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비 온 뒤 땅은 굳는다. (84/99)



〈 84화 〉비 온 뒤 땅은 굳는다.

나는 바닥에 쌓인 눈을 밟으며, 카페로 가기 위해서 벤치에서 일어났다.
김태오는 빨개진 내 손을 자연스레 자신의 장갑을 벗어줬다.

"고마워~"

내 손은 누구와 비교해도 작은 편이라, 김태오가 넘겨준 장갑은 컸다.

김태오는 강아지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왔고.
우리 집 아파트엔 'HSW', 태오의 가족들이일을 하고 있어서 눈을 피하기 위해 밖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한 뒤, 나는 이것저것 주문하고는 태오가 잡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김태오...
우월한 외모로 남자의 시선까지 사로잡는 김태오다.
내가 패딩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김태오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김태오를 쳐다보자, 김태오는 내 시선을 피한다.

"음... 우선은 미안해 그렇게 말해서."
"...아니다."
"뭐, 내가 말했던 것 중, 싫다는 건 전부 사실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혐오하진 않았어."
"....."
"그래서... 그렇게 말한 이유를 말해주고 싶었어."

김태오가 실망한 눈빛으로 추욱 처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커피 나오면 하자."

하지만, 김태오는 그동안 꽤나 심란했는지, 빠르게 말해주길 원하는 표정이다.
나는 한 손으로 손가락 5개를 김태오를 향해 펼치며 말했다.

"내가 일반인을 기준으로 호감도를 나타내자면 총 5단계야."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궁금한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다연이는 5단계지, 솔직하게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싶은 만큼."
"....."
"너는 3단계야. 근데 내가 4단계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15명도  돼."

나는 김태오의 착잡해 보이는 표정을 봤다.

"아무튼, 이런 말을 왜 하냐면...  커피 왔다."
"내가 가져올...."

나는 김태오의 말을 못 듣고, 먼저 벨을 가지고 커피를 받으러 갔다.

"잘 먹겠다..."

나는 요거트 스무디를 쪽 빨며, 맛을 음미하고는 말했다.

"너도 알잖아, 다연이가 너 좋아하는 거."
"....."
"근데 네가 나한테 그렇게 반응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너보다 몇 배는 좋아하는 다연이가 내 옆에 있는데."

 말에 김태오가 움찔했다.

"네가 그럴수록 내가 생각하는 너의 호감도는 바닥으로 치닫게 돼, 그냥 네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가 펼친 손가락 5개를 전부 쥐자, 김태오는 나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말하자면 그런 거고, 내가 기억력이 좋은 건 알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김태오.

"다연이 엄청 울었어, 네가 한  때문에... 보호 대상에 감정이 섞이면 안 된다고? 솔직히 거기서부터 넌 나한테 나가리였어. 다연이를 울렸으니."
"....."
"물론 어려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근데, 남들 몰래 엄청 좋아하는 애가 내 친구에게 관심을 보인다라... 소심한 다연이가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은 해봤어?"

김태오는 잘못을 인정하는 듯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넌 아직도 다연이가  좋아하는  알면서도, 나를 좋아한다는  너무 답답해서 너한테 과하게 말했던 거야 알아들으라고, 관심  끊으라고."
"미안하다."

나는 얘기를 한 김에 확실하게 팩트를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50%는 진실인 게, 너  스타일 아니긴 해."
"....."
"박지훈이랑 똑같이 행동하는데, 상식적으로 내 스타일이겠냐? 점점 병신 되는  같아서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아..."

심각한 표정으로 바뀐 김태오에게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박지훈 같은 애는 친구로서는 좋아."
"....."
"재밌잖아?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고, 솔직히 같이 다니면 재밌었어. 그니까 제발 그만 좋아하고 그만 좀 고백하고, 그냥 여사친으로 생각해 달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솔직하게... 힘들  같다..."

 상황에서 힘들다는 건 나를 안 보겠다는 뜻인가...?
좀 더 김태오를 간보기 위해서 말했다.

"야,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너나 나나 외모 살벌한  비슷한데 힘들기는... 나보다 예쁜 사람은 아니어도 좋은 사람 만날 거야."
"하하... 나도 외모  본다."
"지랄? 내 성격이 뭐가 좋다고... 설마... 마조히스..."
"말도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아하핳,"
"하아..."

김태오의 표정을 보니, 힘들것 같다는 건 지금 이 순간 감정 조절을 못하고 뱉은 거 같았다.
그리고 내가 다연이를 찾고 있었을 때, 김태오에게 한 말이 신경 쓰였다.

"암튼, 그땐 진짜 미안했어, 무엇보다 너를 폄하할 생각은 없었어."
"괜찮다... 내가 미안하다.  생각을 아예 안하고 있었다..."
"맞아,  이기적인 새끼야."
"좀... 그냥 평범하게 답해주면 안 되나?"
"왜, 너무 좋아? 이 마조야?"
"미친...."
"너네 형한테 말해줘야지~"
"뭐?! 하지 마라!"

얼굴을 붉힌 김태오가 나를 쳐다봤다.
그래, 저 얼굴로 저 뒤에서 몰래 김태오를 쳐다보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가서, 고백하면 100% 성공할 거다.
진짜 더럽게 잘생기긴 했다.
아빠랑 비교하면, 우리 아빠가 일반인이 될 정도니까...

"아니면 김동훈 차장님?"
"야!"



3학년의 졸업식이 다가왔고, 만화부 부장이 제발 와달라고 달라붙어서 만화 부원 4명 전부 3학년 졸업식에 갔다.
사진을 찍고, 부장의 부모님과 함께 소고기를 먹었다.
부장 아버지의 직업은 아빠와 같은 건물주였고, 어머니는 지훈이의 어머니와 같은 교수다.

"와... 정말 우리 아들이랑 친하게 지냈니?"
"물론이죠."
"아하하... 정말 팬이란다, 특히 너희 아버지의 팬이지."
"감사합니다~“



시간이 지나, 설날이 다가왔고 나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고 왔다.
나는 이제 어느덧 15살... 오른손의 흑염룡을 키우기 시작할 나이가 되었다.



평화로운 주말을 맞이하는 나에게, 먼저 일어난 아빠가 다연이네와 함께 야구장에 가자고 했다.

"야구장? 그래~ 뭐, 가면 되지. 아빠 어느  좋아하는데?"
"다연이네가... 한성인데 어디 좋아하냐고...?"
"아... 그러네?"

결국 나는 김선화의 부탁으로 받은 한성 유니폼을 집에 가져와서 입어봤다.
그리고 울리는 전화, 박지훈이다.

- "야, 엄마랑 아빠가 같이 야구  거냐는데? 티켓 남는다고."
"요즘 야구 시즌이긴 하지, 언제?"
"내일."
"...?"

나는 경기 날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성의 상대는 대산이었다.

박지훈의 아빠이자, 대한민국 야구계의 슈퍼스타 박정호.
박정호 씨가 몸을 담갔던 팀의 이름은 대산이었다.
나는 아빠를 보며 말했다.

"아빠?"
"응?"
"지훈이네 대산 팀 팬인데... 같이 보자는데?"
"...어?"

하필이면, 한성과 대산은 한국 야구 프로리그에서 서로 앙숙관계였다.
과거 맞대결에서 우세를 점하던 대산은 박정호가 은퇴하면서 전력이 약해졌고, 한성이 누르기 시작했다.





야구장에 도착한 우리...
우리는 지금 꽤나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대산 유니폼을 입은 지훈이네.
그리고 한성 유니폼을 입은 우리 가족과 다연이네.
나는 한성 유니폼을 입고, 지훈이네 부모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를 보며, 배신자를 보는듯한 저 눈빛...
하지만 배신을 떠나서 오랜만에 나를 보았기에, 커버린 키와 내 단발머리를 보고 감탄하는 지훈이네 부모님이었다.



단발로 잘린 머리로 다연이네 놀러 갔을 때에도, 김선화랑 이진석도 감탄했으며, 정연이는 얼굴이 붉어졌었다.

"어머... 시윤이 너무 예뻐진  아니니?"
"감사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눈에 띄게 성장하는 나의 우월한 외모와 바디.
물론... 다연이랑은 비교하면 안 되지만, 그래도 속옷이 작아지는 걸 느낄 때마다 뿌듯하다.
한성의 유니폼에 어울리는 속티를 입으니, 가린 듯한 내 몸매가 더욱 부각됐다.



경기가 시작되고, 한성이 우세하자 이진석이 팔에 힘을  줬다.
그 모습을본 김선화가 박정호의 눈치를 봤고, 한성이 삼진을 당하자 이번엔 박정호가 팔에 힘을 줬다.
승부욕 강한 두 남자의 아내들만이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를 쳐다봤고.
하필이면 오늘 경기는 레전드를 찍으려는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함성소리가 울리고 있지만.
이진석과 박정호를 제외하고는, 눈치를 보며 경기를 볼 뿐이었다.




그리고... 완피스의 3대장도 아니고.
이진석, 김지호, 박정호가 앉아있는 이 자리를...
카메라가 놓칠 리가 없었다.
거대한 스크린에 아빠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경기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빠를 기준으로 왼편에 앉은이진석 가족과 오른편 박정호 가족들은 어색하게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앞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카메라를 확인한 후,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는 나를 발견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앞에 앉아서 카메라에 나오지않던 내가 영상의 하이라이트라는 듯이 나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기대에 부응하듯, 압도적인 남정네들의 환호와 탄식이 섞인 소리...
그리고 뒤이어 환호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어색하게 앉아있을 바엔 뭐라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왼쪽에 앉은 다연이와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V 자세를 취해줬다.

그리고 오른 편에 앉은 박지훈.
덩치 때문에 어른이 꼬맹이들이랑 같이 앉아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메라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나는 어른들 사이에 껴서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불쌍한 아빠를 봤다.

"아빠, 내려와."
"에이..."
"빨리."

아빠는 역시나 불편했는지, 못 이기는 척 내 쪽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다연이와  사이로 짐을 옮기고 앉는 아빠.
나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소곤소곤 말했다.

"솔직히 위에 불편하지?"
"...아니야~"
"아니긴~"

아빠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새 카메라가 다시 돌았다.
저 카메라맨은 아예 이곳을 찍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다른 곳은 제대로 보지도 않는다.

옆에서 치킨 통을 비우는 데에 열중하는 박지훈.
아빠가  모습을 보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잘 먹는다~"
"감삽흠느드."
"시윤이도 저렇게 잘 먹어야 하는데."
"먹어줄까?"
"....."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나를 뚫어지게 보던 아빠는, 점점 더 사진 속 엄마와 닮아가는  외모에, 또다시 알 수 없는 감정의 표정을 지었다.
특히 오늘 차고 나온 귀걸이는 아빠가 나에게 선물했던, 귀에 딱 붙는 블랙다이아가 박혀있는귀걸이였다.

아빠는 내 귀를 만지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나는 아빠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했다.

"밖이니까 딸 창피하게 울지 마."
"...응."

 말로 인해 아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야구로 시선을 돌리려는 아빠.
그때 키스타임이 시작되고 곧바로 아빠와 내가 잡혔다.

나는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한 아빠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린 뒤 볼에다 뽀뽀를 해주었다.
아빠도 갑작스러운 내 행동으로 인해 스크린을 확인했고.
 머리를 두 손으로 잡더니 강제로 이마에 뽀뽀를 하려고 하기에, 손바닥으로 막았다.

"디펜스~"

내 머리를 집고 어떻게든 뽀뽀하려는 아빠와 그걸 손바닥으로 막아내는 내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기분이 풀린 아빠는 해맑게 웃고 있었고,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아빠는 이진석과 같이 화장실에 갔다.
옆에서 존나게 처먹더니 코를 골고 있는 지훈.
머리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갑자기 내 어깨에 기댔다.

뒤에서 박지훈의 부모님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아쉽게도 내 주먹감자가 나가지는 못하고 있었고,
나는 박지훈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 개새끼가 갑자기 침을 흘린다.

'시발?!'

내 가슴에 주르륵 흐르는 침을 보고 어깨를 강하게 튕기자 박지훈이 깼다.

"아 존나 더러워..."

박지훈이 정신을 차리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내 가슴에 젖은 자국을 유심히 쳐다본다.
"젖 나오냐?"

투욱.

찰나의 순간 작은 소리와 함께, 고개가 반대편으로 기울어지며 잠을 자기 시작한 지훈.
이 개새끼는 역시 아주 미친 새끼인 것이 분명했고, 이 개 병신 새끼는 대우를 해줄 필요가 전혀 없음을 강하게 느꼈다.

나는 휴지로 냄새나는 침을 닦았다.

만약 뒤에 지훈이의 부모님만 없었다면,
내 주먹감자와 함께 그로기 상태가 된 지훈이의 안면에, 일어날 때까지 니킥을 꽂는 것을 반복했을 텐데... 너무 아쉬웠다.





경기는 더욱더 열이 오르기 시작하며, 나는 치어리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서현 이라고 이름이 적힌 치어리더.

입고 있는 돌핀 팬츠가 인상적이며,  붙는 돌핀 팬츠 엉덩이에는 한성이라 적혀있었다.
춤과 중력으로 인해 흔들리거나 접히는 살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구경하는 도중.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가연이가 내 옆으로 와서 다연이와 내 사이에 앉았다.

"누나! 이거 먹어!"

나에게 초콜릿을 건네는 가연.
지훈이 때문에 당이 떨어지는 것 같았던 나는 가연이가 주는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이제 나랑 사귀는 거야!"

귀엽게 말하는 가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나는 아무랑도 안 사귀는데?"
"...내 초콜릿 먹었잖아..."
"음, 그럼 다음부터는 말할 때, 이거 먹으면 나랑 사귀는 거야~ 이렇게 해~? 알았지?"
"그랬어!"
"아니야, 32초 전에 '누나! 이거 먹어!' 이랬어. 42초 전에 여기에 앉았고 맞지?"
"....."

급격하게 우울해진 가연이의 머리를 웃으면서 쓰다듬었다.
다연이가  옆에서 가연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고.
정연이는 철없이 나에게 작업을 거는 가연이의 모습에 부럽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아빠는 이진석과 볼일이 끝났는지 같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빠는 자연스레 가연이가 자리를 비켜줘서 내 옆에 앉았고, 자고 있는 박지훈을 쳐다보았다.

"지훈이는 아직도 자네?"
"응, 재워줬어."
"...응? 재워줬다니?"
"그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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