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평화로운 하루(2)
아빠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오늘 할아버지 집에서 자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벼운 짐들을 선별해서 양손에 들자, 그제서야 만족한 아빠는 다른 짐을 들고 왔다.
"빨리 갑시다."
"왜 네가 더 신났냐?"
"할아버지네 주변에 할 거 많잖아."
"그래?"
"산 타면서 나물 캐거나, 통발 던져놓고 추어탕 해먹어야지."
"으휴, 결국 먹을 생각이었구나."
솔직하게 살기에는 도시가 더 좋지만, 나는 과거가 생각나는 시골을 꽤나 좋아한다.
그 증거로, 요즘 들어 너튜브로 시골 브이로그를 자주 본다.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아빠를 기다렸지만, 생각보다 짐이 많은지 아빠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짐을 좀 더 들고 밖으로 나왔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 짐을 옮긴 뒤, 조수석에 먼저 앉았다.
흥얼거리고 있으니, 짐 정리를 끝내고는 운전석에 앉는 아빠.
"기대돼?"
"응."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나이는 이제 60대 초반이다.
과거의 나와 나이를 비교하더라도 15살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고, 살아온 세월을 따지자면 비슷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살아온 세월이 비슷하니 잘 맞는다.
아빠는 버튼을 누르며 시동을 켜더니, 차를 움직였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중간 즈음에 있는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도시에서 점점 시골로 풍경이 바뀌고, 드문드문 산과 논밭으로 둘러싸인 전원주택만이 보이는 자연환경이 펼쳐진다.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어이가 없는 건, 이 일대의 땅이 전부 아빠의 명의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산속 길을 달리다 보니, 궁궐 같은 집이 나타났다.
마당에 차를 댄 후, 아빠랑 나는 차에서 내려서 짐을 들기 시작했다.
이젠 너무 익숙해진 팔랑거리는 치마는 내 종아리까지 감쌌다.
나는 이렇게 입는 걸 별로 안 좋아하지만,
할아버지 집에 갈 때엔 수수하게 입지 않으면 많이 당황해하신다.
입구에서반기는 강아지 2마리, 골든 리트리버 로이와 로사다.
"엄마!"
할머니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더니,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바라보는 아빠를 지나쳐 나를 꼬옥 안았다.
"와... 아들은?"
"넌 자주 보잖니."
"할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우리 아가, 오느라 안 힘들었니?"
나는 끄덕이면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는요?"
"나물 캐러 갔는데..."
"나도 갈래요!"
곧바로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옷 가방을 들고 내방으로 갔다.
내가 그린 그림들로 가득한 방에서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거울을 봤다.
몸빼바지에 회색의 박스티셔츠, 팔 토시와 목 토시를 착용하고, 밀짚모자를 썼다.
완벽한 시골 소녀의 옷차림이지만, 외모는 그렇지 못한 게 이질감이 들어 더욱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밖으로 나간 뒤, 어느새 집에 도착한 할아버지랑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이구, 우리 강아지! 이쁘게 잘 컸네~!"
나와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산을 타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산골에서 노년의 힐링 라이프를 즐기시는 할아버지다.
나는 할아버지보다 나물, 약초를 발견하고 캐는 속도가 적어도 4배는 빠르다.
물론 과거 산속에서만 살았던 나와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이곳은 아빠 소유지의 산속이라 그런지, 적어도 몇 십 년 동안 사람의 손을 안 탄 곳이 많아서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약초의 비율이 상당했다.
"송이!!! 할아버지!!! 송이버섯!"
"뭐?! 어디냐!!!"
산속을 뒤지고 있다가 '심봤다!'를 외치고 싶을 정도의 뿌듯함을 느꼈다.
보물찾기를 하는 거 같아, 살짝 동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하게 되면, 눈이 더욱 맑아져서 주변이 더욱 눈에 띈다.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다른 송이...
"허억! 할아버지..."
"할아비 바쁘다. 조심히 캐야 돼."
나는 할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툭툭 건드렸다.
"저기!"
"왜 그러... 세상에!"
내가 발견한 건 송이버섯이 뭉쳐있는 구역이었다.
원래 오늘은 두릅이 메인메뉴였지만, 잔뜩 발견한 송이로 인해 아빠는 곧바로 소고기를 사 왔다.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캐온 송이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었다.
아빠나 할아버지는 흙이 씹히는 게 싫다며 물로 헹구려고 했지만, 내가 따로 손질을 도왔다.
나는 그림 그리는 용도인 붓을 들고 와서 촤차차착 하고 흙을 말끔하게 털어냈다.
과거엔 이 송이버섯이 걸어가면 보였었는데, 요즘은 귀하긴 한가보다.
아빠는 내가 송이버섯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사주려고 했지만,
무슨 소리... 송이는 직접캐먹어야 맛이지.
재료 손질을 끝내고 가져가자, 아빠가 돌판 위에 사 온 소고기랑 같이 구워줬다.
송이와 소고기를 같이 구우면, 고기의 기름진 향이 배는 것이 감탄사를 자아낸다.
나무젓가락으로 쪼그려 앉아서 집어먹고 있으니, 아빠가 내 사진을 찍었다.
옆에서 꼬리를 흔드는 로이와 로사,
내가 고기를 하나씩 던져주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더니 다시 돌아왔다.
"그만 먹지?"
""끼잉...""
로이와 로사는 평소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먹을 거 앞에서 모르는체하는 연기가 일품이다.
밤이 찾아오고, 나는 아빠의 손길을 받아 각종 옷을 껴입었고.
마무리로 롱패딩을 둘둘 만 다음 아빠와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시골에 오면 산 공기를 마시며 쉬는 맛도 있지만, 비포장도로를 걸으며 돌아다니면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좋다.
특히 밤에는 하늘에 떠있는 찬란한 별들이 조명처럼 밝고 많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넓은 강가였다.
가는 길에 다음날 아침을 위해서, 미꾸라지를 잡기 위한 통발을 던져두고, 낚시 포인트로 자리를 옮겨서낚시를 시작했다.
나는 너튜브를 보며 한참 낚시를 즐겼지만, 손맛이 좋은 고기들은 나오질 않았다.
붕어를 잡으면 깔끔하게 다시 물가로 던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먹을 만한 물고기를 잡은 뒤에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잡은 물고기를 튀겨먹었다.
""캬....""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웃으면서 술을 마시니... 참...
완벽했던 하루가 망가지는 거 같았고, 다시 세상이 우울해진다.
'하... 졸라 땡긴다...'
시골에서의 아침이 밝아오고, 통발을 확인하니 미꾸라지가 꽤나 잡혀있었다.
역시나 도시에서 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뼈가 씹히는 걸 싫어했고,
삶은 물고기들을 갈아버린 뒤 채로 뼈를 건졌다.
아빠는 할머니를 닮아서 손맛이 좋았던 건지, 할머니는 요리를 엄청 잘했다.
팔팔 끓는추어탕에 수제비를 먹기 좋게 대충 뜯어 던져놓으니... 크흐...
추어탕이 메인이어야 하지만, 아침부터 수육을 시작으로 오이소박이들이 가득했다.
내가 우걱우걱 먹고 있으니, 다들 웃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맛있어?"
"응."
시선이 좀 부담스럽지만 어떠하랴, 이들이 나를 보며 느끼는 행복은 그걸 감수하고도 남을 정도니까.
시골에서 2박 3일을 보내고, 돌아가는 길에 내가 먹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할머니가 이것저것 반찬들을 가득 담아줬다.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앞에 짐을 놓고 3번은 왕복해야 했을 정도로...
2학년이 된 후, 첫 등교 날...
김태오와 박지훈의 싸움 실력 소문이 퍼졌는지, 우리가 지나다닐 때마다 너무 민망하게도 홍해가 갈라졌다.
나도 이 정도인데 다연이는 아예 얼굴이 딸기가 되었고, 내 품으로 들어왔다.
"시유나... 나 창피해..."
"나도..."
박지훈과 김태오는 뒤에 있는 우리를 신경 쓰지도 않는지 시선을 즐기고 있다.
둘의 성격이 참... 비슷한 점이 많다.
새로운 반에 도착하자, 역시나 나에게 꽂히는 시선들.
나랑 눈이 마주치고 얼굴을 붉히는 꼬맹이들이 여럿 보이는 게, 이번 1년도 상당히 피곤할 게 눈에 훤했다.
2학년이 되면서, 나와 다연이는 짝이 되었다.
그리고 김태오와 박지훈은 우리 뒤에 앉았다.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잠을 자는 지훈.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뒤를 돌아 머리를 펜으로 쿡 찔렀다.
"으헉!"
"공부 안 하냐?"
"크흠... 음... 그...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랄까?"
"그래, 니 입으로 내가 갈 학교 어떻게든 따라온다 안 했냐? 아가리 파이터야?"
"운동으로 가면 되지!"
"그래라... 잘 자고."
"....."
나는 다연이를 보며 말했다.
"우리 외고나 갈까?"
"...태오 못 올걸...?"
김태오는 갑자기 들어오는 다연이의 언어폭행에 충격을 받았다.
다연이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태오에게 말했다.
"아! 아니야,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응!"
"...나 때문에 목표를 포기하면 안 된다..."
나는 그런 다연이와 태오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박지훈을 쳐다봤다.
"...뭘 봐... 겨우 7점... 차이거든?"
"어휴, 존나 한심한 새끼. 그 7점안에 40명은 들어가는 걸 모르냐?"
박지훈은 일어나더니 결국 말없이 책을 펼쳤다.
공부에 집중하던 박지훈이 결국 잠에 들었다.
나는 그런 박지훈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수업을 하는 선생님을 쳐다봤다.
뿌앙!
이 새끼는 쳐 자기만 하면 반사적으로 방귀신경이 작용하는 건지, 방귀 한번 우렁차다.
푸다다닥! 뿌앙!
"".....""
'아... 이 병신 새끼 진짜...'
진짜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잘 때마다 방귀를 쳐 뀌더니, 이 새끼는 지금 싼 게 분명했다.
냄새조차 심각해서 모두 정색하며 쳐다보았고, 나는 창문을 열며 코를 막고 말했다.
"와...시팔... 두리안도 지금 먹으면 천도복숭아 맛이겠다... 이거 한 번 더 맡느니 낫또랑 삭힌 홍어, 수르스트뢰밍, 전갈 꼬치를 코스 요리로 처먹고 말지."
싸늘해진 공간 속 박지훈이 움찔거리더니 일어나서 주변을 봤다.
나는 그런 박지훈을 혐오가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엔 뭐 안 낳았냐?"
1학년 때,자다 일어난 박지훈이 했던 발언이 생각난 아이들이 웃었고.
잠결에 내 말에 대답하는 지훈.
"하늘 나는 꿈 꿨어."
이 병신은 늘 새롭게 병신 같은 소리를 했다.
"그래 병신아, 그 정도 출력이면 날긴 했겠다."
""풉""
1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며, 반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유는, 교실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 반가워하는 꼬맹이들의 대화소리 때문.
물론 그건 지훈이와 태오도 마찬가지다.
다연이가 손을 펼치며 나에게 가져왔다.
나도 손을 펼쳐서 다연이의 손에 댔고, 다연이보다 약간 작은 손바닥.
"시유니 작다... 귀여워..."
"다연아? 놀리는 거 아니지?"
"어? 당연하지!"
다연이나 나나 고생 한번 안 해본 듯한 손바닥의 감촉이었고, 다연이는 웃고 있었다.
"시유니 피부 너무 하얀 거 아니야?"
"흠... 다연이도 엄청 하얀데?"
다연이나 나나 비슷한 피부색으로, 피부가 어두운 편인 박지훈 옆에 있으면, 엄청 밝아진다.
셀카를 찍으면서 밝게 필터를 조절하면, 우리만 계속 하얘지고 박지훈은 그대로일 정도다.
나랑 다연이는 서로 맞춘 우정링을 만지작거렸다.
뾰족한 보석이 박혀있는 우정링.
다연이가 이쁘다고 해서, 블랙카드가 아닌 내 카드로 사줬다.
"맞다, 할아버지가 시유니랑 주말에 놀러 오래."
"갑자기?"
"응, 안 본지 오래됐다고 놀러 오라는데?"
"알겠어."
다연이의 할아버지 이기석.
한성의 현 지배자가 나를 왜 찾는지 설명하기 위해선 과거로 올라가야 한다.
예전에 다연이 집에서 놀고 있을 때, 이기석이 찾아와서 처음 마주했다.
과거의 나보다 어렸던 이기석은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돼서 내 앞에 서 있었고, 나는 가볍게 배꼽인사를 했었다.
처음엔 나를 단지 이쁜 꼬맹이로만 보다가, 다연이의 공부를 가르치는 모습을 발견한 이기석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자꾸 귀찮게 굴어서 대충 대답했더니, 내가 대충 대답한다는 것을 파악하고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할아버지를 닮았다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고.
그 뒤로 귀찮게 점점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연이네 꼬맹이들은 다연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이기석을 무서워하지만, 내가 무서워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솔직히... 미안하면 미안했지.
이기석을 무서워하는 꼬맹이 중 다연이는 왜 제외 하냐면, 이기석이 똑 부러진 김선화를 이뻐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언젠가 한자리를 물려줘야하는 손자보단, 회사에 관심이 없는 손녀를 더 좋아했다.
그 모습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점점 이기석은 마음속에서 정연이의 아내로 나를 점찍기 시작했다.
다연이랑 대화를 하다 보니, 이야기가 단풍잎 게임으로 흘러갔다.
"나 200억 골드 벌었어."
"오? 진짜? 큐브로?"
"아니, 저번에 사둔 코디들 값 올라서 다 팔았지롱~"
"오오... 200억이면, 다연이한테 쓸 만한 아이템 있는데... 가만있어보자..."
"너어! 또 나한테 사기 치려고! 너무해!"
"아핳."
나는 다연이의 골드를 빼먹은 적이 있다.
이것이, 실전이라며. 화투를 가르치는 부모의 마음이랄까.
다연이는 감이 좋았다.
물론 감만으로 사재기를 하기엔 단풍잎의 상인들은 쉽지 않지만, 다연이가 지식이 쌓일수록 벌어들이는 골드가 많았다.
우리는 악동처럼 웃으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워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들어왔다.
"다들 안녕~"
""안녕하세요.""
급격하게 조용해진 반에 늘 같은 일상의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이것이 평화로움이라는 생각이 들며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