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비 온 뒤 땅은 굳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다연이를 안고 있다가, 다연이와 눈을 맞추고는 말했다.
"다연아 왜 울어? 응?"
"아니야..."
"왜 그래에... 말을 해줘야 알지..."
내가 다연이를 올려다보니, 다연이가 내 눈을 피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연이의 눈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눈물.
"태오가... 좋은 거야...?"
"뭐?! 내가 미쳤어? 걜 내가 왜?"
"하지만... 봤단말이야..."
"어떤 걸? 걔가 고백한 거?"
"응..."
"그러면 뒤에 내가 한말은 못 들었어?"
다연이가 촉촉해진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
"하아... 나는 다연이가, 내가 태오한테 한 말 때문에 충격 받은 줄 알았어..."
"거짓말..."
나는 다연이를 앉히고는, 나도 바닥에 앉았다.
"내가 다연이한테 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해?"
"그럼 방금은... 나를 찾다가 왜 태오랑..."
"너 사라져서 급하게 찾고 있었는데, 계속 붙잡잖아 짜증나게"
"그래도..."
나는 다연이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뿌리치는 것도 못 본거구나... 하아..."
"....."
나는 다연이를 설득하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보여줄 증거도 없었고, 답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돌려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연아, 일로와 봐."
"응..."
나는 다연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항상 내가 더 컸었는데... 이젠 다연이가 더 크네..."
"...응."
나는 다연이에게 살짝 기댔다.
"울지 마... 다연이가 울면 미칠 거 같아."
"....."
"다연이 우는 모습 보고 진짜 아찔했어... 정신을 차리니까 다연이가 없더라고... 그래서 3학년 교실을 쥐 잡듯이 뒤졌다?"
"....."
"돌아가면 혼날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 밑에서 다연이를 발견해서 안도했는데... 울고 있어서... 진짜..."
"...미안."
"아니야, 나는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손잡고 있으니까 안심이 되네."
다연이는 내 말을 들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한테서 멀어지지 마... 다연아. 난... 다연이 없으면 못 버텨..."
"미안해... 나도... 나도 그런데... 미안해... 시유나..."
나는 잠시 다연이 얼굴을 쳐다보고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아주었다.
"아니야, 자꾸 다연이가 왜 미안해? 내가 확신을 못 줘서 그렇지, 김태오가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줄까?"
"....."
다연이가 말이 없어서 나는 천천히 기억을 되살리며 말을 꺼내려고 했다.
"아니야, 시유니 믿어."
나를 보며 끄덕이는 다연이, 나는 미소를 보여주고는 바닥을 보며 정색했다.
"김태오 하나 때문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네 새끼..."
"그러지 마아..."
"김태오... 개새끼... 죽일 거야."
"어?! 안 돼!!!"
한참 동안 다연이랑 대화를 하던 나는, 우리 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선생을 쳐다봤다.
망가진 문을 바라보는 선생님... 다연이가 일어나기에 나도 일어났다.
"누가 그랬니?"
"제가요."
나는 학교에서 골칫덩이로 자리 잡았나 보다.
역시나...라는 표정을 짓는 선생.
"하아... 왜 그랬어?"
"죄송합니다. 다연이가 자살하려는 줄 알았어요."
내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는 선생이다.
다연이도 크게 놀라하며, 갑자기 내 눈치를 봤다.
"제가 오해한 거였어요, 혼자 슬픈 일이 있어서 그런 건데... 처음 보는 모습이라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친구를 도와주려고 그런 거구나..."
"네."
"그래... 혹시 더 있을 거니?"
나는 다연이를 바라봤고, 다연이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제 괜찮아요."
나와 다연이는 선생을 지나치며,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악동처럼 웃었다.
김태오는, 그날 이후 나에게 말을 섞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기에, 공부에 집중하는 꼬맹이들.
다연이와 김태오, 박지훈도 꽤나 열심히공부한다.
한 가지 다른 것은 다연이는 고등학교 때 배울 내용들을 미리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연필을 쥐고 있는 박지훈의 굵은 핏줄이 선 팔뚝을 보고 있으니, 이젠 아빠 팔의 굵기와 비슷해졌다.
키는 점점 천천히 크고, 그만큼 몸도 굵어지는 지훈.
현란하게 펜을 돌리면서 밖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고.
꼬맹이들의 책을 넘기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내 귀로 찐하게 들려왔다.
턱을 괴며 멍하니 밖을 쳐다보자, 도로 위를 지나다니는 차량들과, 넓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이 많이 보였다.
"평화롭구먼."
"평화롭지."
내 혼잣말을 공부하던 지훈이가 받아줬다.
학교가 끝나고 나를 데리러온 아빠.
보통 내가 걷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나랑 같이 걸어 다니는 다연이지만
오늘은 아빠가 다연이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는 나를 데리고 JSM 본사로 향했다.
"갑자기 거긴 왜?"
다연이가 내리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아빠의 운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 이모들이 너한테미안하다고, 이번에 멤버들이 전부 스케줄 비워서 사과의 의미로 같이 쇼핑하고 싶다던데?"
"오...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었던, 걸그룹과의 쇼핑이라 기대되네."
아빠는 웃으면서 내 말을정정했다.
"지금도 가장 유명할걸?"
JSM 본사.
아빠는 내 손을 잡고 드리밍이 있는 곳에 데려다 준 뒤,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다, 놀고 아빠한테 꼭 전화해야 한다?"
"알겠어~"
아빠를 보내고나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를 발견한 드리밍 이모들이 놀란 반응을 보였다.
예쁜이들 사이에서 더 예쁜 내가 등장했기에.
나는 '훗'이라는 짧은 웃음소리를 내며 찰랑이는 단발을 손으로 털었다.
""너무 이쁘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미모의 여인들에게 둘러싸인 기분은 음... 더 설명해서 뭐하겠는가...
사진을 찍다가, 지수 이모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
다들 자신을 숨긴다고, 안경을 쓰거나, 모자를 쓰거나, 마스크를 썼지만, 그럼에도 가려지지 않는 외모 덕분에 누가 봐도 드리밍이었다.
나도 지수 이모가 준 동그란 안경테를 꼈다.
이건... 숨기는 게아니라 더 꾸미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생각보다 효과는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홍대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바쁘게 살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시선이 몰리지 않았다.
내 옷을 골라준다더니, 드리밍 이모들은 자기들이 신나서 서로 옷을 대보고 있었다.
나도 이것저것 입어보라고 건네주는 옷을 받았다.
귀여운 스타일부터, 몸매가 드러나는 딱 붙는 옷 등 이것저것 입혀보기 시작하더니, 감탄했다.
"이야... 옷걸이가 좋아도 너무 좋은데?"
옷 입히기 게임이라도 하는 듯, 내가 입어보는 것을 전부 사주었고, 나는 2시간가량 옷만갈아입었다.
"몸 되게 좋다... 아직 14살인데..."
"야, 유아야 너도 좋았거든?"
"데헷."
나는 유아 이모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내 미래라 생각하니,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몸이다.
그리고 지수 이모랑, 유아 이모가 나에게 귀를 뚫자는 제안을 했다.
"싫어."
내 단호한 말에도, 나를 유혹이라도 하는 듯 자신의 귀를 보여주는 유아 이모.
"왜에~ 이거 봐 엄청 예쁘지?"
"아빠한테 혼날걸?"
"혼날 거 생각하면 평생 못한다?!"
14년간 여성들과 어울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저 슬픈 강아지 눈 같은 모습을 보고 홀린걸까...
나는 나쁜 짓을 하는 마음으로, 결국 양쪽 귀를 뚫었다.
딱 소리와 함께 뚫리는 귀.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이거는 처음 귀 뚫을 때 쓰는 거고, 이건 기념 선물~"
한 명씩 기념 선물이라고 챙겨주니, 5개나 늘어났다.
커다란 링부터, 딱 붙는 귀걸이 등.
씀씀이가 큰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전부 쉽지 않은 가격대의 제품이었다.
대략 4시간 동안의 고된 일정이 지나고, 구매한 물건들을 전부 택배로 부친 뒤에 우리는 카페에 앉았다.
나는 요즘 먹는 양이 엄청 늘어서, 이것저것 입에 넣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지수 이모가 말했다.
"먹는 게 어디로 가는 거야?"
"음... 나 운동 진짜 많이 해~ 그리고 키 커야지."
거의 매일같이 수영을 하기도 하고, 아빠를 따라 아파트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기에 소모되는 칼로리가 꽤나 많다.
"저녁 뭐 먹을까?"
"고기."
내가 빠르게 대답했지만, 유아 이모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난 회 먹고 싶은데~"
"음... 그래, 그럼 회 먹자, 이번엔 내가 살래."
내가 산다고 하지만 말리는 멤버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사준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무언가에 고정되었다.
검은색이지만 영롱하게 빛나며, 투명한 부분에 적혀있는 글씨...
HS the black card.
"".....""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는 어여쁜 이모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내 돈 아닌데~ 참치... 먹을 사람?"
""나!!!""
우리는 유아 이모가 알고 있는 참치집으로 향했다.
참치집의 분위기는 이곳은 비싼 곳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풍스러웠다.
굳이 이 돈을 주며 먹어야하나 싶을 만큼 맛있진 않았지만.
처음 나에게 보냈던 눈빛은 장난이었다는 듯, 이미 유아 이모가 계산을 한 상황이었다.
"지호 선배님이면 모를까, 내가 너보다 돈 많거든? 꼬맹아?"
참치를 집어먹다가, 내 시선이 옆에 있는 소주로 향하자 다들 술을 상 밑으로 숨겼다.
"...?"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리제 이모.
"그... 안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에서 머리 더 짧아지면 어떻게 하라고, 걱정 마, 안 마셔..."
""휴우...""
"아니... 애초에 못 먹는다고 말했는데...?"
나는 참치를 먹으며, 소곤거렸다.
"맞다, 카드... 친구네 아빠가 준거라서, 우리 아빠한테 들키면 안 돼 알았지? 나... 뺏길 수도 있단 말이야..."
진지하게 말했지만, 내 모습이 아이 같은 지 웃고 있는 이모들이었다.
이모들과 놀고 나서, 나는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는 나를 데리러 왔고, 이모들이 차를 타는 것까지 지켜봤다.
"오늘 재밌었어~!"
""잘 가~ 다음에 또 놀자~""
아빠도 인사를 한 뒤 출발했고, 나는 창문을 올렸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있어서, 아빠가 자연스레 내 뚫린 귀를 쳐다봤다.
뭐라고 할 줄 알았지만, 아빠는 뚫린 귀를 보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 힐끔힐끔 쳐다봤다.
"오늘 아빠랑 엄마방 갈까?"
"알겠어~"
나는 아빠 말에 대답하며, 차창너머 서울의 밤 풍경을 구경했다.
집에 도착하자, 아빠는 가져온 짐들이 있었는지 트렁크를 열고 이것저것 꺼냈다.
"흠... 두 번 왔다 가야 하나...?"
내가 짐을 들자 내 손에서 짐을 뺏는 아빠.
"시윤아, 먼저 올라가."
"나 14살이거든? 가벼운 거라도 줘."
"...다 무거운데..."
나는 말없이 비교적 가벼운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결국 애매하게 많은 양이 남았고, 가득 들고 오려는 아빠.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아빠의 짐을 뺏어서 들었다.
"왜 두 번 왔다 가게 해, 그냥 주지."
"미안..."
집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아빠를 도와 짐을 풀었다.
각종 옷들과, 반찬거리가 가득했다.
"할아버지 집에 갔다 왔어?"
"응."
"왜, 나랑 같이 가지."
"어차피 이번 주에 또 갈 거야."
"아하."
짐 정리를 끝내자마자 아빠는 내 귀를 바라봤다.
"왜?"
"예뻐서."
"알아."
아빠는내 손목을 잡더니, 나를 끌고 2층으로 향했다.
도착한곳은 어렸을 때 봤던, 엄마의 각종 액세서리들이 들어있던 방이다.
"여기에 아빠가 엄마한테 선물한 것도 있고, 이건 시윤이 엄마가 아끼는 거다?"
유리로 되어있는 칸막이 안에, 다양한 액세서리가 들어있었다.
"시윤이 고등학생 되면 주려고 했는데, 이미 다 큰 거 같아서."
"엄마 거를 왜 아빠 마음대로 줘?"
"...어?"
"아핳, 장난이야 예쁘다... 내가 쓰면 엄마도 좋아하겠지."
"그치?! 시윤이가 쓰면 분명 좋아할 거야."
"응."
가격대가 살벌한 아빠의 액세서리가 들어있는 서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블링블링한 서랍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제 시세를 정확하게 알게 된 나는, 이 살벌한 액세서리들의 견적을 뽑아냈다.
'와오.'
말 그대로 억 소리가 나오는 가격들...
어린 내가 착용하기엔 너무 과했다.
아빠도 나랑 생각이 같았는지, 그나마 티 나지 않는 이쁜 귀고리를 쳐다봤다.
"원래는 이것만 주려고 했지~"
귀에 딱 붙는 동그란 모양의 검정색 귀고리.
감정을 하고 싶지만 무슨 보석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액세서리를 보고 추측하자면, 블랙다이아몬드 같았다.
물론, 여기에 있는 보석들에 비하면 블랙다이아가 비싼 편은 아니지만, 굵직한 것이 가격이 꽤 될 것 같았다.
"엄마도 이거 되게 좋아했어."
"응, 마음에 든다."
내가 귀고리를 들고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가 웃으면서 귀고리를 해줬다.
"크... 누구 딸인지, 엄청 예쁘다."
나는 거울을 보며 대답했다.
"엄마 딸이지 뭐,"
"...치사하네."
웃으면서 귀고리를 뽑아서 원래 자리에 두자, 아빠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학교에 차고 가면 바로 압수거든?"
"아..."
나는 지수 이모의 말대로 귀 소독을 하고, 귀가 막히지 않게 해주는 투명한 바늘 같은 도구를 꽂았다.
요즘들어 내 코를 자주 만지던 아빠는, 이제 내 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좀 만지죠? 소독약 뿌렸는데.“
"아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