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학년.
나는 학생 회장이 되어, 학생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회장이라는 빌미로 나에게 흑심을 품고 만남을 요청하는 각종 동아리의 꼬맹이들.
시도 때도 없이, 개인 면담을 이용해 나에게 고백을 해댔다.
아무도 없는 시간, 학생회실에 한숨이 퍼졌다.
"하아..."
부회장 지영이가 내 눈치를 보고 있었고, 옆에 있던 박지훈이 비웃는다.
"와... 시윤이 회장되니까 하루 평균 3번씩 고백 받아... 대박..."
"그중 한 명은 32번 엌, 나무도 그 정도 찍으면 고냥 넘어갈 듯, 너도 그만하고 이제 받아줘~ 킄킄"
스팡! 소리와 함께 박지훈에 턱에 주먹을 꽂으려 했지만, 박지훈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와... 너 때문에 요즘, 프로 유망주들 주먹도 가볍게 피하는 거 알긴 하냐?"
"하아..."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런 장면이 익숙한 지영이가 자신의 눈을 가렸고, 나는 자연스럽게 팔을 걷어 올렸다.
"오지 마..."
내가 머리를 넘겨 대충 묶으려고 하자 지훈이 외쳤다.
"머리 묶지 마!!"
내가 체육복 바지를 꺼내서 치마 아래로 입는 모습을 본 지훈이 무릎을 꿇었다.
"미안... 하지 마..."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들리는 지훈이의 한마디.
"아아아앙, 구라띠~~~"
그날 지영이는 사람이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링 위에서 박지훈과 마주 보고 있다.
내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박지훈의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여자애를 어떻게 맨주먹으로 때리냐고, 장비를 끼면 나를 패주겠다는.
나는 서울 사립초에 링이 왜 있나 싶었지만, 궁금증을 뒤로한 채 보호 장비를 찼다.
지훈도 글러브를 착용하더니 나한테 손을 까딱였다.
시윤이는 처음 껴보는 글러브에 불편함을 느끼며 지훈의 손짓에 다가가자 지훈이 잽을 날린다.
시윤이 가볍게 피하며 피식 웃자, 지훈은 어색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달아오르기시작한 듯 했다.
그런 지훈을 보며 말하는 시윤.
"그게 격투 기술이냐? 너무 느린데?"
지훈이의 펀치는 생각보다도 빨랐지만 거기까지, 시윤이에게는 느리게만 보이는 지훈이의 주먹.
시윤이는 가볍게 피하더니, 지훈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하지만, 맞았음에도 전혀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는지 비웃는 지훈.
"에에엥? 친 거 맞아?"
시윤이는 이마에 핏줄이 서는 것을 느꼈고, 지훈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빠르게 주먹을 날렸다.
지훈은 지금까지 스파링을 해본 적이 없는 시윤을 상대로,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지훈이의 빠른 스텝과 잽을 피하느라, 시윤이 정신없어할 때,
지훈이가 글러브로 시윤이의 시야를 가리고, 얼굴에 훅을 꽂았다.
퍼억!
주춤한 시윤이의 복부에 주먹을 꽂는 지훈, 시윤이가 고개를 숙이자 그대로 어퍼컷을 꽂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시윤이가 쓰러졌다.
한 손을 들고, 승리의 제스처를 취하는 지훈이의 두 눈엔 감격이묻어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저 괴물을 처치하였도다..."
그리고 쓰러져있던 시윤이가 정신을 차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지훈이는 불안한 마음에 시윤이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규칙... 알지? 한번 다운되면 끝인 거..."
말없이 천천히 글러브를 벗기 시작하는 시윤이의 코에 쌍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 시윤이가 상대방을 조지기 전에 보였던 눈빛...
지훈은 자신에게 그 눈빛이 향하고 있음을 알았고, 자신은 이제 X됐음을 느꼈다.
나는 운동 좀 한다고 다시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지훈이를 상대하며, 지훈이의 주먹을 피하고 있었다.
갑자기 글러브로 내 시야를 가리고는 올라오는 펀치.
세상이 느려지듯, 지훈이의 주먹이 보였지만, 내 몸이 눈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번 주먹은 안면에 허용하되, 다음 타격으로 지훈이를 조지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몸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한 번도 주먹을 맞아본 적이 없던 이 몸, 턱을 맞자마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올라오는 지훈이의 주먹.
복부를 맞으니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이어 지훈이의 어퍼컷을 맞자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닥과 가까워지는 시야를 느끼며 기도했다.
'아... 신이시여, 저 족같은 어린 양을 곧 보내드릴 테니, 막을 테면 막아보시옵소서...'
나는 잠깐의 기도를 하고 눈을 떴다.
절대 걸어서는 부모님의 얼굴을 못 보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내가 글러브를 벗으며 다가가자, 지훈이는 급하게 내 다리를 잡고 빌기 시작했다.
"형님!!!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저 재형입니다 형님!!!"
내가 지훈이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리려고 하자, 지훈이가 더욱 달라붙었다.
"형님!!!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저 불구 되면 엄니 어떻게 봅니까아!!!!"
"....."
나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지금 지훈이가 저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온몸의 뼈를 뒤집어서 다른 곳에다 맞춰줬을 것이다.
그래, 21세기에서 그건 좀 아니지.
내가 끄덕이자, 지훈이는 자신을 용서한 줄 알고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그대로 지훈이의 관자놀이를 엘보로 내리찍었다.
그대로 기절한 지훈이를 두고, 나는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확인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얼굴.
코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만져보니 뼈를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옷에 튀지 않도록 킁 하고 코피를 살짝 뿜어낸 다음, 인증 사진을 남겼다.
만약 지훈이가 또다시 덤빈다면 이 사진을 보여줄 생각으로.
그리고 코피를 닦은 뒤, 코에 휴지를 꽂았다.
학생회실에서 총무 역할을 하던 지영이가 끙끙 거리고 있었고,
나는 지영이가 고민하는 자료를 슬쩍 보고는 빠르게 처리하고 돌려주었다.
"와! 역시...우리의 회장님!"
"배고프다 매점 갈까?"
"나도 배고픈 거 같아."
박지훈은 구석에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럴 거면 왜 덤빈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코에 있는 휴지를 뽑은 뒤 말했다.
"따라와."
"넵!"
내가 회장인 걸 알고 있는 꼬맹이들이 길을 비켜주는데, 이 홍해의 기적은 초등학생 1학년 때부터 있었기에 익숙했다.
"시윤아 안녕~"
나에게 인사하는 아르바이트생.
"네~ 안녕하세요."
박지훈은 몸이 꽤 커졌지만, 아직도 자신의 몸만큼 먹는다.
한참을 포스기에 찍어내던 아르바이트생이 바구니를 건넸다.
지훈이 바구니를 정리하러 간 사이에, 나는 딸기 우유만을 들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훈이는 피자 빵을 데우러 갔다.
내 앞에서 크루아상을 먹던 지영이가 말했다.
"중학교는... 어디로 갈 거야?"
"난 일반 중학교 갈 거 같아."
"나도 같이 가고 싶다... 힝..."
"왜? 부모님이 정해줬어?"
"응..."
지영이는 '소드 마스터'의 딸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하면 되지~"
어느새 지훈이가 오더니 빵을 먹기 시작했다.
"너 다시 키 크는데 불붙은 거 같다?"
지훈이는 다시 나와 머리 반개 정도의 차이가 났다.
"무조건 큰다... 180 이상으로..."
"그래, 쑥쑥 커라."
지영이가 빨대가 꽂힌 우유를 쪼옥 하고 빨다가 나에게 물었다.
"맞다, 이번에 수학여행 건 어떻게 했어?"
학생회장의 권한이 생각보다 커서, 수학여행 장소를 최종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쉬운 일처리를 위해 각반 반장들을 시켜서 원하는 곳을 적으라고 말했다.
학교 업무와 관련된 내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벌점을 줄 수 있다는 게 참...
이래서 권력을 원하나 싶었다.
2일전 점심시간에 방송을 틀었다.
-"5분 뒤 학생회장의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지영이의 목소리가 울렸고, 방송부 담당 선생님이 긴장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일단 단정한 자세로 시작했다.
이 방송은 식당, 복도, 모든 교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방송이 켜지자마자, 답답하다는 듯이 넥타이를 풀었다.
정면에서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는 선생님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안녕~ 너네들이 뽑은 학생회장이야. 귀찮으니까 빠르게 전달사항 말해줄게, 수학여행은 4학년부터 가는데 학년마다 다르게 정하는건 알 거라고 믿고, 행선지 정하는 방법을 말할 거야."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귀찮다는 듯이 의자에 기대며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정하는 법은 간단해, 각 반 반장들 어디로 수학여행 가고 싶은지 투표해서 학년 대표한테 보내, 무조건 과반수에 따를 거야."
나는 손톱을 정리하다가 입 바람으로 후하고 분 뒤, 카메라를 쳐다봤다.
"이제 3가지 주의사항 말해줄게."
카메라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
"하나, 선동하지 마, 우리 반은 어디다! 이런 거 없어, 신고 들어오면 그 반 투표 지우고 반장 자격 박탈한다."
"둘, 우주, 아스가르드 행성, 소환사의 협곡 이딴 거 적는 애들 반장이 알아서 걸러, 그 투표용지 학생회까지 넘어오면... 반장 자격 박탈한다."
"셋, 내일모레 점심까지 모든 투표 가져와, 투표 안 한 친구 사유서 적어서 학년 대표한테 보내, 만약 누락된 친구 있으면 반장 자격 박탈한다."
나는 카메라를 보고 씩 웃었다.
"반장님들 고생해 줘~"
그리고 꺼지는 화면.
그날 점심시간, 서울 사립 초등학교는 몇 초간 아무 소리 없이 조용했다.
난 학생회장실에 자리하고 있는 학년 대표와 부대표들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네!""
"정리해서 가져왔다 손."
1,2,3학년 대표는 구경을 하고 있었고 4,5,6학년 대표가 전부 손을 들었다.
"오~ 역시, 많이 좋아졌어 다들 고생하네~줘봐."
나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4학년 압도적으로 두바이네? 뭐야? 아랍어 가능해?"
"아랍어 가능한친구는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비용은 260만 ~ 300만 원 생각하고. 추후에 선생님들 통해서 공지할게"
"네!"
나는 5학년의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가지가지 하네... 이집트는 뭐냐, 너네 가서 뭐 스핑크스랑 퀴즈풀고, 아누비스랑 악수라도 해보게?"
"".....""
"야 6학년 줘봐."
나는 똑똑해 보이는 꼬맹이가 주는 표를 받았다.
"오... 역시 한국이 최고지... 제주돜 아핰, 거 마음에 드네 아주 칭찬해. 스핑크스보다는 돌하르방이지."
나는 가져온 표를 정리한 뒤에, 선생님에게 보고했다.
제주도를 보고 나를 의심하는 선생.
"? 왜요."
"아니다..."
나는 청렴, 결백하다.
다만 1주 정도 아이들에게 대놓고 제주도를 가고 싶다며 돌아다녔을 뿐이다.
아이들이 선택했을 뿐, 절대로 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학년과 가격대를 맞추기 위해, 굳이 우리는 제주도행 크루즈를 타야했다.
날씨도 화창하고 바람도 솔솔 불어서, 수평선을 보고 있으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하얘지는 선크림을 가득 발라서, 내 얼굴은 크루즈의 색과 비슷해졌다.
"와... 세상 엄청 좋아졌네."
박지훈이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 구경을 하고 있는 내 옆에 섰다.
"그러게, 배타면 멀미 심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크지도 않네."
"오! 돌고래?"
나는 박지훈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아아아앙~ 구라띠~"
"...?"
"...죄송합니다."
"그래."
그때 진짜로 멀리에서 돌고래가 튀어 올랐다.
"어? 돌고래!"
내가 손으로 돌고래를 가리키자, 박지훈이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고,
나를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구라즐."
나는 머리에 핏줄이 서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박지훈을 쳐다보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 개새끼 구라는 지가치고, 나를 의심하네...? 하하."
"...형님?"
수면 위를 뛰어오르는 돌고래 무리들 사이로, 키 큰 남자아이를 패고 있는 여자아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아빠가 챙겨준 챙이 넓은 하얀 벙거지 모자를 착용했다.
모자를 누르면서 쳐다본 하늘...
수평선 위에 그늘이 지듯,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 있으며,
약간의 바다내음과 함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완벽한 날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멀리서 몰래 지켜보는 아빠만 없었다면 말이지...
저번에 수학여행으로 호주를 가게 되었을 때도 아빠는 따라왔다.
아빠는 항상, 스스로 몰래 따라온다고 생각하지만, 시선만 돌리면 사람들이 몰려있는 게 보인다.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켰다.
-"응 시윤아 아빠 바쁜데 무슨 일이야?"
"그래, 사람들 상대하느라 바빠 보이긴 하네..."
-"...으응?... 무... 무슨 소릴까..."
"아빠 딸내미 창피해, 이젠 민망해지려고 해."
-".....미안..."
"어느 부모님이 자식 수학여행을 따라오냐고... 나 이제 13살인데..."
-"걱정돼서... 그랬지..."
"같은 지역에 있는 정도로 만족하고... 멀리 가..."
-"응..."
나는 전화를 끊고 뭔가 들떠있는 지훈이를 쳐다보았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뭐하냐?"
박지훈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술 가져왔어."
"진짜?!"
"쉿!"
"캬하핳, 쉐끼 마음에 드네, 역시 내 부하다. 시윤 생에 처음으로 마셔보겠구먼."
차마 초등학생 6학년이 술을 가져왔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한 선생들.
우리는 프리패스였다.
이런저런 체험학습을 하며, 밤은 빠르게 다가왔고. 나는 사람들 몰래 잠옷 차림으로 지훈이와 만남을 가졌다.
"으흐흐흣."
"후후...후훗."
소주 한 병과 작은 양주들이 가득하다.
"하하핳핳하핳하."
"킄...크킄...아핰"
우리는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소주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주를 까서 종이컵 가득 따랐다.
"형님... 먼저 드시지요."
"그래, 재형아... 네 덕에 호강을 하는구나,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같으니... 같이 하자꾸나."
"예, 형님!"
지훈이와 나는 잔을 부딪히고, 서로 소주를 꿀꺽꿀꺽 넘겼다.
"캬!!....."
"형님?"
"....."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