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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화 〉평화로운 하루(2) (88/99)



〈 88화 〉평화로운 하루(2)

나는 다연이와 여유로운 듯 바쁜 시간을 보냈다.
엄청난 가격대의 잉어들에게 특제먹이를 던져주고, 양궁장에 가서 활을 쏜 뒤,
이번에 국가사업 수준의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들었다는 F1레이스 경기장을 보려고 할 때.
우리를 따라다니던 집사  명이 말했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아? 옷 갈아입고 씻고 갈게요."
"예, 알겠습니다."


나랑 다연이는 샤워실에서 목욕을  뒤, 탈의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이기석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연아! 많이 기다렸니?"
"아뇨 재밌었어요."
"이 할애비가 할일이 많아서 허허..."

나는 옆에서 중얼거렸다.

"책상 위에 적힌 거 보니까 골프 약속이구만..."
"어허! 때론 진실을 모를 때가 가치 있는 법이란다."

영감 같은 말투를 시작부터 보여주는 이기석이다.
하긴, 이기석의 골프약속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모이기에,
초대를 받더라도 스케줄을 짜야 해서 오래 걸리긴 할 것이다.
아니, 스케줄이 비어있더라도 은근한 자존심 싸움으로 오래 걸려야만  것이다.

"우리 다연이, 뭐하고 놀았어?"
"시윤이랑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음...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할애비한테 골프 배워야지."
"싫어요, 재미없어."

골프라... 지금의 나는 팔 힘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이기석정도의 아마추어는 씹어 먹을 자신이 있다.

과거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골프를 사랑했었다.
그리고 골프는 항상 프로들이랑 쳤었다.

"시윤이는어떠니?"

그렇지만 나는 다연이가 재미없다고 했기에, 딱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시대엔 골프보다 재밌는 게  많지 않은가.
당구나 좀 배우고 싶긴 한데, 아빠가 꽤나 잘 친다는 말이 있으니, 아직 보류다.

"음, 저도 뭐 딱히?"
"하하핫!"

나는 다연이랑장난을 치기 시작했고, 이기석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시윤아."
"예?"
"정연이 어떠냐."

이기석의 말에 다연이가 말했다.

"할아버지!!"
"왜~ 다연이도 시윤이랑가족이 되면 좋지 않으냐?"
"음... 그것도 좋지만, 굳이 안 그래도 저는 어차피 시유니랑 가족보다 가까운데요?"

나는 다연이를 보며 생긋 웃었다.

"당연하지~"
"그치이~"

이기석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너가 보기엔 어떠냐 시윤아."

처음 질문은 남자로서 어떠냐는 장난 섞인 질문이었다면...
이번 질문은, 정연이에게 한성의 미래를 맡기기에 어떻겠냐는 질문이었다.

"만약 한성을 제가 이어받는다고 생각해 볼까요?"
"흠... 한 번 해보거라."
"아마도 파국으로 치닫을 거에요."
"왜지?"
"전 오랜 시간 차근차근 키우는 것보다, 도박을 좋아하거든요."
"흠..."
"물론 높은 확율로 도박에성공할 자신은있지만, 성공 하더라도, 그걸 쥐고 있을 손이 압도적으로 부족하겠죠. 결론은 파국이다~~"
"하하하하!"
"그럼 정연이, 아니 '정연 오빠'로 입장을 바꿔보면, 성격상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인 확장도 차근차근 안전하게 단계를 밟아가겠죠."

내 이어지는 말에 이기석이 다시 집중했다.

"....."
"요즘시대는 저 같은 스타일이 아닌, 안전하게 영역을 확장시켜가는 게 중요하더라구요. 난 답답해서 그거 못해요."
"흠... 그렇구만..."
"그리고, 정연이 오..빠 성격 지켜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약점을 극도로 숨기려고 해요. 스스로를 절제한다 랄까?"

강한성의 기억 때문일까...
오빠라는 단어는 아직도 입에 드럽게  붙었다.
그럼에도 어쩌겠는가, 이기석 앞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손주의 이름을 정연, 정연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다연이도 내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걸 처음  7살 때부터 그랬으니, 지금은 얼마나 커졌을지... 나중엔 얼마나 더 칼 같아질지 궁금해져요."
"그렇구나... 정연이가 참고 있다라."
"왜요, 할아버지 무서워하는  같아서 못 미더워 보였어요?"

나는 이기석에게 싸가지 없게 말하지만, 이기석은 그런 나를 더욱 좋아했다.

"하하하, 15살한테 마음을 들키다니 나도 다 죽었구만."
"정연이 오빠가,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기보단, 아마도 보여주고 싶은 거겠죠."
"무엇을?"
"자신의 가치를요. 지금까지는 스스로도 부족하다 생각해서 못하는 거예요, 엄청 조심스러운 오빠거든요."
"허어... 조심스럽다라."

조심스럽다.

그건 이기석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이정연은 하이에나 같달까...?
아무리 작은 먹이라도, 상대의 크기를 가늠하고 입안에 들어오는지 확인을 한 뒤에야, 확실하게 잡아먹으려고 한다.

"물론, 상대를 파악하기 전까지요."
"호오..."

 말뜻을 정확하게 인지한 이기석이다.
다연이는 옆에서 멀뚱멀뚱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이기석의 거처에서 자기로 했고, 다연이와 같은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완전 재밌었어!"
"내일 아침에 집에 가겠네~"
"응!"

다연이는  손가락을 만지더니, 먼저 잠들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다연이가 먼저 일어나서 나를 깨웠다.

"시...유나~"

잠긴 다연이의 목소리를 듣자 눈이 살짝 떠졌고, 다연이의 팔을 잡아 다시 눕히며 껴안았다.

"꺄압."
"좀만... 더... 자자,"
"일어나서 산책해야지."
"음... 그럴까...?"
"응!"

다연이가 내 품속에서 웅얼거리기에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하아으으암."

옆에서 다연이가  기지개 자세를 따라했다.
다연이와 같이 씻은 뒤, 서로의 머리를 말려주고는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향했다.
우리가 움직이자마자 원래부터 우리 뒤에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집사가 붙었다.

"좀, 쉬세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의 일인걸요?"

나는 웃으며 대화를 하는 다연이를 보고, 집사에게 물어봤다.

"할아버지는 뭐해요?"
"회장님께선 아침마다 연못에 계십니다.

이기석이 연못에 있다는 소리에, 다연이랑 나는 그대로 유턴을 해서 연못으로 향했다.

김선화와 대화를 하고 있는 이기석.
우리를 발견하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궁궐 같은 분위기에도 다행히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저은하' 라는 소리는 안 하는 거 같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편안하게 잤느냐?"
"당연하죠!"

나는 다연이의 대답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잉어들의 특제 먹이통을 보고, 함께 들어있는 주걱에 떠서 촤악 뿌렸다.

"배고파요."
"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이기석이 의자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진짜 꼴갑이다.
저런  대중화되었다간 사람들은 다 뚱뚱해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저 버튼... 솔직하게, 격하게 눌러보고 싶다.
나와 다연이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이기석.

"둘이 꼭 자매 같구나."

다연이는 조금  숏 컷을 했으며, 나는 윗가슴까지 오는 머리다.
생김새는 비슷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매 같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동생이었다...

우리는 연못 앞에서 한참 대화를 하다가,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여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지나친 것들에 비해 밥은 그나마 정상적이다.
밥을 먹고 있으니 김선화가 계란말이를 얹어주었다.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바로 밥을 입으로 넣는 나를 흐뭇한 미소로 보는 이기석.

"그래서, 어제 대답을 못 들었는데?"
"뭐요, 정연이 오빠요?"
"아버님!"

이기석이 웃으면서 김선화를 쳐다봤다.
나는 이기석을 보며 생긋 웃었다.

"흠, 고백 받아보지도 않았지만, 차는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에요."
"".....""
"그러니 좀 더 크면 생각해봅시다."






어느덧 수학여행 시기가 다가오며, 우리는 프랑스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프랑스어가 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프랑스라...
그나마 여행을 간다고 하기에 잠깐 공부한 게 도움이 됐다.
기대보다는 지저분하고 위험하기도 했던 파리...
잠깐이라도 프랑스어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손목에 사기꾼들의 팔찌가 수십 개는 끼워졌을 것이다.
물론 내 손목보다는, 외국인이 말 걸어준다고 마냥 좋아하고 있는 병신이란 단어의 끝을 파헤치는박지훈의 손목에.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나날들이 지나가며, 체육대회가 다가왔다.
우리가 1학년  했던 행동들 때문에 그랬을까, 많은 규칙이 바뀐 체육대회.

그럼에도 어차피 점수 '독식'에는 변화가 없었고.
이번에도 축구에서, 김태오와 박지훈은 완벽한 합을 보여주었다.


내가 1학년 때, 3학년 양아치 학생을 팼다는 소문이 돌면서, 나를 무서워하는 여학생들.
무슨 말도 안 되는소문인지 궁금해서 고민을 하다, 다연이를 찾다가 3학년들과 마주쳤던 날이 떠올랐다.

1학년  체육대회와 거의 똑같았지만,  가지 과거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때는 아빠의 선글라스를 몰래 훔쳤었다면, 지금은 아빠랑 커플인 내 전용 여성용 선글라스가 있다는 것.
작년 체육대회와 올해의 차이는 딱, 그정도였다.

이젠나보다 더욱 커진 다연이...
내 키가 다연이의 눈썹 아래일 정도로 차이가 난다.
이건... 내가 작은 것보다는 다연이가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집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니 아빠가 나를 쳐다봤다.

"시윤아..."
"응?"
"너무 과한  아니야?"

나는 성장이 느려지자마자 체급에 맞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땀에 젖은 새하얀 배에 선명한 복근들.

"왜?"

나는 팔꿈치를 땅에 대고 일자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요가자세를  채로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 힘을 줘서 팔과 등에 올라와 있는 잔 근육을 보고 아빠가 고개를 저었다.

"완전 근육질로 바꿔볼까?"
"...하지 마."
"나도... 끄응. 그렇게 까지 할 생각은 없어."

내 몸은 적응력이 진짜 빠르다.
보통 운동을 안 몸이라면, 운동을  뒤 알이 배겨야 정상이지만.
잠깐 쉬면 금방 팔팔해졌다.

다연이도 내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기 일쑤였다.
나는  붙는 스키니진 청바지를 입고 거울을 봤다.

봐라.

골반이 넓어 얼핏 보면 말라 보이는 길게 쭉 뻗은 다리, 그리고 토실토실한 힙과, 쏙들어간 허리.

언더아머를 입고 있어, 팔이 조금 굵은 것 같지만, 지금은 과하게 써서 그렇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 때문에  일자 어깨가 넓어 보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일 뿐, 아빠랑만 있어도 적당해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움직일 때마다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
가슴을 압박하는 스포츠용 언더아머를 입었음에도 크...

이... 빵빵함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리고 아직 15살이다.

후후후후훗...
어머니, 가슴만큼은 아빠의 유전자에게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준한 운동과 성장으로 내 몸무게는 54kg가 되었다.

"크... 아빠!!!"
"왜?"
"이거 봐바!"

나는 아빠에게 달려가서 탱글한 엉덩이를 흔들었다가, 매를 든 아빠를 발견하고 도망쳤다.

아빠가 진정을 한 뒤에, 나는 스키니진을 벗지 않고 위에 반팔 와이셔츠만 걸쳤다.

단추를 푸니, 검은색 언더아머로 인해  영혼이 담긴 가슴이 이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스키니진의 안에 셔츠를 넣고, 거울을 보면서 혼자 감탄사를 자아냈다.

마무리로 작은 키 때문에, 힐에 적응하려고 집에서 힐을 신어봤다.
균형 감각이 좋은 나지만 생각보다  빡세다.

무슨 하이힐이 점핑 부츠보다도 중심잡기가 힘들다.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거실에서 또각또각 걸어가니 아빠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안 그래도 다리 엄청 긴데 그러니까 징그러워."
".....아니야."

내가 거울로 가서 확인하니 몸의 2/3 이상이 다리였다.

"....."

특히 눕혀져있는 거울을 보면 아빠말대로 징그럽다.
결국 나는 엄마 방에 들어가서, 에어가 들어간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야! 그거 신는 용도 아니야! 컬렉션이야!"
"난 아빠처럼 신발 모으는 취미 없거든?"
"한정판인데... 그거..."
"내가 신는 게 아까워?"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하이힐...어울...“
"...?"
"미안."

아빠는 내 표정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사과를 했다.
 운동화로 바닥을 비비니 '삐삑!' 하며 마찰음이 들렸고 아빠의 동공이 확장됐다.

"안 돼!! 그러지마! 조심히..."

아빠는 내 얼굴을 보더니 멈칫했다.
내가 다가가자, 당황해하는 아빠.

"아니... 그게 아니고."
"운동화가 아깝냐고..."

나는 바닥을 다시 비볐다. 삑삑! 삐비비비비비빅!
아빠는 눈을 질끈 감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으아... 따...딸이라면... 다... 줄 수 있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작업실로 들어가는 아빠를 쳐다봤다.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사진을 찍다가 소파에 앉았다.

엄마 방에 있는 아무 운동화나 신고 왔을 뿐인데, 왜 안절부절 못하는지 이해가 안가서, 신발 케이스 안에 같이 들어있던 종이를 검색해봤다.

허.....

나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신발을 조심히 벗고, 잘 포장해서 올려놨다.

고작 두 번... 아니  과하게 두 번 바닥에 비볐다고... 가격이 떨어지진 않길 빌면서.
아빠가 신발  모은다고 우습게 본 내가 잘못이다.

내가 아빠였어도 아까웠을 정도...

나는 아빠의 취미가 담긴, 컬렉션 방에 들어가서 신발의 가격들을 확인했다.
특히 유리 상자에 담긴 신발...
조명까지 비추고 있기에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나는 검색해보다가 끄덕였다.

부르는 게 값이란 소리를 단풍잎 게임에서만 했었는데, 이거 한 켤레에 슈퍼카를 뽑는다...
나의 아빠는 남아도는 돈을 이런 데에 꼬라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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