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꼬맹이들의 다짐.
나는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다연이가 웃으면서 나를 봤다.
"하지만 시유니는 공주님처럼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하잖아!"
나는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 것 같아, 다연이에게 팩트를 알려주었다.
"난 공주님 아니야. 그리고 다연이도 고백 많이 받았잖아?"
"....."
"그치? 공주님처럼 가만히 있어도 고백하는 애들 있었지?"
"...응."
나는 다연이랑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다연이에게 질문했다.
"근데 왜 다 거절했어?"
"...너무 멍청해..."
"그 사진 속에 있는 친구도 다연이에 비하면 멍청할걸?"
저 김태오란 여우 같은 자식을 다연이의 마음속에서 지우길 바랐지만, 다연이의 반응은 그렇지않았다.
"하지만 멋있어!"
다연이의 표정을 보니... 100퍼센트 언젠간 고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한 다연이가 김태오를 멍청한 친구로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간을 끌었다.
"멋있어도 티 내면 안 돼, 상대방이 넘어올 때까지 이쁘게 하고 다니면 되는 거야."
"!!! 그러면, 다연이 좋아해 줄까?"
"당연하지~ 공주님처럼 가만히 있어도 다들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거지!"
"알겠어! 나도 공주님 할 거야!"
나는 9살 꼬맹이의 다짐에 손뼉을 쳐주었다.
방 밖으로 나오면서 이진석에게 눈치를 줬고, 내 눈빛을 받은 이진석은 자연스럽게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는 이집 꼬맹이들의 불가침 영역.
나와 이진석이 자연스럽게 대면할 수 있는 구역이다.
"본론부터 말하죠, 나 피곤하다고 생각해요?"
뜨억한 표정을 짓는 이진석.
이진석의 머릿속에 얼마 전 자신의 딸에 대해 물었던 김지호가 떠올랐다.
"에...에이... 설마."
"반응만 봐도진실을 알 것 같은데... 아빠가없는 얘기할 사람도 아니란 말이죠."
"...미안하다."
나는 턱을 괴면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덕분에 아빠한테 말싸움 밀렸어요. 아무튼 다음."
"....."
내 눈빛에 움찔한 이진석이 깍지를 끼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김태오 쓰지 말라고 했죠."
예전에 뽑았던 HSW의 꼬마 김태오.
갑자기 나온 그 이름에 이진석이 당황해했다.
"...? 왜 그러니?"
"다연이 푹 빠졌어요."
"뭐?!한 번밖에 안 만났는데?!"
"다연이가... 금사빠일 줄이야..."
표정이 심각해진 이진석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다음부터 다연이 얼굴 안 볼 자신 있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인지한 이진석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나는 이진석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똑똑해서 다 기억할걸요? 일단 내가 잘 말해놨어요."
"고맙구나..."
"크면 자연스럽게 눈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건데...김태오란 꼬맹이 외모가 심상치 않았단 말이죠..."
"....."
"그거 물건인 게... 크면 더 빛날 겁니다. 마치 저처럼."
"안 돼..."
절망에 빠진 이진석을 바라보며 몇 마디를 더 이었다.
"연애는 안 된다. 이런 헛바람 넣지 말고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질 나이니까."
"...네가 그래서..."
내 눈빛에 움찔한 이진석은, 보지도 않던 책을 거꾸로 뒤집어서 읽었다.
"내가 뭐요."
"아...아니다."
"아냐, 말해봐요. 단점을 알아야 나도 바뀌지."
잠시 내 눈치를 보던 이진석이 책을 덮었다.
책이 거꾸로 되어있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발견한 이진석의 손이 떨렸다.
"지호에게 들어보니... 너에게 시키고 싶지 않은 일들을 너는 원한다고 하더구나..."
"나머진 아빠 마음에 드는 일이니까."
"...원래 어른의 입장에선, 걱정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턱을 괴던 손을 풀고 천천히 깍지를 끼며 이진석에게 물어보았다.
"그 이유가 뭔데요."
이진석은 생각이 정리됐는지, 정확하게 말했다.
"아이의 인격 형성에 악영향이 끼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지."
"내 인격이 어떤데요."
"싹퉁바가지..."
내 눈치를 보며, 할 말은 꼬박꼬박 다하는 이진석.
순간 혈압이 올라왔지만, 나는 어른들에게 저런 이미지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과거의 내가,나처럼 행동하는 꼬맹이를 봤다면 딱밤을 먹였을 것이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데요?"
"...다연이를... 보면 되잖니...?"
"...? 그건 욕심이고."
"....."
나는 대충 이해했다는 듯이 끄덕이고는 다음 계획안을 말했다.
"다연이 유학 보내고 싶은 건 알겠는데, 취소하시죠. 계획."
"....."
"아니면 김태오가 다연이 잡아먹어도 안 막습니다?"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진석.
"나중에 아저씨보다 태오 더 좋아할걸? 아니다 지금도 그러려나?"
"서... 설마."
"눈치 없게 다연이한테 물어보지 마요."
나는 정색을 하고 이진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중에 다연이가, 자신이 태오 좋아하는 거, 아빠한테 얘기했냐고 물어보면, 아저씨... 진짜... 감당 안 되실 거에요."
내 싸늘한 목소리에 이진석이 침을 삼켰고, 조용한 서재 안에서 꿀꺽 소리가 울렸다.
"시유누나! 시유누나!"
나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가연! 시유니 힘들어!"
다연이는 나에게서 가연이를 떼려고 했지만 울려고 하기에 멈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선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얘들 때문에 시윤이 영화 못 봤어~"
"이번에 드라마 찍은 거 예고편 나왔어요. 그거 봐요."
"어머 그러니?"
핸드폰으로 검색해본 김선화가 밝게 웃는다.
"어머나~ 너무 이쁘다~"
정연이는 관심 없는척하면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김선화는 핸드폰을 정연이에게 보여줬고, 정연이는 얼굴을 붉혔다.
"이... 이쁘다..."
"그치? 이번 드라마가 시윤이 인기에 힘 좀 얻고 싶었나 보네~“
아빠의 입김을 넘어, 한성의 입김이 들어간 내 배역이다.
평범하게 찍을 수 없는 배역...
나는 모르는 척하는 김선화를 맞춰주었다.
"성인 구미호보다 제 배역에 더 투자한 거 같더라고요."
다연이가 영상을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우와... 꼬리다..., 시유니 구미호였어!?"
"맞아~"
"저번에 인어라면서!"
"가끔씩 땅에 오래 있으면, 구미호로 변해."
"...으응...진짜?"
다연이가 안 믿으려고 하자 나는 삐졌다는 듯이 리액션을 취했다.
"안 믿어?“
내 반응을 보고 조건반사처럼 달려드는 다연이.
"믿어!! 시유니 구미호야!"
"그럼 간식 먹고 수영장 갈까?"
""응!""
가연이도 가세해서 대답하자, 김선화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 그럼 어른들도 가야겠네~"
수업 시간 전, 박지훈이 자신의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안녕."
"습관 어디 안가나 봐, 일찍 다니는 걸 보면."
교실에는 나와 지훈이 밖에 없었다.
나는 의자에 기대며 기지개를 폈다.
"몰라, 아빠가 이 시간에 데려다줘."
"나도 그런데... 어휴..."
가방걸이에 가방을건 지훈이 깍지를 끼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 현대 무술 배우려고."
"종합격투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훈.
"왜."
"여자한테 진다는 게 쪽팔려서 안 되겠어."
"병신, 내가 여자냐?"
"남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문제지..."
"그래~ 뭐 열심히 해라.'
가끔씩 아빠 몰래 너튜브를 통해서 현대 격투를 보지만, 과거의 방식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리고 과거 우리의 싸움 방식은 비효율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싸움 방식이 변한 박지훈을 보게 된다면, 그것 또한 재밌을 것 같다.
또 핸드폰을 킨 뒤, 영상에 집중하는 박지훈을 보았을 때,
박지훈이 생각보다 진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덧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박지훈은 그동안 킥복싱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보통 서울 사립초의 하교 시간은 6시지만. 지훈은 체육특기로 빠지면서 1시에 있는 하교 시간을 선택했다.
오늘도 지훈이는 하교를 하고, 나는 고민수 선생이랑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늘어난 그림 실력에, 고민수 선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고 있었다.
"시윤아 미술 왜 하는 거야?"
"딱히 할 게 없어서?"
"....."
고민수 선생은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한가보다.
"가장 하고 싶은 건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 공세에 나는손을 멈추고 잠시고민했다.
박지훈에겐 목표를 가지라고 했던 나는 정말 뭘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몇 년 전만 해도 우리의 목표는 태백과 S사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지금의 한성은 앞뒤 가리지 않고 S사를 삼키고 있었고,
알아서 무너지고 있는 S사를 굳이 건들 필요도 없어보였다.
결국 내가 가장 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끄덕이며 말했다.
"음... 돈 많은 백수?"
나는 인생을 바쁘게 살아왔으며, 뒤도 보지 않고 달려왔었다.
굳이 제 2의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역시 돈 많은 백수가 최고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아무것도안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민수 선생은 내 대답에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흠... 미술 말고도 다른 걸 해도 상관이 없는 거네?"
"그건 아니죠."
"왜?"
"제가 제일 못하는 걸로 성공하기로 했으니까."
"....."
역시나 그림에 모든 걸 쏟아 부었던 고민수 선생은,
내가 그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듯,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럼... 목표를 앞당겨 보겠니...?"
"어떻게요?"
"1년 뒤에 국제 학생 미술대회가 있는데, 한번 해볼래? 거기에서 금상까지는 '브사' 라는 호주에서 열리는 세계대회에 출품하게 돼. 그곳에서도 상을 받는다면 네 작품이 세계를 돌아다니게 될 거야."
진지하게 말하는 고민수 선생.
나를 키우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나에게 많은 열정을 쏟은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내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분명 욕심도 생길 테고, 젊어서 열정 또한 높겠지...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안 할래요."
"...평화롭게 살고 싶어서?"
"네. 바쁜 건 싫으니까."
고민수 선생은 내가 사용하는 수채화랑은 다른, 유화 물감이 찍혀있는 붓을 들어 캔버스에 찍었다.
"그러기엔 이미 바쁘지 않니?"
"....."
사실 연기를 경험하고 싶어서 찍었던 영화 '좀비'때문에... 할리우드에서도 오디션 초대장이 날아왔다.
전부 거절했지만.
"시윤이는 그림만 그리면... 선생님이 보내줄 수 있는데..."
얼굴부터 화 한번 안 내본 것 같이 선한 이미지가 묻어 나오는 고민수 선생이 들고 있는 붓.
그 붓 끝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이라도 하듯이... 요동치듯 풍경을 그려나갔다.
"주제는요?"
"...자유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리던 그림을 이어나갔고, 고민수 선생도 말없이 내 그림을 수정해 주었다.
나는 국제 대회를 아빠에게 말했고, 아빠는 곧바로 집에 작업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의자에 꼿꼿이 앉아서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찍었다.
몇 번 사용해 봤지만, 수채화 물감과 많은 것이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어떤 감정으로 그렸는지 느끼게 해준다는 붓과 물감.
지금까지 보고 그려왔던 것과 다르게,아무것도 보지 않고 머릿속에 있는 장면을 그렸다.
수채화 물감과 다르게 생각보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줘서 재밌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속도로 물감을 소비했다.
가지고 있던 캔버스까지 빠르게 사라졌고, 그와 비례하듯 그림이 쌓여갔다.
한겨울이 되어, 9살의 막바지를 향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많은 방들 중, 하나의 방에 가득 쌓인 그림.
내가 정리를 위해 버리자고 했지만, 아빠는 내 그림을 버리기 싫어했다.
"어휴... 그럼 팬들 나눠주자."
"오!! 역시 우리 딸! 그럼 그렇게 할까?!"
나는 아빠와 하나하나 정성스레 포장하고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없이, 숫자만 쓰여 있는 캔버스.
내가 유화 물감을 이용해서, 몇 번째 그린 건지 확인하는 숫자였다.
나는 어느덧 10살이 되었고, 이제 곧 여름이 찾아온다는 것을 경고라도 하는 듯이
아름다웠던 꽃들이 힘을 잃어가며, 거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내 몸보다 큰 종이로 감싸진 캔버스를 들고 미술실 앞에 서있었다.
"시윤이니?"
"네~"
"오... 그건 뭐야?"
"음... 생각해 봤는데요... 어느 정도 바빠도 상관없을 것 같더라고요."
고민수 선생은 나에게 국제 대회를 이야기했던 1년 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미술의 재능을 꽃피울수록 더욱더...
하지만 내 말을 들은 고민수 선생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잘난 거 자랑하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하니까."
나에게 캔버스를 받은 고민수 선생,
조심스럽게 포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