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평화로운 하루(2)
나는 만화부 동아리 부장으로서 동아리 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그러므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잤다.
그때 똑똑똑 소리와 함께, 나와 같이 있던 다연이가 누구인지 확인한 뒤, 나를 깨우고는 문을 열어줬다.
"하아암."
이제 내 윗가슴까지 오는 머리길이.
JSM에서 관리를 받아서 그런지 웨이브가 깔끔했다.
다연이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사람은 1학년 남자 꼬맹이와 여자 꼬맹이, 총 2명이다.
"저... 동아리... 가입하고 싶었는데, 잘못 온 거 같네요. 수고하세요."
오호... 이번 반응은 꽤나 신선하다.
우리 얼굴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뒤로 돌아서는 2명.
"아냐 들어와 봐."
"네? 아니에요, 잘못 온 거 같아요."
때마침, 박지훈과 김태오가 돌아왔다.
박지훈의 압도적인 키와 덩치, 그리고 양아치 같은 얼굴로 인해서 겁을 먹은 1학년들.
세상 양아치 같은 얼굴을 내밀면서 꼬맹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더니 씩 웃었다.
"뭐야, 신입?"
"아닙니다!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고생하십시오!"
하지만 박지훈의 따스한 손길에 2명은 도망갈 수 없었다.
극도로 겁을 먹기 시작하는 꼬맹이들.
내가 태오에게 머리를 까딱하자, 태오가 의자 2개를 가져왔다.
"앉아."
""넵!""
내 말과 함께 정자세로 착앉는 1학년 꼬맹이들. 기합만큼은 확실하다.
우리가 의자를 가져와서 정면에 앉자, 둘이 식은땀을 흘렸다.
"덥나?"
밖은 아직 춥건만...
내가 관상을 본다고 말했던가? 이들의 외모는 꽤나 준수했다.
이건 관상이 아닌가? 아무튼.
커플링을 끼고 있는 게 사귀는 사이인가보다.
"가입하러왔다며."
"아닙니다!"
나는 길어진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씨익 웃었다.
"누나는 거짓말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앗! 만화부 동아리인 줄 알았습니다!"
"맞는데?"
"...네?"
내가 책상을 끌어오려고 하자 박지훈과 김태오가 도와줬고, 나는 이들에게 펜과 A4용지를 줬다.
"자신 있는 그림 그려봐."
""넵!""
살집이 좀 있는 남자애가 거의 벗고 있는 여자 캐릭터를 그리면서도 매우 당당했다.
'와... 비율 봐, 내 얼굴과 몸 비율에 다연이처럼 컸으면 저랬을지도...‘
생각보다 미술을 오래 배웠는지, 과한 가슴을 제외하면 엄청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옆에 있는 키 작은 여자애는 건담을 그렸다.
뭔가 둘이 바뀐 것 같아 어색했지만... 존나 잘 그린다.
여자애는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듯, 빠르게 그리기 시작하더니 뚝딱 만들었다.
"오오오... 합격. 그래서 이름은?"
"백민지 입니다."
"허준수 입니다!"
여자를 그린 남자애가 허준수, 건담을 그린 여자애가 백민지다.
허준수는 살만 빼면 괜찮을 것 같은 외모를 가졌다.
동아리실에 오자마자, 박지훈의 손길과 갑작스런 그림 테스트에.
꼬맹이들은 아직도 우리의 얼굴을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것 같았다.
힐끔힐끔 보다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둘.
"시... 시윤..."
"시윤은 반말이고 짜샤."
"죄송합니다!"
다연이는 꽤나 진지하게, 이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쓸 줄 알아?"
""네!""
"오, 그럼 설명 없이 바로 하자. 컴퓨터 앞에 앉아봐."
나와 다연이가 한 명씩 맡아서, 그림 그리는 걸 지켜봤다.
"잘하네~ 완전 합격. 지훈아 짜장면 먹자!"
박지훈이 뭐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역시 짜장면을 대답했다.
'어디가서 욕은 안 먹겄네~'
나는 짜장면이 오기 전까지, 동아리에 대한 주의사항을 말해줬다.
"흠, 규칙 적어놓은 거 있거든? 그거 읽고 숙지해."
""넵!""
나는 혹시나 해서 만들어뒀던 코팅되어 있는 주의사항이라고 적혀있는 종이를 건넸다.
- 금요일 오후 2시 대청소. 절대 빠지지 말 것.
- 침실을 사용했으면, 꼭 정리할 것.
- 자위했다가 흔적을 발견할 시... 선처 없이 퇴출과 함께 빨간 줄까지.
- 식량창고, 냉장고 안에 먹을 게 부족하면 부장 김시윤에게 말할 것.
- 외부인 출입 금지, 절대 금지.
- 혹시라도 학교에서 누가 괴롭힌다? 고민 없이 박지훈과 김태오에게 말할 것.
- 시험기간 1달 전엔 부서 활동을 중지.
내가 두 명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자 흠칫하는 두 명.
"추가로... 동아리실에서 연애질 금지다."
""넵!""
태오가 음료를 만들고 있자, 뒤에 있는 기계들을 보고 복지수준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이들.
김태오는 2개의 컵에 얼음을 담고 농축액을 담더니 뚜껑을 닫아서 하나를 지훈이에게 건넨 뒤, 둘이 열심히 흔들었다.
완성된 칵테일을 먹더니 꼬맹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칵테일이 태오 취미라서, 어때 맛있지?"
""네!!""
"이쁜 짓하면 태오가 만들어줄 거야."
""아하하...""
태오는 한참을 더 만들더니, 나와 다연이 칵테일까지 만들어줬다.
우리는 짜장면을 먹으며, 신입생들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민지와 준수는 꽤 빠르게 우리에게 녹아들었다.
솔직하게 처음 반응을 봤을 때는 적응 못할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언니~ 자요?"
무엇보다 언니, 언니하며 따라다니는 민지는 꽤나 귀여웠다.
"아니."
커다란 쇼핑백에서 전기담요를 꺼내는 민지.
"이거 선물이에요!"
나는 동아리의 규칙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줬어야 했다는 걸 깜빡했다.
"동아리에 전자기기는 무조건 부서 활동으로 번 돈으로 사야 되고, 학생부에 허가를 받아야 돼."
"에엣?"
"그치만 학생부가 나한테 빚진 게 있어서 괜찮아. 지훈이 데리고 가서 만화부에서 왔다고 말하고, 허가 스티커 받아와."
"네! 그리고 이거 드세요!"
달콤한 초콜릿과 사탕, 젤리들.
다연이보단 덜하지만, 내가 그날이라고 나를 꽤나 챙기는 민지였다.
내가 전기담요를 덮고 누워있자 박지훈이 왔다.
"야, 수업 안 드가냐?"
"몇...신데?"
죽어가는 목소리를 내자 박지훈이 내 얼굴을 확인했다.
"수업 시간 10분 남았어."
내가 생리주기마다 남들보다 아파한다는 것을 아는 박지훈은, 나를 걱정하며 천천히 깨우고는 몸을 일으켜줬다.
솔직히 엄청 잘 챙겨줘서 박지훈에게 고맙긴 하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담아 박지훈을 지그시 보고 말했다.
"입 냄새나 꺼져."
나는 한참을 박지훈과 투닥거리다가 수업을 들으러 교실로 향했다.
늘 같은 나날이 흘러가고, 나는 방과 후에 자주 고민수 선생을 보러 학원에 가기도 하고 집에도 놀러갔다.
이제 4살인 고민수 선생님의 둘째, 현지와 놀아주기도 했다.
첫째 아들인 고현민은, 내 외모에 홀려서 나를 엄청 좋아했다.
그리고 주말 아침이 되었다.
"하아압."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니, 눈앞에 알파와 베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녀엉."
""먕.""
"일로와."
13kg, 10kg짜리 고양이 두 마리가 안기니 내 몸을 가득 덮었다.
털까지 수북해서, 만지는 촉감이 좋았다.
알파는 다른 메인쿤 고양이에 비해서 더 큰 크기를 자랑했지만, 베타는 그런 알파보다 더 크다.
한참 고양이들과 뒹굴거리자 아빠가 밥을 먹으라며 불렀다.
나를 깨우기 위해 아빠가 방문을 열어줬었나 보다.
"가자."
""먕""
식탁에 앉으니, 알파가 쳐다봐서 턱을 만져주었다.
"밥 먹어."
"응."
나는 아빠말에 따라 밥을 먹으며, 아빠한테 말했다.
"맞다, 오늘 다연이네 할아버지 집에 놀러가기로 했는데."
"응, 들었어."
"몇 시에 가는 거야?"
"11시에 출발한다던데?"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니 7시다.
"왜 이렇게 일찍 깨웠어."
"알파랑 베타가 들어가고 싶대"
"허... 날이 갈수록 핑계가 새롭네..."
아빠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들어간 지 30분 지난 거 보면, 알아서 일어난 거면서..."
"그건 그래."
알파와 베타는 아빠방에 들어가면 아빠를 바로 깨우지만.
나는 유독 좀 조심스럽게 깨웠다.
알파와 베타가 우리 집안에서 정한 서열은
나>자기들>아빠 순이다.
아빠는 완벽한 집사 취급이었다.
"다연이네는 이미 준비했겠지?"
"이번에, 형수님이랑 다연이랑 시윤이랑만 간다던데?"
"왜?"
"나야 모르지?"
나는 대충 끄덕이며, 다연이에게 문자를 날렸다.
(나) - 수영하러 갈래?
(다연) - 응! 30분 뒤에 봐!
역시 다연이, 답장 한번 엄청 빠르다.
확인한 바로는, 김선화와 내 답장만 저렇게 빨리했다.
나머지는 읽고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답장을 했다.
물론 내가 알려준 방식이지만...
다연이와 수영을 하다가, 시간을 보고 준비를 하러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뒤, 복도에서 만난 다연이와 김선화.
우리의 옷차림은 평소에는 보기 힘들 정도로 럭셔리했다.
이진석에 비해 많이 어린 김선화도 이제 40대지만, 그 특유의 세련되고 농후한 카리스마가 살아있다.
아파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리무진.
이럴 때마다 다연이네가 한성인 것을 몸소 깨닫는다.
"와... 역시... 내 패션의 워너비... 오늘따라 엄청 이쁜데요?"
"진짜아~? 고맙네 후훗,"
김선화는 자신이 선물한 내 옷을 만지더니 만족한 듯 끄덕였다.
"역시... 시윤이는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니까?"
"그렇죠? 하아... 아빠가 아줌마 눈 반만 따라갔어도..."
"아하하, 우리 시윤이 진짜 빛이 나네."
"엄마 나는?"
"당연히 엄마한텐 다연이가 1순위지이~"
우리는 경호원의 안내를 따라 리무진에 탑승했다.
푹신한 차 안에 배치된 냉장고를 열어보니 전부 술밖에 안 들어있었다.
"음료수 없어요?"
내 말에 김선화가 다른 냉장고를 열어서 건네줬다.
"오."
21세기에 살짝 촌스러울법한 리무진의 주변에는 경호 차량들로 가득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탑승자가 대통령인 줄 알겠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이기석의 거처에 도착했다.
이미 네 번째 와보는 이기석의 집.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은 평범해 보일 정도로 엄청난 수준의 궁궐이었다.
무엇보다, 현대식 한옥처럼 되어있는 집안의 고풍스러운 느낌.
왜 이진석이 아파트 집안을 그렇게 꾸몄는지 알 것 같은 분위기다.
"할아버지~"
"어이구! 우리 강아지!"
다연이가 이기석을 발견하고 달려가더니 포옥 안겼다.
주변에 경호원들이 깔려있는 게, 역시 돈이 썩어나나 보다.
일은 이진석이 다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김선화는 짧지만 깔끔하고 완벽하게 이기석에게 인사를 했고, 나는 고개만 까딱였다.
"시윤이도 왔느냐!?“
나를 보며 팔을 살짝 펴는 이기석.
"뭐, 안겨드려요?"
"그럼 좋지~"
"싫어요."
"하하핳핳핳하하!!!"
호탕하게 웃고 있는 이기석은 나를 꽤나 좋아했다.
이기석은 바둑을 공부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어르신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더니 김선화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오랜만에 뵙네요."
김선화는 집사들과 인사를나누며, 이기석을 따라 손님방에 들어갔다.
나와 다연이가 자연스럽게 마당으로 향하자, 2명의 집사가 붙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진짜 과하다.
'오바긴 해 진짜... 하긴... 이렇게 펑펑 써야, 돈이 돌고 도는 거지, 아빠처럼 짱박아두면 사회 침체될 듯.'
다연이가 뒤를 보며 웃으면서 말했다.
"이모, 쿠키랑 오렌지주스 2잔 주세요."
"네~ 가져다드릴게요."
나랑 다연이가 이곳에 오면 꼭 시간을 보내는 곳이 있다.
바로 집터 뒤편에 있는 승마장이다.
말이 되는가? 집 뒤편에 승마장이 있다는 게.
벌써 3대째 내려오는 집이라지만, 그리고 지금 우리의 아지트이긴 하지만, 진짜 과하다.
나랑 다연이는 옷을 갈아입고, 한 손에 홍당무를 들고는 승마장으로 향했다.
이곳에 내 전용 말도 있다.
왜 한성이란 거대한 공룡기업의 지배자 집에, 내 전용 말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이기석 마음속에 이미 내가 가족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겠지...
나는 내 피부처럼 하얀 말을 쓰다듬으며, 홍당무를 먹였다.
그리고 다연이가 말을 타는 모습을 보고, 집사의 도움을 받아 올라탔다.
이기석의 집에 자주 왔던 다연이는 말을 꽤 잘 탔다.
난 과거에도 말을 안 타봐서 처음에는 헤맸지만, 지금은 꽤 탄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전용으로 만들어진 안장은 내 키에 맞게 올 때마다 딱 맞게 조절되어 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돈 지랄이라고 생각했지만...
집 마당에서 말을 끌고 달려봐라, 솔직히 개꿀잼이다.
이거 때문에 여기 놀러오는 거라고 할 정도로.
다연이와 까르륵거리며 말을 타다가, 나보다 체력이 딸리는 다연이가 지쳐하자 나도 따라 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타면, 허리가 아프다.
내 몸통 만한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식을 먹이고는 초원 한가운데 배치된 정자에 갔다.
이미 우리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세팅되어 있는 간식들.
계속 언급하며 말하지만 존나 과하다...
따듯하게 입었음에도 조금은 쌀쌀할 정도의 바람이 불어오자...
정자에 후끈한 열기가 채워졌다.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끈한 바람.
동시에 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유리벽이 올라온다.
이게 퓨처지... 미친....
"너무 오래 탔나봐..."
"왜? 허리 아파?"
"조금?"
"여기 잠깐 누워봐."
"응."
나는 다연이의 엉덩이와 허리를 꾹꾹 눌러주며, 안마를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