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비 온 뒤 땅은 굳는다.
다음 날 아침, 내 뚫린 귀를 가장먼저 발견한 건 역시 다연이었다.
"안뇽~"
"아안뇽~"
"허억! 시유나, 귀 뚫었어?!"
"응."
"난, 엄마가 고등학생 되면 해준다 했는데... 아파?"
"하나도 안 아팠어, 걱정하지 마."
"응."
나는슬슬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노골적인 표정을 지었고,
가슴을 만지려 하는 내 준비과정을 눈치 챈 다연이가 빠르게 도망쳤다.
"하지 마!!!"
"다연아 혼자서 마사지 잘 해주고 있지?"
"으응..."
"이쁘게 커야 돼."
다연이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시유니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많이 큰데...?"
"나는 영양제를 따로 먹는다니까?"
"진짜...였어?"
"다연이한테는 거짓말 안 한다니까?"
"응..."
그리고 역시나 입구에서 김태오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다연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사건 이후 시간이 꽤 흘렀건만 김태오는 아직까지도 나를 꺼려했다.
뭐, 그 덕에 다연이가 나를 의심하는 일은 완전히 없어졌다.
오늘부터 시험이 진행되기에, 박지훈도 날밤을 샜는지 눈가에 다크서클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박지훈이 내 귀가 뚫린 것을 내가 말하기도 전에 발견했다.
"와, 귀까지 뚫었냐?"
"왜, 예쁘냐?"
"원래 예뻤어 넌."
웃으며 말하는 지훈, 아침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그대로 박지훈을 존나 때렸다.
교실로 들어가자, 아침부터 공부를 하고 있는 꼬맹이들이 꽤나 많았고.
모두 첫 시험 과목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연이부터 시작해서 모든 꼬맹이들이 나에게서 멀어졌다.
좀 서운하기도 했지만, 나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이젠 당연시된 내 암기력은 모든 선생이 알게 되었다.
3분에서 길면 4분까지 걸리는 시간으로100점을 찍어내니, 내게 별말 하지 않는 선생님들.
나 혼자 뭘 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덧 시험시간이 시작되고, 꼬맹이들이 침을 삼켰다.
내 컴퓨터 사인펜의 뚜껑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까지, 3문제도 못 푼 꼬맹이들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꼬맹이들이 나를 신경 쓰는 것이 더욱 느껴져서, 다음부터는 조용히 닫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엎드렸다.
하아아아압..... 퓨우우우우......
드디어 시작됐다...
5분간 한 번씩 울리는 숨소리...
다들 시윤이의 숨소리에 리듬을 맞추듯, 4문제 이상 풀어내겠다는 마인드로 시험에 임했다.
하아아아압..... 퓨우우우우......
감독을 하고 있는 선생은 이 장면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본 뒤 신기하다고 느꼈다.
누가 잠을 자는데 5분에 한 번씩 숨을 쉬겠는가.
시간을 재보니 생각보다 정확했다.
그리고, 시윤이가 푼 답안지에 침이 고이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답안지를 걷으려고 다가가자, 답안지는 시윤이 베고 있는 팔 아래에 있었다.
잠시 시윤이의 팔을 들고 답안지를 뺐음에도, 시윤이는 잠에서 깰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미녀는 잠이 많다는 옛말을 떠올리는 선생이었다.
"흐극! 잘 잤다."
다연이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답안지를 건넸고, 나는빠르게 채점했다.
요즘 들어 한 문제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100점을 받아내는 다연.
"오오오! 다연쓰!"
"우오오! 시윤쓰~"
"열심히 했네~"
"응!"
그리고 박지훈도 생각보다 자신 있는지 당당하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진도를 못 따라와서 많이 틀리더니, 예상외로 많이 맞았다.
김태오는 나에게 다가오지도 않고 다음 공부를 했고, 다연이도 눈치를 봤다.
"쟤 요즘 왜 저래?"
"고백해서 내가 찼어."
그런 걸 말하면 어떻게 하냐는 듯이, 다연이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엌?"
"닥쳐라."
"아핰?"
내가 볼펜을 꺼내자, 박지훈이 웃음을 멈추고는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양손을 들었다.
"야야... 장난이지, 알겠어."
박지훈이 천천히 김태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는 태오.
한숨을 쉬더니 나에게 자신의 시험지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나는 시험지를 받고 빠르게 채점한 뒤, 김태오에게 돌려주자, '고맙다.' 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시험 점수는 놀랍게도 92점.
박지훈이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오더니, 김태오 옆에 앉아서 떠들기 시작했다.
요즘 김태오를 보고 있으면, 쟤도 우리 말곤 친구가 없는데 혼자 동떨어진 거 같아보였다.
그래서인지 쓸쓸해보였고,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박지훈에게 대놓고 이유를 말한 거기도 하고...
요새 다연이는 전과 다르게 내가 충동적으로 말을 뱉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다연이는 지훈이의 반응을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 나는 충동적으로 뱉는 경우가 더 많다.
박지훈의 효과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김태오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떠들어대는데 김태오도 끄덕이면서 받아줬다.
그리고, 시험시간이 시작되며 나는 다시 잠에 들었다.
다시 쉬는 시간이 되고, 시험을 채점해주면서 박지훈이 다연이에게 말했다.
"오늘 아저씨 불러서 둘이서 가."
"왜?"
"남자들끼리 대화 좀 하게."
"...응."
다연이는김태오를 올려보다가 다시 내가 채점하고 있는 시험지로 시선을 두었고.
나는 빠르게 채점해서 시험지를 각자에게 돌려주었다.
김태오의 자리에서 떠들고 있는 둘.
나와다연이는 그 모습을 말없이 쳐다봤다.
시험이 끝나고, 김태오와 박지훈은 우리에게 인사를 하더니 사라졌다.
김태오는 이 와중에 임무를 다하고 싶은지, 차를 대기시켰다고 다연이에게 말했다.
나는 김태오와 박지훈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다연이를 쳐다봤다.
"다연이 오늘 시험 만점인데?"
"응! 근데... 태오 괜찮겠지?"
"내가 심한 말을 하긴 했어, 솔직히 이제 태오 못 볼 줄 알았거든."
"...어떻게 말했었는데?"
다연이는 아무리 궁금한 게 있어도 지금까지 한 번도 나한테 묻지 않았었다.
나는 김태오가 나한테 고백했던 말부터 하나씩 꺼냈다.
고백한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될 말들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것을 들은 다연이의 두 눈이 커졌다.
"내가 그동안 다연이 때문에 참고 또 참았는데, 그리고 싫다는 거 티도 냈는데 결국 고백을 하더라고..."
"아..."
"그래서, 다신 못하게 하려고 좀 더 과하게 말한 것도 없지 않아 있긴 하지... 그래서 미안하기도 한 거고."
학교 정문에 차량이 세워져 있었고, 경호원 아저씨가 내리더니 인사했다.
"아가씨, 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나는 익숙한 얼굴인, 김태준 경호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태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김태오와 12살 차이나는 단 한 명 있는 형이다.
"오랜만이네요?"
"아, 시윤 아가씨도 반가워요."
김태오 보다는 못한 외모지만 역시나 훤칠한 얼굴의 소유자다.
나는 김태준이 문을 열어줘서 다연이와 같이 차에 탑승했다.
운전을 시작하는 김태준.
"시윤 아가씨."
"응? 왜요?"
"그... 따로 할 얘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김태오에 관련된 이야기겠지.
"그래요, 다연아 먼저 집에 들어가, 알았지?"
"응."
나는 아빠에게 전화하고 상황을 말한 뒤 허락을 구했다.
카페에 앉아있으니 김태준이 물어봤다.
"뭐로 드시겠습니까?"
"저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로."
"예,"
주문을 하고 돌아오는 김태준.
"태오 때문이죠?"
"네, 요즘 태오가 말없이 일만 열심히 합니다. 역시나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이유는 알고 있지만, 역시 태오 사생활이라서 그래요. 많이 티 나던가요?"
"네, 항상 대화는 하려고 했던 태오인데... 최근 들어 사춘기가 온 것처럼 꼭 필요한 말만 하더라고요."
내 나이대의 아이가, 꼭 필요한 말만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라 생각하지만,
갑작스럽게 변한 태오의 모습에 많이 신경 쓰이나 보다.
"그래도, 태오가 학교생활은 잘 하고 있죠?"
"오늘 시험 평균 90점이던데."
"네?! 태오가요?!"
"넵, 열심히 하곤 있어요."
김태준은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혹시 그 사생활... 이란 것은... 말 못 해주시나요?"
"아뇨, 어렵진 않죠, 근데... 제 입으로 말하기가 좀..."
나랑 관련된 일이라고 파악했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린 김태준이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태오도 남자였네요."
"하핳... 가능한 비밀로 해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진동벨이 울리자 김태준이 주문한음료와 간식을 가져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나를 보는 김태준.
"하긴, 오히려 지훈 도련님이 이해가 안 갑니다."
"왜요?"
"아가씨 옆에 있으면서도 고백을 안 한다는 게."
"다연이랑 같이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잖아요."
"그렇죠,"
"제가 고백 받는 거 자체를 엄청 싫어한다는거 알아요, 걘."
"아... 그렇구나... 하긴, 듣기로 사물함만 열면 편지가..."
"하하하...."
나는 김태준을 보며 음료를 쪼옥 빨았다.
"저희 집에 형제라곤 태오랑 저밖에 없는데, 12살이나 차이나다보니 하하... 형으로서 태오가 대견하기도 하면서 걱정되기도 하죠."
"하긴, 저도 다연이가 축 처져있으면 걱정되긴 해요."
"오... 역시 듣기로도,시윤 아가씨가 다연 아가씨를 많이 아껴주신다 들었습니다."
나는 김태준을 보다가 앞에 있는 쿠키를 먹었다.
'토옥' 소리가 나며 부서지는 쿠키.
"흠... 그냥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태오한테 심한 말을 했죠."
"어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말 안 하겠지만, 상황은 설명해줄게요."
김태준이 내 말을 듣고 천천히 끄덕였다.
"먼저 다연이가 9살 때부터, 태오를 좋아했어요."
"...네?"
"근데 그걸 김태오도 알았죠."
"아..."
"그리고 다연이가 고백했는데, 찼어요. 다연이에게 듣기로는 보호하는 데에 감정이 섞이면 안 된다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
"근데, 11살 때 처음 본 저를 좋아하더라고요? 다연이 옆에서 봐왔던 저는 다연이가 태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도 했고, 저는 별 마음도 없었고... 그래서 고백하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김태준은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를 더 좋아하는 거예요. 다연이는 여전히 태오를 좋아하는데... 웃긴 건 그 사실을 김태오도 알고 있었단 말이죠."
"....."
"저도 똑같이 김태오처럼 싫다는 티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만 좀 좋아하라는 듯이 노골적으로요. 근데 고백을 하길래... 제가... 나쁜 말을 했죠."
"아... 그렇군요..."
자신의 자식 같은 동생을 차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꼬마를 좋은 눈빛으로 보긴 힘들 것이다.
"하아... 친구라곤 우리 4명뿐인데, 왜 이 사단이 났는지, 그래서 태오 좀 달래주라고 지훈이를 보냈어요."
"지훈 도련님이요?"
"네, 그래도 태오랑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얘거든요."
"태오도 지훈 도련님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나와 김태준은 카페에서 한동안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윤 아가씨는 태오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흠, 객관적으로 봤을 때, 태오가 잘생기긴 했죠, 근데 제가 얼굴을 볼 거 같아요?"
"아..."
"만약 누구와 사귀게 된다면 외모는 평균 이상이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딱히? 성격만 맞으면요."
물론 나와 성격이 맞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
만약 있더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강한성의 기억이 있는 이상...
"아무튼... 슬슬 집에 가요, 아빠 기다리겠다."
"아, 벌써 시간이... 사생활인데,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동안 엄청 걱정했었거든요."
"아니에요,태오한테 심한 말해서 죄송하죠."
"아닙니다 아가씨, 집으로 모실게요. 가시죠."
"넵"
김태오 이 꼬맹이는 여러 사람 귀찮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기말고사까지 끝나고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현재 나와 김태오의 사이는 어색함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연이와 같이 몸을 꽁꽁 싸매고 밖으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는 김태오다.
나는 집에서 아빠가 차려준 밥을 먹다가, 김태오와 이대로 지내기에 민망하다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밥을 먹다 말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늘 시간 되냐?"
-".....왜 그러지?"
"우리 집 1층에 좀 올래? 할 얘기 있는데."
-"지금 말인가?"
"너 시간 될 때."
-"30분 뒤에 가지."
"그래."
아빠가 밥을 먹다가, 나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봤다.
"누군데?"
"태오라고, 다연이 경호원 있어."
"아, 알지. 근데?"
"전에 나한테 고백해서 엄청 모질게 했거든, 사과하려고."
"오... 사과도 할 줄 알았어?"
장난치려던 아빠가 내 표정을 보고 흠칫했다.
나는 밥을 국물에 말아서 들이킨 뒤, 아빠를 쳐다봤다.
"잘 먹었어, 나 씻는다?"
"응."
나는 양치를 하며, 머리를 감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머리띠로 머리를 넘겼다.
세수를 하면서 눈곱을 뗀 뒤, 수건으로 닦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나갈 건 아니지?"
"그럼, 이쁘게 하고 나갈까?"
나는 머리띠를 풀고,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뒤 잠옷 위에 긴 롱 패딩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
"어차피 요기 앞에 있을 거야."
"응."
한국의 겨울 추위를 느끼며, 집 앞에 벤치에 앉았다.
잠시만 손을 밖으로 빼면, 아플 정도로 차가웠기에 핸드크림을 바르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럼에도 핸드폰을 보고 싶어서 빠르게 볼 영상을 찾은 뒤, 허벅지에 올려놓고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으~ 춥다."
그때 멀리서 김태오가 나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내 앞에 서서 뜨거운 입김을 만드는 김태오가 급하게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새끼 잘생기긴 살벌하게 잘생겼다.
만화를 찢고 나온듯한 모습이란 것은 김태오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나는 김태오를 올려다보다가 끄덕이며 말했다.
"할 얘기가 많은데 카페나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