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평화로운 하루(2)
오랜만에 아빠도 없겠다,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은 뒤, 집에 불을 전부 끄고 알파와 베타를 쓰다듬으면서 영화를 시청했다.
영화만 봐도 세상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캬..."
이번에 한 번 사용해보라며 이진석이 선물로 보내온 신제품 TV는 내가 영화 속에 들어간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무생각 없이 왼팔로 베타를 쓰다듬고 있으니, 알파가 내 오른손을 살짝 물었다.
세 마리를 키웠으면 발까지 사용해야할 뻔했다.
영화 한편을 다 볼 때까지도 아빠가 안 오기에, 나는 오랜만에 에일리안 영화를 틀었다.
가슴속에서 뿌직하고 튀어나오는 장면은 언제 봐도 새롭다.
한참 고양이들을 껴안으며, 영화를 보고 있을 때 아빠가 돌아왔다.
"시유나~"
"어? 아빠 왔어?"
"시유니가 좋아하는 초밥 사왔지롱~"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을 안 먹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빠에게 말을 걸며, 한 손으로 리모컨을 들고 에일리안을 껐다.
술에 취한 아빠가 잔소리를 한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다.
같은 얘기를 수백 번이고 반복하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아빠가 초밥을 포장해온 봉투를 받았다.
취하긴 했지만, 저번처럼 만취상태가 아닌걸 보니, 두 병 정도 마셨나보다.
아빠는 흥얼거리다가 무언가 번뜩였는지, 작업실로 들어가더니 10분 뒤에 나왔다.
그리고 씻고 나오는 아빠.
내가 핸드폰을 보면서 초밥을 우물거리며 천천히 먹고 있자, 머리를 말린 아빠가 다가왔다.
"시윤아."
"응?"
"드라마 제의 왔는데..."
"무슨 드라마?"
"내 사랑은 구미호였다 2!"
내 팬들은 진짜 심각하도록 아직까지 구미호 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듣네."
"응! 시윤이가 한다고 하면, 바로 제작 시작할거래."
여러 가지 파격적인 조건들도 받아봤지만, 내 촬영 여부에 따라 제작을 결정한다는 게 신기하긴 했다.
"아마, 한다면... 언제랬지? 촬영 시작까지 2년에서 3년 정도 걸릴 거래,"
"아빠는 했으면 좋겠어?"
"응!"
"또 내 출연료 생각 안 하고 왔지?"
"이거 제작비 거의 다 낫플릭스에서 대준다고 하던데?"
그 말로 충분했다.
대본이랑 스토리가 완성되고 허가만 난다면, 돈이란 돈은 전부 꼬라박을 것이다.
특히, 나를 중심으로 찍는다는데... 내 회당 출연료는 지금까지와 큰 차이를 보일 게 분명했다.
아빠의 인지도가 높기에 어쩔 수 없이 딸인 내 외모도 엄청난 조명을 받는다.
"오랜만에 하고 싶긴 하네. 나도."
"그치?!"
나는 아빠와 평화로운 대화를 나누며, 술 냄새와 함께 초밥을 먹었다.
등교를 하고 점심시간이 되니, 민지가 급하게 나를 찾았다.
"언니! 언니! 시윤 언니!"
"왜, 나 안 죽었어."
"어뜩해... 준수가..."
"준수? 무슨일 있어?"
준수는 여름방학이 지나고, 운동을 하더니 살이 쪽 빠졌다.
"준수가 애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나는 평화로운 동아리실에서 잠을 자다 갑작스럽게 뜬 팝콘 각에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안 그래도 지루했는데, 캬... 팝콘 각이 날카롭게 잡혔다.
"어딘데?"
"분리수거장이요!"
"매점 들려서 팝콘 좀 사갈까?"
"무슨 소리에요 언니!! 빨리 와요!"
"쳇."
나는 안절부절 못하며 급하게 움직이는 민지의 안내에 따라 느긋하게 움직였다.
무슨 일인지 준수는 분리수거장에서 4명에게 맞고 있었고.
나는 멀리서부터 동영상을 찍으며 다가갔다.
때리던 애들은 우리를 발견했는지, 준수를 때리던 행위를 멈추며 으쓱였다.
"뭐야, 왜? 하던 거 안하고."
"...합의 된 건데 폰 치우시죠."
"4명에서 한명을 패는 게 합의된 거라고?"
한 꼬맹이가 준수를 발로 툭툭 건들면서 말했다.
"야, 니가 말해 병신아."
오... 이놈들은 든든한 빽 좀 있나보다, 촬영을 하는데도 당당하다.
민지는 울먹이며 준수에게 달려갔다.
"하지 마!"
"얼씨구, 오타쿠새끼 주제에 여친이 막아주네."
민지에게 손을 올리려고 하기에, 나는 가볍게 '왼손의 스턴건'을 먹여주었다.
투욱 소리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쓰러지는 꼬맹이.
털썩.
"".....""
"하다하다 여자한테까지 손을 올리네, 야 이것도 합의된 거냐?"
3명의 꼬맹이들이 상황을 인지하기위해, 잠든 꼬맹이를 쳐다봤다.
무엇보다 민지와 준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니면... 나랑도 합의보고 싸울래?"
야외였음에도 이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렸다.
그때 잠시 그로기에 빠졌던 꼬맹이가 일어났다.
"뭐야..."
잠시 상황을 파악하더니 얼굴을 팍 구기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이가 없네... 너가 먼저 했다?"
존나 초라하게 잠든 주제에 당당하다.
나에게 달려드는 꼬맹이에게 박지훈도 못 피할 속도로 왼손 잽을 꽂은 뒤,
다시,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꼬맹이에게 오른손을 털며, 가능한 힘을 빼고 스트레이트를 꽂자,
머리가 덜컹 하고 돌아가더니 이번엔 깊게 잠들었다.
"존나 못 싸우면서 아가리는... 병신, 그래 내가 먼저 했다 새끼야, 뒤질라고 팍 씨."
"".....""
나는 동공이 흔들리는 꼬맹이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유가 뭐냐?"
"저... 그..."
"말하기 싫은가보네, 그럼 서로 부모님까지 대동해서 대화하자 우리."
"오해를 하시는 거 같은데, 진짜로 얘가 먼저 싸우자고 했어요."
"...? 이유는"
"저희 입으로 말하긴 뭐한데... 저희가 옛날에 괴롭혔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몸 좀 좋아지더니..."
"...? 오우야 X됐다."
나는 빠르게 기절한 꼬맹이를 깨웠다.
"야 잘 잤냐? 아, 아니 이게 아니지, 괜찮냐? 존나 미안해지네. 야, 허준수."
"...네."
"그냥 니 스스로 좀 쎄진 거 같아서 덤빈 게 맞아?"
"...네."
"3류 양아치도 자기 힘 좀 시험해본다고 남 때리는 짓은 안하겠다. 그리고 민지 너는... 하아..."
"아니에요! 쟤들이 준수한테... 여자들 사이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학교 외모 투톱인 시윤 선배랑 다연 선배 전화번호 달라고, 준수한테 막..."
듣고 있는 꼬맹이들의 표정을 보니, 민지의 말이 맞는 거 같았다.
"ㅈ...지랄? 어이가 없네, 우리가 언제 그랬냐?"
나는 자고 있는 꼬맹이를 깨우는 행동을 멈췄다.
이거 팔랑 귀가 돼가는 거 같은데.
나는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일어났다.
"와 씨... 아빠한테 혼날 뻔했네, 너네 표정만 봐도 민지가 진심인걸 알겠다."
"".....증거가 없는데요?""
"에이, 너희가 빽 있는 것처럼 우리 빽도 있는 거 알잖아?"
갑자기 꼬맹이들이 씩 웃더니 나에게 녹음기를 꺼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병신들, 나도 있거든?"
나는 동영상을 틀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오, 니들 얼굴까지 아주 잘 찍혔어."
"".....""
"꼬맹이들이 나를 상대로 협박까지 하네, 학교생활 아주 즐겁게 해줄게."
나는 민지의 어께에 팔을 걸치고, 박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넌 꼭 필요할 때 없더라 병신새꺄, 분리수거장으로 튀어와."
-"왜? 무슨 일 있음?"
"준수 뒤지게 맞음."
-"야, 준수 맞고 있다는데?"
전화는 자연스럽게 꺼졌다.
그리고 기절했던 꼬맹이가 깨어나며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매점방향에서 뛰어오는 박지훈.
"준수야아아아~"
나는 박지훈에게 핸드폰을 던져줬고, 박지훈은 핸드폰을 받아서 영상을 봤다.
"소리만 들어도 너가 저기 흙 묻은 애 때린 거 알겠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이거 누구야?"
내가 검은색의 속티를 입은 꼬맹이를 지목하자, 심각해져만 가는 사태에 꼬맹이가 움찔했다.
"오... 병재 알지? 나랑 아는 사인데, 걔한테 말해둘...?"
꼬맹이들의 반응은 병재가 누구기에 기겁하는 표정을 짓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잘못했습니다!!""
"괜찮아, 너네랑 잘 놀아주라고 말할게 걱정 마... 너네 전화번호 좀 알려줄래? 괜히 너네 찾겠다고 내가 돌아다니는 상황이 오면 더 빡칠 거 같아서."
갑자기 자신의 이름표가 안보이도록 머리를 푸욱 숙이는 꼬맹이들을 보며 의아하긴 했다.
박지훈보다도 무서워하는 꼬맹이가 있다는 거에.
내가 민지에게 아는 사람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민지가 설명해줬다.
"그... 아버지가 건달인 친구 있..."
그건 박지훈도 처음 듣나보다.
"그래? 그건 몰랐네? 그냥 우리 체육관 다니고 있는 후밴데."
박지훈은 핸드폰으로 이름표를 촬영으며 끄덕였다.
"학교생활 재밌게 해~"
"".....""
"대답도 없네...?"
""예!""
"그래 그래, 또 보자~"
나는 지훈이를 두고 민지와 준수만 데리고 동아리실로 향했다.
그리고 축 처져있는 준수의 뒤통수를 '따악!' 때렸다.
"규칙 안 읽었냐?"
"네?!"
"그런 일 있으면 말하라고 써져 있었을 건데."
"죄송합니다."
"의리? 가오? 그딴 거 필요 없어, 바로 신고부터 박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네."
"얼굴 다 까졌네, 동아리실에 구급함 있으니까, 치료부터하자."
"네."
준수가 2D여자를 좀 지나치게 좋아해서 그렇지, 참된 애다.
게다가 여자 친구인 민지가 있으니, 시선을 돌리기 힘든 외모를 소유한 나나 다연이에게도 시선을 둔 적이 없었다.
나는 내 외모를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어서, 다른 이와의 스킨십은 가능한 자제한다.
괜히 손이라도 만졌다가는 상대방이 성녀를 영접한 것 같은 표정과 함께 결혼까지 생각하기에.
그래서 구급함을 꺼내 민지에게 건넸다.
다음 수업은 음악시간이었고, 나를 데리러 온 이들,
"시유나~ 음악실 가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는 박지훈을 보며 말했다.
"잘 해결했어?"
"내가 옛날부터 뒤처리 하난 끝내줬지."
"그래, 네 똥 굵다."
나는 준수와 민지를 보며 말했다.
"믿고 바로 달려왔던 건 잘했어."
"네!"
"오늘만 동아리실에서 연애하는 거 허락할게."
""...네?""
당황한 눈으로 나를 보는 민지와 준수를 두고 동아리실 문을 닫고 나왔다.
우리가 빨리 와서 그런지 음악실에는 학생이 몇 없었다.
"야, 피아노 쳐줘."
"꺼져."
갑자기 박지훈이 다연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싫어, 시유니가 싫다자나."
나는 다연이를 보며 생긋 웃었다.
"우리 다연이가~ 원한다면 100번도 넘게 쳐줄 수 있는데~"
"그럼 나도 당연히 듣고 싶어!"
다연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피아노 앞에 앉았다.
시선이 집중되는 꼬맹이들, 얼마 전 음악시간에 수행평가로 친 피아노가 소문을 탔었다.
뜨드든~
피아노 앞에 앉으며 건반을 살며시 눌렀다.
손가락이 짧아서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나는 꽤나 많은 곡을 편하게 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아빠랑 장난삼아 편곡한 노래를 치려했다.
모짜르트의 터키 행진곡.
내 손을 타고 사람들에게 익숙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원곡보다 조금 더 경쾌하게 빨라진 속도에 반 전체가 조용해졌다.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건반을 누르는 손길에 다연이가 눈을 더욱 반짝였다.
연주가 끝나자 입구에서 들리는 박수소리.
음악선생이었다.
"크... 완벽한 편곡이었다."
"앗, 안녕하세요.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인사를 한 뒤, 자리로 가서 앉았다.
시간이 흘러,여름방학이 다가왔다.
민지가 계곡으로 동아리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아빠만 설득하면 되지만, 다연이가 움직이려면 적어도 5명 이상은 따라붙는다.
태오가 박지훈이랑 자주 스파링을 하면서 실력이 늘어날수록, 그에 비례해서 다연이의 부탁으로 경호원의 수가 엄청 줄었다.
그럼에도 많은 편이긴 하지만.
다연이가 엄청나게 기대를 하고 있어서, 나는 이진석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나는 수영복을 고르다가 혹시나 해서, 엄마의 방에 있는 수영복을 찾았다.
"와오..."
가슴이 없는 엄마가 귀여운 스타일을 입었을 거라 생각한 내가 틀렸다.
그리고... 크흠... 나이를 먹고 엄마의 옷장을 뒤져보니 이제야 보였다.
생각보다 야한 옷이...
나는 속옷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옷들을 보며 벙쪘다.
생각보다 내 자신이 아직 순수함을 느꼈다...
나는 엄마의 수영복을 가져온 다음 아빠에게 보여줬다.
"어때!"
"너, 17살까지... 안 그런다 했잖아..."
"칫."
나는 아빠의 생각보다 좋은 기억력에 아쉬워하며 옷들을 돌려놓았다.
"아빠가 필요한 거 다 챙겨놨어 한 번 확인해봐."
나는 아빠가 싸놓은 캐리어를 열었다.
이게 필요할까? 싶은 것까지 전부 들어있는 캐리어 안.
"이동수단은 뭐로 하기로 했어?"
"나 생각해보니까 버스나 전철 처음 타본다?"
아빠는 잠시 생각하더니 끄덕였다.
"그렇네...?"
"이래서 부자들이 욕먹나 싶어~ 버스비도 모르니까. 아무튼 지훈이나태오가 딱 붙어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그리고 솔직하게 걔네 둘이 덤빈다 해도 내가 이겨."
"아하하핳."
난 진심을 담은 말이었지만, 아빠에겐 장난으로 들렸나보다.
내일을 위해 운동을 시작하자 아빠가 소파에 앉아서 나를 지켜봤다.
"...일자복근만 있어도 예쁜데... 식스팩은... 너무 과하다 시윤아..."
내 잘록한 허리에 그렇게 선명하진 않지만 깔끔하고 예쁜 복근이 새겨져있었다.
"흠... 그렇게 과하진 않은데?"
"너가 더 하려고하니까 그렇지..."
"아니야, 나도 막 징그럽게 만들 생각은 없어, 그리고 그냥 씻기 아깝잖아 땀 빼야지."
요가매트 위에서 스쿼트를 하다가 점점 과한 동작을 하자 아빠가 말을 잃었다.
"...요가를 하라고 사준 건데..."
"좋은 게 좋은 거지... 끄응. 그리고 마무리로 후우... 해주거든?"
나는 세트를 나눠서 운동을 하면서 아빠랑 대화를 나눴다.
운동을 끝낸 뒤, 이어서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
뭉친 근육들도 풀어줄 겸.
"아빠."
"응?"
"안마해줘."
아빠는 바로 일어나더니, 내 몸의 근육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으읏... 하악... 흐극... 아퍼...살살..."
"시윤아... 말 좀... 아빠 피곤해..."
내가 신음소리를 과하게 흘리자 아빠가 급격하게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아하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