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폭풍전야.
기말고사를 끝내고, 어느새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나는 방학동안 해외를 포함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아빠의 공연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방학의 막바지.
나는 지금 지수 이모와 피시방에서 ROL을 하고 있었다.
왜 둘이서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거냐면, 지하에 JSM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윤아 아니... 거기... 아... 아니야 잘했어..."
"...나 안 할래..."
"아니야!!! 이모가 미안해."
지수 이모는 빠르게 마우스를 놓고, 나를 달래주었다.
진짜 모든 게임을 잘하는 지수 이모는, 연예인을 하지 않았다면 인터넷 방송으로 떴을 것이다.
나랑 게임을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말이 줄어드는 지수 이모.
나에게 뭐라 하지도 못하는 표정이 안쓰럽고 착잡해 보인다.
나는 3번째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바로... 자기 비하.
"...난 너무 멍청해... 아이디 지워야겠어... 민폐야..."
"시윤아~ 괜찮아~ 재밌으려고 하는 거지!!"
"진짜...?"
내가 지수 이모를 올려다보니 지수이모가 내 머리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이모가 더 열심히 해볼게!"
역시 내 비장의 카드는 늘 먹힌다.
그때 지은 이모가 피시방에 도착했다.
"안녕, 안녕~"
밝은 톤의 목소리가 울렸고, 나는 지은 이모를 봤다.
"이모는 결혼안 해?"
"...갑자기?"
"나이가 서른 셋이면... 슬슬 결혼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난 혼자가 좋아... 그리고, 너... 내가 33살에 결혼하는지 두고 볼 거야."
"음... 쏴리."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급하게 나이를 먹는 이들.
지수 이모는 어느새 계란 한 판이 되어있었다.
커다란 눈으로 힐끔 메시지를 보던 지수 이모가, 우리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쓰자, 갑자기 핸드폰을 잡더니 옅은 미소로 문자를 날렸다.
조용해진 방음부스 안.
지수 이모는 천천히, 그리고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며, 우리 둘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확인하자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박지훈도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지수 이모의 핸드폰을 뺏었다.
팟!
"시윤아 안 돼!!!"
나는 빠르게 도망치면서, 기억하고 있는 번호로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메신저에 적혀있는 이름은...
현재 무게감이 있는 분위기를 풍기며, 느와르 영화에 재벌 역할을 자주 맡는 유수아 배우였다.
길게 적힌 문자, 하지만 내 두 눈엔 그 중간에 있던 '사랑해' 단 3글자가 보였고.
지수 이모가 방금 적은 '나도'가 있었다.
Oh my god...
내가 사랑했던 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이 쓰린 가슴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감정... 오랜만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 핸드폰을 지수 이모에게 건네주었다.
내 동체시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수 이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가 자신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봐... 봤어?"
"응."
지은 이모가 빠르게 나한테 다가오더니 물어보았다.
"뭔데 뭔데!?"
지수 이모는 나를 보며, 조용히 두 손을 모아 빌면서 눈빛으로 제발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다.
"시윤아 먹고 싶은거 있니? 우리 데이트할까?"
"후후후... 투쁠 한우?"
"지금 먹으러 갈까?!"
"그럴까?"
지수 이모를 보낸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그래서, 쓰린 가슴과 함께 투쁠 한우가 땡겼다.
지수 이모는 자연스럽게 아빠한테 전화해서, 나에게 밥을 사줘도 되냐고 물어보고 허락을 맡았다.
드리밍은 이제 해체되었지만, 개개인의 인기는 말할 수 없이 높았다.
나로 인해 오랜만에 모이게 된 드리밍.
"시윤아!!!"
가장 어린 유아가 나를 껴안았다.
""와~ 엄청 컸다~!""
다들 지수 이모만 만난다고 서운해할법하지만, 게임을 즐겨하는 이모들이 없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1년에 2번씩은 아빠와 같이 꼭 만난다.
지은 이모랑도 오랜만에 보는지 다들 웃으면서 지은 이모에게 안겼다.
키가 작은 지은 이모라, 안긴 듯한 모양새였지만.
아빠가 나를 데리고 자주 가던 소고기 집에서, 기다리던 음식이 나왔다.
아빠가 없다고, 바로 술을 마시는 이모들...
나 혼자 앞에 사이다가 놓여 있었지만, 나는 꾹 참았다.
그때, 요즘 해외에서 활동하는 멤버 중 한 명인 리제가 말했다.
"시윤아~ 좀 마셔볼래?"
지수 이모가 급하게 말리려 했고, 나는 안 먹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왜?"
"저번에 6방울 마시고 기절했어."
"에이..."
"보여줄까? 진짜 엄청 신기해."
"...진짜?"
나는 소주잔을 쳐다봤다.
"응,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해볼까?"
다들 궁금하긴 했는지, 나를 말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말렸어야 했다.
기절하지 않고 만취한 시윤.
그런 시윤이를 연약한 이모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상황은 이미 늦었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아빠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윤아 괜찮아?"
내가 눈을 떠보니 이곳은 JSM 본사였고.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이모들...
머리가 엉망이었다.
"이모들 머리가 왜 그래 아핳."
"".....""
나는 머리가 가벼움을 느끼고, 무언가 허전해서 머리카락을 만져보다가 경악했다.
머리카락의 반이 사라졌다.
"!!!!!"
내 엉덩이까지 오던 찰랑거리고 긴 머리카락 중, 왼쪽 부분만 잘려서 머리카락의 끝이 어깨 선에 닿았고.
잘리지 않은 부분은 여전히 엉덩이 선에 닿아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걸리적거린다며, 고기 자르는 가위로 잘라버렸다는 것...
"세상에..."
내가 경직된 자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다들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비교하면 안 되기에, 취한 나를 여기에 있는 연약한 이모들이 날 잡을 수 없었다.
덥다고 옷을 벗고는 보이는 소주잔에 담긴 소주를 들이켰다가, 그대로 기절했다는 게 끝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허탈한 표정을 지었고, 다들 걱정하기 시작했다.
"내 머리... 힘들게 길렀는데..."
아빠에게 혼날까봐 한 연기였지만, 다행히 아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시윤아, 지금도 엄청 예쁜걸?!"
"나... 내일 학교 어떻게 가...?"
아빠는 괜찮다고 웃으며, 나를 차에 태우고 JSM 소속 스타일리스트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결국 나는 쇄골에 닿을 위치까지 머리를 커트했다.
근데 생각보다 많이, 엄청많이 어울린다.
좀 더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스타일.
내가 장난스럽게 와이셔츠의 아랫단을 푼 뒤 묶자, 몸매가 강조되었다.
우리 엄마에게는 없는 가슴이 있기에, 감탄이 나오는 예쁜 몸매
"아빠!"
새하얀 일자 복근을 밖으로 내밀고 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아빠가 경악하면서 달려오더니 내 옷을 다시 여몄다.
"너... 그러지 마...!"
"완전 섹쉬했지?"
"14살이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럼 15살 때는 가능?"
"하아..."
나는 한숨을 쉬고 있는 아빠에게 말했다.
"이모들한테 뭐라 한 거 아니지?"
"응..."
"잘했엉 뭐라고 하지 마. 아빠였어도 나 못 말렸어."
아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날아다녔다는데?"
"그거 아마도 진짜일걸?"
"에이..."
나는 처음 해보는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머리를 흔들자 아빠가 웃었다.
"예쁘다."
나는 감성에 젖은 아빠의 진심이 담긴 말에 대답했다.
"알아."
아빠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으러 샤워실로 들어갔다.
허전한 뒷머리가 너무나도 어색하다.
45년을 투블럭으로 살았으면서, 근 14년을 긴 머리로 살았다고, 어색함을 느꼈다.
평소보다 들어가는 샴푸의 1/3을 사용해야했지만, 습관이란 게 무서운 게 평소대로 꾹 짰다가 거품 목욕을 해야 했다.
씻고 밖으로 나와서 드라이기로 말리자, 머리가 짧아져서 확실히 빨리 마른다.
'이래서 다연이가 단발만 하는 거였군.'
나는 잠옷을 입고 아빠와 마주 봤다.
"어때?"
아빠는 내 단발을 만지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쁘네..."
"진짜 이쁜 거 맞아?"
"그러엄~ 엄청 이쁜데?"
아빠가 어색하게 웃은 이유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단발이 되어 거울을 본 나는, 단발머리를 하던 엄마와 너무나도 닮았다는 걸 느꼈다.
거기에... 22살에 나를 낳다가 사고가 난 엄마는 지금의 나와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아빠는 한참을 나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걸 숨기고 싶다는 듯이.
나는 그런 아빠의 마음을 파악하고, 아빠를 보며 말했다.
"먼저 자러 갈게~"
"응."
나는 습관대로 머리가 걸리지 않게, 눕기 전에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단발이란 것을 깨닫고 그냥 누웠다.
그리고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지호는 자고 있는 시윤이를 두고, 혼자 2층 방에 들어갔다.
시윤이가 큰 뒤로 잘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청소는 1주에 한 번 이상씩 꼭 했다.
오랜만에 열어보는 벽에 있는 수납공간.
그곳에 각종 트로피들이 가득했다.
김지호는 그리운 아내의 사진을 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시윤이 크면 클수록 자기랑 너무 똑같아지더라..."
그곳에 있는 여성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사진의 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미안해... 나, 진짜로 행복해."
김지호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고였지만, 활짝 웃고 있었다.
바쁘기도 했고 중간에 기억조차도 나지 않는 하루가 지나가며, 아침이 찾아왔다.
내가 일어나야 할 시간만 되면 정확하게 깨우는 알파와 베타.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자고 있는 아빠를 깨우러 갔다.
방에 없는 아빠, 어디에서 자고 있는지는 뻔했다.
아직 시간이 여유로워서 핸드폰을 켰다.
(나) - 이모, 응원할게, 유수아 배우님 창창하더라.
나는 핸드폰을 끄고 라면이나 끓여먹을 생각을 했지만 곧바로 문자가 왔다.
(지수 이모) - 시윤아!!!! 진짜 비밀이야! 말하면 안 돼.
(나) - 아빠한텐 괜찮지 않을까?
(지수 이모) - ㄴㅇ,ㅣㅂ[;ㄴㅇㄹ맨ㅇㄹㅂ 하지 마!!!
(나) - ㅋㅋㅋㅋㅋ 해야디~
나를 애타게 찾는 지수 이모를 두고, 아빠를 깨우러 위로 올라갔다.
역시나 엄마 방에서 자고 있는 아빠.
나는 피식 웃으며, 아빠의 머리를 쓸었다.
"아빠."
얼마나 울었는지 예상이 될 정도로 눈이 퉁퉁 부어있는 아빠였다.
내 말에 눈을 뜨기 시작한 아빠.
"일어나 밥 줘."
"응... 잘 잤어?"
내 팔을 잡아당겨 나를 눕히더니, 한 번 꼬옥 안고는 아빠가 일어났다.
"일으켜주지? 눕혔으면."
나는 아빠를 깨우고 난 뒤, 다연이랑 한강에 놀러 가기 위해서 옷을 입고 있었다.
아빠는 하품을 하며 요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아빠에게 장난칠 생각에.
다연이가 사준 여친 룩의 치마를 극한으로 올렸고, 엉덩이 선까지 올라간 치마.
그 위를 옷으로 덮으니 완벽하게 테니스 치마가 되었다.
"와... 똥꼬 보일 듯..."
건강미가 돋보이는 하얗고 길게 뻗은 새하얀 다리가 강조되었고, 나는 가슴 앞 단추를 속옷 근처까지 풀었다.
거울을 보자 완벽했다.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아빠를 위해, 내 전매특허 트월킹을 하기 전 자세로 냉장고에 손을 얹자.
싸늘한공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돌아보니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며, 일본의 갸루 같은 내 모습에 경악했다.
나는 아빠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어때."
밖으로 나가기 전에 오랜만에 아빠에게 회초리를 맞았고.
치마를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야했다.
"이건... 아니잖아, 벗겨지겠다..."
"너... 또 그런 짓 하기만 해 봐."
내가 먼저 준비가 끝난 거 같아 다연이를 부르기 위해서 문을 열자.
타이밍이 맞았는지, 다연이와 마주쳤다.
나는 아빠에게 맞은 엉덩이가 아직도 아려서, 어루만지고 있었고 다연이는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시... 시유나... 머... 머리..."
"응? 이쁘지?"
원래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면 더 이뻐 보인다고 했던가.
내 시선에서 본 얼굴은 굳이 비교하자면... 진짜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인형 같았다.
머리가 길었을 때는 눈웃음이 어울리는 청순한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고, 무표정이 어울리는 차도녀 같은 이미지가 되었다.
내 단발머리는, 단발머리 여성의 최대치를 보여주듯 지나치게 어울렸다.
그리고 내 평소 이미지와도 잘 어울렸다.
"우와... 진짜... 이쁘다..."
"그치? 귀찮아서 잘라버렸어."
"아까워..."
다연이가 내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아~ 2년 정도 뒤면 그만큼 자라겠지."
"응!"
밖으로 나가자 김태오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저 꼬맹이는 나를 안 좋아하는 척하면서 자꾸 내 눈치를 본다.
이미 다연이랑 나는, 김태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본심도 알고 있는 다연이지만....
그럼에도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럴수록 나는 박지훈을 챙겨야 했고, 박지훈도 이 사정을 알고 있기에 잘 받아줬다.
입구에서 김태오랑 같이 기다리던 박지훈을 마주치니, 수술로 그나마 커진 작은 눈이 오랜만에 더욱 크게 떠졌다.
"뭐야! 머리 왜 그래?"
"네가 존나 만져서 더러워서 잘랐어."
"뭐래 병신."
"...?"
"지가 먼저 해놓고 또 정색하는 거 봐!!"
박지훈은 내 옆으로 오더니 짧아진 머리를 만졌다.
"꺼져 새끼야."
그대로 박지훈의 무릎관절에 카프킥을 꽂으니, 빠악! 소리와 함께 데미지를 입은 박지훈이 휘청였다.
"시발, 배운 기술 나한테 쓰지 말라고!"
"너한테 쓰려고 배우지 누구한테 쓰냐?"
"...그런가?"
다연이는 자연스럽게 벙거지 모자를 썼고, 나는 마스크를 썼다.
단발머리가 된 나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끼며, 한강 공원에 앉아있었다.
"크... 날씨가 기가 막히네. 근데 밥은 언제 먹어?"
"너 새낀, 날씨 얘기하다가 말고 바로 밥으로 가냐? 어이가 없네."
어차피 이곳은 나랑 다연이가 떠들면서 먹기 위해 온 곳이었다.
박지훈은 빠르게 배달어플로 주문을 하더니, 김태오랑 대화를 나눴다.
잠시 깔아둔 돗자리에 눕자 다연이가 말렸지만, 나는 그냥 누워서 시간이 멈춘듯한 파란 하늘을 봤다.
결국 나를 따라서 눕는 다연.
다연이도 생각보다 해방감을 느끼는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