초등학교 저학년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사무실에 내가 그린 그림을 한 장씩 걸어두고 있었다.
4살부터 4년간 거의 매일같이 6시간씩 그림만을 그려서인지, 그리는 속도와 정교함은 압도적이었고, 그림 수준은미대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의 그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 미술 쪽으로 나아가도 되겠는데?"
"... S사 무너뜨린다는 사람 어디 갔지?"
나는 지훈이의 말에 턱을 괴고 창밖의 파란 하늘을 보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을 돌렸다.
"... 내년에 같은 반 되고 싶으면, 공부나 해라."
서울 사립초등학교, 이 학교는 아이들의 성적으로 반이 나뉘기 시작한다.
"8살짜리한테 지식으로 진다는 게 좀 그렇지 않냐?"
꼬맹이들에게 지식으로 지는 것이 쪽팔리다며,
노력하는 박지훈이지만...
다연이랑만 비교해 봐도 한참이나 떨어지는 머리.
솔직히 상위권 아이들은 우리가 배우는 범위로 시험을 쳤을 때,
성인들이 오더라도 상위권 아이들을 이기기 힘들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지훈이와 식당으로 향했다.
1~3학년까지 사용하는 식당에 들어가 식판을 들고 음식을 담았다.
산처럼 쌓고 있는 지훈.
나는 먹을 양만 담고는 자리를 잡았고, 뒤늦게 지훈이가 따라 앉았다.
"애걔? 이거 먹고 힘이 나냐? 왜 먹는 게 안 늘어?"
같은 나이대의 아이들에 비해 결코 적은 양이 아니지만, 지훈이에 비하면 초라한 양.
"모르겠다. 이것만 먹어도 배부르던데."
나는 밥을 한 숟가락 넣고,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단아하게 앉아서 책을 한 장씩 넘기는 나를 보는 지훈.
"....."
지훈이는 입 안에 많은 음식을 집어넣고 터질 듯한 볼을 하고선, 더럽게 쩝쩝거리며 나를 본다.
"...?"
음식을 대충 씹은 뒤 삼킨 지훈이 말했다.
"와... 예쁜 척 존나 하네."
"왜, 시비야."
내가 머리를 넘기며 말하자, 내 반응에닭살이 돋는다는 듯이 양팔을 비비는 지훈.
"이잉? 안 어울리게 뭔 짓이야!?"
"좋게 말해도... 시발... 하아... 밥이나 쳐 먹어라, 그 나이부터 이빨 털리고 싶지 않으면."
"...넵."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요즘 아빠에게 공주 취급을 받아서인지 내 행동도 바뀐 거 같아 소름이 돋는다.
나는 습관처럼 조신하게 다리를 붙이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
나는 순간 온몸에 올라오는 닭살에 책을 덮고 밥만 먹기 시작했다.
체육시간이 다가와서 나는 체육복 가방을 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나를 발견하고, 보란 듯이수군거리는 여자아이들.
"쟤, 너무 예쁜척하는 거 아니야?"
"아까 봤어? 선생님한테 그림 주면서 애교 부리는 거, 개극혐이야..."
"존나 재수 없어."
내 이미지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 참... 다연이가 그리웠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내 갈아입었다.
하얀 바탕에 초록색 띠로 장식되어 있는 체육복.
나는 벗어놓은 교복을 옷걸이에 걸어 넣으며, 사물함을 닫았다.
내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는 꼬맹이들.
꼬맹이들이 저런 시선을 하고, 뒷담을 하는 걸 내가 어쩌겠는가, 그래봤자 8살인데.
나는 꼬맹이들을 두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 선생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머리띠로 천천히 묶고 있으니, 체육관 안에 있는 모든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부담스럽구먼...'
나는 몸 쓰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움직여본 것은 수영뿐이었지만.
어느새 눈앞에 덩치 큰 체육 선생이 있었고, 온 순서대로 줄을 서고 있었지만 먼저 왔던 지훈이는 앞줄에서 빠져나와 내 뒤로 왔다.
"오늘은 피구를 할 거예요."
평소에는 주변 산책 위주로 하더니, 오늘은 몸을 좀 움직이는 수업을 하나보다.
처음 듣는 구기 종목 ‘피구’.
'피구가 뭐지?'
선생이 게임을 설명하고, 룰을 알게 된 나는 내 팀의 위치로 가서 서있었다.
상대팀이 된 지훈이를 바라봤을 때,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작된 피구.
예상은 했지만, 시작부터 갑자기 나를 향해 말랑하고 가벼운 공이 날아왔다.
굳이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고개만 젖히며 피하자, 체육 선생의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 과장되게 피해야 하나...?'
상대팀 꼬맹이들은 전부 나만 노렸다.
'새끼들 귀찮게 하네.'
나는 그냥 공에 맞고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순간 압도적인 속도로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피구 공.
그 순간 공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까지 다가온 공을 고개를 젖혀 피하며, 공을 던진 박지훈을 쳐다보았다.
공은 장외로 나가며 이미 아웃된 남자아이가 나에게 또다시 공을 던졌다.
나는 박지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한 손으로 나에게 날아오는 공을 잡았다.
터억.
내 시선에 지훈이는 크게 움찔했다.
'... 해보자고?'
내 입모양에 갑자기 박지훈이 다른 꼬맹이들 사이로 숨었다.
애들한테 던질 테면 던져보라는 듯이.
나는 꼬맹이들이 잡지 못하도록 다리를 맞추며, 빠르게 사람들을 줄여나갔다.
"".......""
"넌 뒤졌어."
혼자 남은 지훈이에게 야구공을 던지는 듯한 자세를 잡고, 그대로 공에무게를 실어서 던졌다.
아이의 몸에 한계가 있어 빠르게 날아가지는 못한 공.
지훈이는 가볍게 피했고 공은 멀리 날아갔다.
날아가는 공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는 지훈.
"뭐야, 느린데?"
"....."
"괜히 긴장했네."
지훈의 그 한마디로 인해, 오랜만에 이마에 핏줄이 서는 것을 느꼈다.
공의 소유권을 얻은 지훈.
나를 맞추기 위해 던진 공은 빠른 속도로 날아왔지만,
나는 패스를 받는 듯, 날아오는 공을 가볍게 잡았다.
분위기가 과열되며, 상대의 멘탈을 무너뜨리기 위해 서로를 약올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던질거면, 밥은 왜 그렇게 많이 처먹었냐?"
내 도발에 지훈이의 이마에도 핏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응~ 니가 던지는 거 눈 감고도 잡어~"
승부의 끝이 보이지 않자, 입을 벌리며 지켜보던 체육 선생,
돌발 상황이 생긴다면 우리를 말리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전력으로 공을 던졌고, 지훈이는 날아오는 방향을 확인하더니 눈을 감았다.
"어엌? 진짜 눈 감고도 잡았는디?"
생각보다도 느리게 날아가는 공과 끝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 서로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도발을 시전하는 지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발 안 해, 야! 그냥 다이 깨자."
내 말에 옳다구나 싶었던 지훈이가 공을 바닥에 강하게던졌다.
"덤벼! 시발!! 내가 뺄 거 같아?"
아... 이 ㅈ같은 새끼는 흥분으로 인해 지금 내가 누구인지도 잊은 거 같았고,
그 때문인지 내 눈에는 부하 김재형이 아닌, 똥오줌 못 가리는 짐승새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로 열 받은 지훈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 역시도 피가 끓어올랐다.
남자 꼬맹이들 사이에서 어느 샌가 싸움 짱이 되어있는 박지훈.
그로 인해 기세가 올랐는지 가끔 선을 넘는 지훈이를 보고 있자니,
언젠가 서열정리가 필요하다 생각했고.
조금 앞당겨졌을 뿐, 오늘이 그날인 것을 나는 깨달았다.
"...? 뭐라고 했냐?"
경고의 의미로 정색을 하자, 지훈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아니, 이젠 나를ㅈ으로 보고 비웃은 게 분명했다.
'아... 그래... 여기까지다...'
지훈이에게 날아가듯 튀어나가자, 상황을 인지하고 나를 온몸으로 말리는 체육 선생.
"시윤아 너무 흥분했다!!!"
"놔!"
나를 말리는 선생 뒤편에서, 박지훈이 나를 보며 중지를 내밀었다.
'오냐... 그 손가락 뽑아주마.'
나는 가볍게 체육 선생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빠져나간 나를 잡으려는 체육 선생의 움직임을 가볍게 피하며, 거대한 몸을 밟고 빠져나왔다.
내 몸놀림에 체육 선생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고,
나는 바닥에 발을 내딛을수록 붙는 가속도를 이용해 박지훈에게 도약했다.
박지훈은 피하면서 카운터 펀치를 노렸지만...
어린아이의 주먹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정말 이상해진 걸까.
그 주먹이 너무나도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박지훈이 피하는 방향을 따라 안면에 니킥을 꽂자, 쌍코피를 터트리며 한참을 날아갔다.
"".......""
나의 그림 같은 플라잉니킥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뒤에서 벙쪄 있던 체육선생이 정신을 차렸는지 고함을 질렀다.
"김시윤!!!"
"...?"
나는 체육선생의 표정을 보며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지했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핑곗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시윤이 너 무슨 짓이야!!!"
나는 공손히 단전에 두 손을 모은 채로 말했다.
"아니 쟤가 뻑큐 날렸단 말이에요..."
'미친 건가 이걸 핑계라고...'
친구 한 명을 조져놓고 말 같지도않은 소리를 하는 나를, 체육 선생은 미친놈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체육 선생은 한숨을 쉬며 기절한 지훈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천천히 지훈이를 들쳐 맸다.
다시 한번 핑곗거리를 생각한 나는 체육 선생에게 말하려 했지만.
체육 선생은 단호했다.
"조용히 하고 따라와!"
나는 말없이 양호실로 향하는 체육 선생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