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SIYUN - In her brain.
시윤이의 그림을 들고 있는 고민수 선생은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젊은 세대들은 전부 알고 있는 슈퍼스타 김시윤.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도 대부분 저번에 나온, 구미호로 분장한 시윤이었다.
하지만 서울사립초의 교사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눈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 꼬마는, 너무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싶어 하는 그런 '재능'이란 것을, '독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전부 가졌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시윤이는 그림만큼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 한종예를 준비하는, 말 그대로 합격을 하지 못하고 준비만 하는 이들과 겨룬다고 해도 많은 것이 부족한 실력.
물론 미술을 배우는 고등학생들과 비벼도 될 정도의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선생들에게 들었던 재능들에 비한다면...
예를 들어 음악선생이 말했던 대로라면, 시윤이는 음악을 하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또한, 고민수 본인도 시윤이와 미술 하나로 붙자면, 시윤이가 1개의 작품을 그릴 동안 8개를 그려서 그중 랜덤으로 뽑아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딱 1년 전까지만 해도...
부족한 것을 보완해온 시윤.
그리고 유화라는 도구를 만나며, 그 '재능'이란 씨앗을 무섭게 개화하기 시작했다.
"....."
흔들림과 고민이 없는 붓질을 보고 있으면, 시윤이의 평화로움이 무엇인지가 고민수 선생에게도 전해졌다.
평화로운 게 목표인 시윤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원했던 게 무엇인지...
하지만 그림의 전체를 보면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선사해줬다.
어둠... 아니 이것은 물속이다.
과감한 푸른색...
보는 이가 숨을 참아야 할 듯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동시에 보이는 압도적인 풍경들...
물속에서 본 노을은 건물 하나하나를 비추며, 작은 사람들에게도 공평하게 빛이 닿고 있었고.
작은 것 하나 무시하지 않는 그 섬세함은, 시윤이 특유의 그림 습관이었다.
답답했던 그림은 시윤이 특유의 평화로운 붓질로 인해서, 어느새 답답함이 아니라 포근한 거였던 것처럼 자신의 몸을 데워주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은 고민수는 정신을 차렸을 때, 온몸의 피가 멈췄다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이제 고민수는 음악선생에게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이 봤다는, 그 압도적인 재능이 무엇인지 나도 보았다고...
고민수 선생에게 그림을 넘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수채화 물감을 만지고 있었다.
그동안 붓 칠을 연습하면서 표현력도 기르기 위해 시작한 그림.
5일간 몰두해서 완성시킨 그림.
시간을 투자한 만큼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기분이란, 생각보다도 떨렸다.
고민수 선생이 몇 분간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 많이 이상한가? 오버해서 그린 거 같기도... 하루 만에 그렸다고 해야지...'
그때 고민수 선생의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시윤아..."
"...네?"
"역시... 넌... 그림을 해야 한다."
갑자기 고민수 선생이 음악선생처럼 성격이 바뀐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세상에...아니 이건..., 우선 그림 그리고 있으렴. 선생님은 바빠질 거 같으니..."
"...?"
"맞다! 교수님, 교수님 전화번호가..."
중얼거리던 선생은 갑자기 창고에서 천을 가져오더니, 내가 건넨 그림을 엄청 조심스럽게 다루기 시작했다.
"...?"
그리고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
"...?"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잠시 입구를 바라보다가, 수채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민수는 정신없이 차를 끌고 자신의 모교를 찾아갔다.
한국 종합예술대학교, 명성에 알맞게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 그림이 가득한 건물.
고민수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캔버스를 들고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안 교수님!!!"
그림 하나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
화공(畵工) 안준태 화백.
안준태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자신을 안 교수라 부르는 이 때문에 커피를 마시다 깜짝 놀랐다.
얼굴을 확인해보니 자신이 애정 하던 제자 고민수였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이거... 제 제자가... 허억..."
"숨 좀 고르고 말하거라."
조수였던 고민수는 돈을 보고 사립초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아쉬운 결정이지만, 그만큼 탁월한 결정이기도 했기에 말리지 않았던 안준태.
초등학교에서 제자라니... 무엇이 저렇게 급할까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래, 물 한잔하고. 무슨 일이냐?"
"...하압... 이 그림 좀 보세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캔버스를 받은 교수가 천천히 그림을 열어보았다.
"...네 손길은 아닌데... 누가 그린 것이냐?"
"제자입니다."
"...? 초등학생...이라고?"
"예!"
안경을 고쳐 쓴 안 교수는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초등학생이 유화물감을 이렇게 여유롭게 다룬다고?"
"예!!!"
전혀 믿지 않던 안 교수지만, 거짓이라 치부하기엔 자신의 제자의 표정이 심각했다.
"정말인가...?"
"이번 학생국제대회에 출마할 작품입니다!"
안 교수는 캔버스를 조심스럽게 만지며,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대상은 확정이군..."
기대하고 있는 고민수를 쳐다보는 안교수.
"자네 제자를 볼 수 있겠나?"
"예!"
안 교수는 자신의 스케줄을 제쳐두고 고민수를 따라, 서울사립초등학교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오늘 일찍이 나를 데리러 온 아빠를 따라 JSM 본사로 향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 인사하는 드리밍.
"꺄악~! 시윤아~~ 드라마 진짜 재밌게 보고 있어!"
"응."
내가 손을 내밀자 자판기를 누른 것처럼, 자동으로 사탕을 쥐어주는 이들.
드리밍은 고된 스케줄에 당이 부족한지 사탕을 항상 들고 다니는 것 같다.
'아니면 나 때문인가?'
나는 막대사탕을 입에 넣고 아빠의 손을 잡으며 걸어갔다.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를 반기는 장성만.
"삼촌 안녕."
아빠는 학교에서 전화가 왔는지, 잠시 밖으로 향했다.
"시윤아 이거 봤니?"
핸드폰으로 무엇인가 보여주려고 하는 장성만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뭔데요."
장성만이 보여준 SNS엔 내가 뿌린 그림들의 자랑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다음으로 보여주는 사진엔 경매까지 붙어있었다.
"오... 100만 원..."
최소 가격이 100만, 특히 한자리의 숫자가 써져있는 그림과, 내가 그린 아빠의 그림은 압도적인 가격을 자랑했다.
"이야... 시윤이 그림만 그려도 먹고살겠는데?"
물론 오직 그림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저 가격이 붙은 건 아닐 것이다.
저 말도 안 되는 가격은 김지호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그렇다.
내가 영화나 드라마, 외모로 유명해졌어도 항상 김지호의 딸이라는 수식어 붙어 다니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뿌린 건데 팔고 있네요?"
"경쟁률이 2,000 대 1이었으면 저런 가격할만하지 않을까?"
아빠의 팬카페 VIP들은 따로 챙겨주었고, VIP들에게 돌린 그림은 경매장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돈이 궁한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내가 3달간 그린 그림은 고민수 선생에게 준 그림까지 총 137점. 최소 가격으로만 돌려도 1억을 돌파한다.
'와오.'
SIYUN - In her brain 57. 3,560,000원.
알파와 베타를 그렸던 작품이다.
중요한 건 해외에서도 경매가 붙은 것, 특히 최근에 완성한 그림들은 연습했던 것들도 모두 집어넣었다.
퀄리티가 급격하게 올라가기에 가격은 점점 비싸졌다.
"시윤이 그림 잘 그리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저도 몰랐는데요?"
유화물감은 확실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리기 편했다.
수채화도 그만의 매력이 있지만 유화물감이 내 손에 더욱 잘 맞았다.
모든 것을 섬세하게 그리는 나지만, 수채화로는 부족했던 빛 표현이 오히려 특징으로 부각되는 듯이 강조되어 보인다.
아빠는 전화를 마쳤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미술 선생님이 찾는데, 내일 학교에서 보는 게 좋다고 말했어."
"응."
아빠는 장성만을 보면서 말했다.
"뭐 보고 있었어요?"
"지호야 이거 봐봐."
아빠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나랑 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고팔라고 준거 아닌데... 시윤이가 힘들게 그린 건데..."
장성만은 김지호를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지금 다시 사들이려고 하고 있지...?"
"....."
"미친놈아! 그걸 네가 왜 다시 사냐! 네가 자선사업가여?!"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 오바야... 그리고 원래 버리려고 했던 거니까 사지마."
"....."
"대답."
"응."
장성만은 한숨을 쉬더니 그제서야 본론으로 돌아왔다.
"후우... 그것보다 할리우드에서 연락 왔다."
"...네?"
"시윤이 영화 촬영 가능하냐고, 동양인 히어로 넣을 생각인데그 사람의 아역으로."
나는 영화는 이제 지겨워서 고개를 저었다.
"영화, 드라마 안 찍어요. 나중이면 모를까..."
장성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김지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너 크래미 어워드에서 연락 왔다."
가볍게 말한 장성만이지만, 김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시윤이 더 크면."
"부녀가 쌍으로 어이가 없네... 아니 누구는 평생 목표로 해도 힘든걸... 참나..."
아빠는 빌보드를 저격하고 몇 곡의 노래를 냈었다.
그리고 빌보드를 휩쓸었을 때,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변태같이 자신의 노래 순위만 보고 있었다.
잠깐 찍는 예능이나, 뮤직비디오, 브이로그로 근황을 밝히는 아빠.
"나 미국에 놀러 가고 싶긴 한데."
"아..."
"다연이네랑 같이."
"그... 그럼... 그럴까?"
"응."
뒤에서 장성만이 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연신했다.
내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반에서 고민수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
"시윤아! 담임 선생님에겐 말해놨단다, 미술실로 같이 가자."
"...왜요."
고민수 선생의 손길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자 나를 발견한 노인이 경악하고 있었다.
"너는... 아역배우 김시윤 맞니?"
"...? 보면 몰라요?“
대답을 들은 노인이 고민수 선생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저 아이 원래 저런 성격인가?“
"예, 교수님... 이해 좀 부탁드려요..."
나는 고민수 선생의 손에 이끌려 미술실로 향했다.
"가방... 무거운데..."
고민수 선생이 내 가방을 받아들더니, 내 자리에 걸어둔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
나는 멀어져가는 고민수 선생님을 봤고, 그런 나를 바라보던 노인.
"이 작품이 네 것이... 맞지?"
노인은 경매에 오른 내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나는 오른쪽 밑의 숫자를 가리키자 내 그림을 확인했던 노인이 끄덕였다.
"세상에... 137번 만에... 그런 걸 그렸다고..."
"할아버진 누군데요?"
"안준태란다. 나를 모르니?"
나는 스쳐 지나간 이름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 '빛이란 무엇인가'책 맞죠?"
노인은 화백이나 화공이 아닌 책으로 자신을 기억하는 내 모습에, 내가 미술인들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크흠... 혹시 그림 하나만 그려줄 수 있겠나?"
"지금요? 갑자기?"
"그래... 도구는 내 것을 쓰거라."
노인은 자신의 물감과 캔버스를 가져왔다.
같이 들고 온 나무통 안에 있는 물감.
아빠가 사주려고 했던 브랜드였다. 각 색마다 최소 10만 원이 들어가는...
돈 지랄이라 생각했던 그 유화물감.
돈에 민감한 나는 물감을 하나 집었다.
"뭔지 알고 있니?"
"아빠가 사주려고 해서 필요 없다고 했지만, 이게 뭔지는 잘 알죠."
"마음껏 사용해도 된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로 되어있는 팔레트를 들었다.
무거워서 의자 위에 두려고 하자, 노인이 거치대를 설치해줬다.
딱히 무엇을 보지 않고도 바로 붓으로 찍어 내리기 시작하자,
언제 설치를 했는지 노인이 뒤에서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내 그림에 집중했다.
"그... 부담스러운데 촬영 장비만 두고 나가주실래요?"
"아! 당연히 그래야지."
노인이 밖으로 나간 이후에, 나는 다음 그림으로 생각해두었던 그림을 그려나갔다.
과거 태백의 밑에서 용병을 다니고 있을 때, 만났던 여인.
내 어눌하고 무식한 영어 단어에도 웃어주었던 순수했던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와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마피아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했던 그 여인...
미안하고, 또 미안하지만 그녀를 생각할 틈도 없이, 내 주변 인물 사람들이 죽어갔고 나는 잊고 싶어서 더욱더 바쁘게 살아왔다.
물론, 후에 복수라는 허무한 짓이라 생각했던 일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허무하지 않았었다.
모두 잊어도 '에이미 엘런'이란 여성을 잊기란 쉽지 않았다.
나처럼 작았던 키, 동양인인 나를 색안경 없이 봐주었던 여성.
어느날, 잠시 나갔다가 온다더니 너무나도 허무하게...
싸늘한 주검으로 내게 돌아왔었다.
찬란하게 반짝이던 보석 같은 흑발.
뜨거웠던 그녀의 빨간 입술, 커다란 검은색의 눈망울, 눈 밑의 점, 새하얀 피부까지 싸늘하게 변한 그녀.
환생하고 나니, 더욱더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마치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눈물로 인해 흐릿해진 그녀가 백합 속에 있었다.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품은 채, 흐릿하게 '138'이라는 숫자를 밑에 그려 넣었다.
기지개를 펴자 어느새 시간이 6시를 가리켰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둘.
"...? 그러고 있었어요?"
고민수 선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방금 돌아왔단다."
나는 고민수 선생을 바라보다 뒤에서 아빠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 물감 잘 썼습니다. 교수님, 그림은... 음... 가지세요. 물감 값이에요."
나는 기다렸던 이들을 지나쳐 아빠에게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