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꼬맹이들의 다짐.
나는 수영 수업이 끝난 뒤, 삐져있는 지훈이를 매점에 데려가서 먹을 것을 한가득 사주었다.
"".....""
고요한 상황 속에서 잠시 방금 있던 일이 생각나, '풋'하고 짧게 웃었다가 지훈이에게 먹는 걸로 맞을 뻔했다.
"야, 요즘 시대는 그게 다가 아니야. 영 그러면 확대수술하면 되지."
"어려서 그런 거야... 아빠는 컸어."
"그래? 우리 아빠는 대물이던데."
"....."
나는 박지훈을 보며 속삭이듯 입에 손을 가져다 되며 소곤거렸다.
"솔직하게 거의 박기 급임."
내 말에 먹다가 체했는지 콜록거리던 지훈이 나를 바라봤다.
"미친...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텀블러 넣어놓은 줄..."
"와... 그렇게 안보이던데."
나는 딸기 우유를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딸기 우유는 왜 이렇게 마셔대?"
"가슴 커지려고."
내 직설적인 답변에 지훈은 콜라를 마시다가 뿜었다.
나는 흘러오는 콜라를 피하기 위해서 잠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져서 뭐 하게."
"미의 정점이지."
"....."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미술실로 향했다.
고민수 미술 선생과 한참 그림을 그려가는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고민수 선생은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와... 시윤아 드라마도 찍었니?"
"네."
예고편이 나온 거 같아 나도 관심을 보이자, 고민수 선생은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내가 받은 대본에 적혀있는 구미호의 설정은, 모든 남자를 홀릴 수 있고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화가 가능했다.
특히, 작은 모습일수록 에너지의 소모가 적어, 사용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한 모습으로 내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핸드폰 속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내가 예고편에 나왔다.
CG에 얼마나 투자했는지, 복슬복슬한 꼬리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주인공을 보며 반가움에 달라붙은 나는, 다리를 동동 구르며 주인공을 항해 밥을 달라고 조르고 있었고.
일 때문에 지친 주인공은, 나를 무시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올려다본 나는 끄덕이며 말했다.
-"21세기의 남정네들을... 유혹하는 방법을 보여주지..."
진지한 표정으로 벽으로걸어가더니, 카메라를 한번 쳐다보고는 벽을 잡고 엉덩이를 움찔하자 '뽀잉'이란 효과음이 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주인공.
그 상태 그대로 9개의 꼬리를 흔들며 트월킹을 시전하자, 급하게 달려온 주인공은 나를 들고 앉힌 뒤 밥을 줬다.
-"역시... 21세기 구애의 춤... 한 번에 넘어오는군..."
-"아니거든!!!"
고민수 선생은 예고편을 보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이쁘게 잘 나왔네~"
저 말은 나도 인정한다, 하긴 분장을 위해서 쏟은 시간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저게 아동 학대지.'
고민수 선생과의 드라마 이야기를 마친 뒤, 고민수 선생의 가르침 없이도 알아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물감을 사용한 내 그림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고민수 선생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음... 빛의 구도나 반사각은 아직은 어색한데, 색을 활용하는 건 완벽해."
내가 봤던 시선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 열정을 쏟아낸 그림을 평가하는 고민수 선생.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입안에 수성물감을 부어줬을 테지만.
바로 옆에서 나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고민수 선생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나와, 선생의 그림 안에 있는 내 그림까지도 나보다 잘 그린 것 같다.
그 시간에 저렇게까지 그릴 수 있는 건가 싶다.
"와..."
"잘 그리지?"
나는 말없이 고민수 선생의 그림을 보고 끄덕였다.
오늘도 아빠는 평소와 같이 나를 데리러 왔으며, 나는 아빠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너튜브를 보니 구미호의 분장을 위해, 하얀 머리와 핑크색으로화장한 나와 아빠가, 춤을 추며 장난치는 모습이 밈으로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빠가 말했다.
"어때? 찍기 잘했지?"
"눼눼~"
나는 표정을 구기는 아빠를 보고,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나도 조수석 앉고 싶은데..."
"12살까지는 법으로 안 된대~"
"흠... 법을 들먹이니, 할 말이 없네..."
세상이 좋아졌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법들이 많이 개정되면서 한 명 한 명의 인권이 커졌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엊그제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 시절과 비교가 되지 않는 서울 풍경을 시작으로 많은 것이 바뀐 대한민국.
너튜브에 나온 북한과 우리나라의 차이를 보고 있으니, 북한의 심각한 상황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게다가 다이아 수저라니...
이젠 소중한 두 쪽을 가져간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 강한성은 전생에 부하들, 가오와 자존심, 탱탱볼 두 쪽밖에 없었지만.
솔직하게 4개를 제외한 전부를 가지고 있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아, 가오와 자존심은 아직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잠시 회상을 이어가던 중 아빠가 말했다.
"오랜만에 외식할까?"
"약속 있어?"
"그게, 지은 이모가 보고 싶다고 하네?"
"그래 뭐, 일도 없고 갑시다."
"넵, 모시겠습니다."
어느덧 여름이 다가오고, 나는 아빠와 침대 위에서 대면하고 있었다.
"...안 돼."
"와... 나 PTSD 올 거 같아. 작년에 우리 이러지 않았어?"
"....."
"봐봐... 내가 이제 9살이잖아? 다른 게임을 하고 싶을 때가 됐다 이 말이지."
"...아니야 역시 아닌 거 같아."
"나 집 나갈 거야."
"그래봤자, 다연이네 아니야?"
"....."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거기도 아빠 집인데?"
"....."
요즘 말싸움을 많이 해서 그런가, 아빠의 무논리 화법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냥 다연이네 딸 할까 봐, 나 원하는 거 같은데."
"아닐걸? 진석 형님이 나한테 너 피곤하다 했는데?"
나는 순간 진짜로 이진석이 나를 피곤하게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아줌마는 좋아하거든?"
"호오... 과연 그럴까?"
"나 딴방 가서 잘래."
"슬슬 그럴 때 되긴 했지, 대신 컴퓨터는 이제 못 쓰는 거 알지?"
"...미쳤어? 말이 왜 그렇게 되는데?"
"다른 집 말 들어보니까, 아직 교육에 안 좋다고 핸드폰도 안 주더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빠에게 무릎을 꿇었다.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사옵니까... 아바마마... 고작... 게임 때문에..."
"어허... 너도 짐에게 가출을 선언하지 않았는가."
나는 가능한 곱게 앉으면서 팩트를 꽂았다.
"아바마마. 소녀의 연기를 도와줄 때나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대사를 해주시지, 지금까지 왜 그랬사옵니까."
"....."
"그럼 언제 다른 게임 시켜줄 건데."
"...음... 좀 더 크면?"
나는 꿇은 무릎을 풀며 팔짱을 꼈다.
"삐뚤어질 거야."
"컴퓨터 안 한다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대화에 아빠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빠."
"응?"
"우리 욕 트일 때 된 거 같지 않아?"
아빠는 게임을 하며 가끔 욕을 하던 내가, 자신에게 하는 것을 상상했는지 크게 움찔하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그치만 안 되는 건안 되는 거야"
우리보다 아침을 일찍 맞이하는 다연이의 집.
나는 방금 일어났기에 잠옷 차림으로 입구에 서서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나요."
-"어머! 시윤이니? 들어오렴~"
20대 여성 같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농후한 미모를 풍기는 김선화가 나를 맞이했다.
가장 먼저 달려와 나에게 달라붙는 가연.
"안녕."
"누나! 시유 누나!!!"
가연이 내 몸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고, 뒤에서 정연이 부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무엇을 하고있었는지,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뛰어오는 다연이.
"시유나~"
"안녕 안녕."
김선화가 몸을 숙이며, 내 눈높이를 맞췄다.
"밥은 먹었니?"
"아빠가 안 먹이고 보낼 리 없잖아요."
"그...치?"
거실에 앉아있는 이진석과 눈이 마주치고 나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
무언가 잘못됐음을 안 이진석이 급하게 내 시선을 피했다.
내 시선을 발견한 김선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쿠키 먹을래?"
"그럼, 그럴까요?"
나는 다연이와 같이 가연이를 그려주며 놀아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연.
"시윤아."
"응?"
"바이올린 켜줄까?"
심심해 보이던 정연이에게, 한 번쯤은 찐하게 놀아주자는 생각으로 피아노에 앉았다.
눈을 반짝이던 정연이 내 옆에 서더니 바이올린을 켰고, 나는 프리스타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연이가 만든 박자를 천천히 타기 시작하면서, 정연이의 음을 맞추고 이어지는 코드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멜로디가 만들어지며 음악이 퍼지자, 얼굴을 붉히던 정연이가 실수를 했다.
나는 정연이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다시 리드해주자 눈을 반짝이는 정연.
"우와..."
정연이는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우지만, 실력은 취미 수준을 넘어섰다.
음악을 끝내자, 자신의 일도 하지 않고 쳐다보던 이진석이, 김선화와 같이 물개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정연이가 나를 보며 감탄했다.
"시윤아 짱이다!"
"나도 알아."
"또 하자!"
늘 어른스러웠던 정연이는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내가 멜로디를 깔아주자, 정연이는 바이올린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대화를 했을때, 다연이와 가연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려면, 자신이 공부해야 된다고 했던 정연.
한성이 자식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었구나 생각했다.
아무도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혼자서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공부를 하며, 쉬는 시간에 음악을 하는 정연이.
저런 포부의 꼬맹이가 아니라면, '한성'이란 거대 공룡기업을 누가 책임지겠는가.
그래서 난 정연이 앞에서만큼은, 머리가 좋은 것에 잘난 체하지 않았다.
페이스메이커, 라이벌은 되어 주더라도 패배감은 느끼지 않도록.
다연이 내 옆에 앉더니 건반을 눌렀다.
딩~
"시유나."
"응?"
"나 할 말 있어!"
"뭔데?"
"안 돼! 방에 가서 해야 돼, 비밀이야."
나는 벌써 부모님에게 숨기려는 것이 있다는 다연이를 보고, 피식 웃으며 따라갔다.
다연이의 방에 도착하자, 다연이는 소중한 물건인 것처럼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곳에 있는 김태오.
전에 이진석과 함께 봤던 HSW 조기교육 프로젝트의 후보였다.
"....."
"짱멋있지? 실제로 보면 정말 멋있다?"
'세상에... 몇 번이나봤다고...'
다연이가 사진을 보며 침대 위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저래서... 저놈 쓰지 말라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척하며, 다연이에게 진실을 토하도록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왜,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전에 아빠가 소개해줘서 봤는데 운동 정말 잘해!"
"지훈이도 잘하는데?"
"못생겼어."
너무나도 단호하고 확실한 다연이의 대답.
'미안하다 재형아. 내 실수다.'
그래도 지훈이 운동을 잘한다는 것에 수긍하는 다연이다.
"왜 시유니는 마음에 안 들어?"
"내가 누구 좋아할 거 같아?"
내 말에 잠시 천장을 보며 고민하던다연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음... 다행이다!"
"왜?"
"시유니는 너무 이쁘니까, 시유니가 좋아하면 얘도 시유니 좋아할 거 같아서!"
허허... 내가 남자를 좋아할 일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저 기생오라비에게 다연이를 넘길 수는 없었다.
유혹을 하더라도, 다연이에게서 떨어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연이가 태오를 상상이라도 하는지, 천장을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아빠가 태오 이제부터 나랑 같이 학교 다닐 거래!"
나는 설레어하는 다연이를 진지한 표정을 쳐다보았다.
"여자는 남자한테 좋아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면 안 돼."
나를 획 돌아보는 다연.
"왜?"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이상, 자신에게 달라붙는 여자를 당연하게 생각하거든."
"진짜?! 근데 시유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45년을 남자로 살았지만, 나도 나를 좋아했던 여자를 당연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다연이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음... 다연이 아빠 좋아하지?"
"응."
"아빠가 다연이 좋아하니까, 다연이가 좋아할수록 더 좋아해주지?"
"응!"
"다연이는 아빠 친구 별로 안 좋아하는데 다연이 좋아해주지?"
"아니야! 시유니 아빠 좋아!"
"...우리 아빠 말고! 우리 아빠는 다연이도 좋아하니까."
"으음... 아빠 친구 없는데?!"
나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했다.
이진석이 집에 박혀있는 이유가 친구가 없어서였다니...
"하지만 아빠 부하는 나 좋아해."
나는 이 똑똑한 꼬마 숙녀에게 뽀뽀라도 갈겨주고 싶었다.
"그런 거야! 공주님은 신경 쓰지 않아도 사랑을 받는 거지!"
"허억! 그런 거야!?"
다연이는 늘 생각하는 거지만 리액션이 좋다.
그리고 설득할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야. 그러면 다연이가 생각하는 왕자님도 다연이를 공주님처럼 봐주지 않을까?"
"진짜!?"
"그러엄~ 공주님처럼 이쁘게 하고 있으면, 사랑과 선물이 가만히 있어도 오는 거야~"
"!!! 그럼 그러면 시유니는 공주님이야?"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하는 다연에게 말했다.
"내가 왜 공주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