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3학년.
시간이 지나, 나는 다연이와 함께 처음으로 한성 본사에 왔다.
아니, 뭐 국내 2위라고 해서 정말 큰 빌딩 사옥 하나정도 있으려나 했는데...
어마무시한 크기의 건물 3개가 붙어있었고, 건물들을 둘러싼 장대한 공원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집 타워팰리스도 잘 되어있다 생각했는데, 여기와 비교하기도 우스운 정도였다.
거의 레고로 만든 건물과 실제로 지은 건물 수준의 차이...
아빠랑 같이 건물에 들어가는 이진석의 뒤편에서 우르르 따라다니는 임원들.
나랑 다연이 뒤에도 김태오를 중심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이 따라다녔다.
오케이 인정한다.
다연이는 이 건물 안에서 만큼은 소설 속에 나오는 공주 못지않았다.
솔직히 개쩐다.
이진석 일가에 대한 대우를 보니 참... 감탄이 나올 정도.
김태오는 본사에 오자마자 칼같이 자세를 잡으며, 우리를 두고 HSW 경호원들이 있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다연이를 따라, 건물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3개의 층밖에 갈 수 없는 엘리베이터.
"아빠네 방이랑 할아버지네 방 직행이야~"
참... 기가 막히다.
가장 위층을 누르니 빠르게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는, 유리벽 너머 이기석의 방이 보이는 곳에서 문이 열렸다.
이기석은 앉아 있다가 유리벽 너머로우리를 발견하더니 놀란 눈을 뜨고 일어났다.
"우리 이쁜 강아지들! 왔느냐!"
"할아버지~"
이기석은 다연이를 안아주더니,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건물 외관은 현대기술의 끝을 보여주면서, 내부는 참... 고풍스러운 거 좋아한다.
나는 이기석과 눈을 맞췄다.
"나도 왔는데요?"
"그래! 이리로 오렴!"
"싫어요, 노인 냄새나요."
"하하핳하하하핳!!!"
한참을 호탕하게 웃던 이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
"처음 와보지 않느냐? 구경은 해봤고?"
"저도 궁금하긴 한데, 뭐 더 굳이 안 봐도 될 것 같았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외부랑 여기만 봐도 '대한민국의 상위 1% 인재들은 한성으로 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겠던데요."
"하하하, 그렇구나."
이기석은 나를 위아래로 보더니 음흉하게 웃었다.
"수뇌부가 궁금하지 않느냐?"
"제가 다 기억해서 정보 빼돌리면 어떻게 하시려구요?"
"그렇다면,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해야겠지. 근데,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하겠느냐 하하핳! 돈이라면 네 애비가 나보다 현금이 많을 게다"
"그 정도에요?"
"흠... 전에 한성물산 건물을 지으려고 서울의 땅을 알아봤더니, 그 주변 부지들이 대부분 네 애비 명의더구나 허허..."
"와오..."
"참... 나도 그렇게 배포가 큰 사람을 처음 봤다. 당시에 너를 잘 봐달라며, 1만 평 가까이 되는 땅을 그냥 준다고 했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공짜로 받았어요?"
"사업을 하는 사람이 공짜를 좋아하면 안 된다. 경영인은 수지타산에 맞게 행동해야지... 그래서 전부 정가로 구입했다."
"오... 날로 드셨네요?"
뒤에 붙어있는 부지만 봐도, 가지고 있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해서 오를 땅이다.
어디까지 오를지 예측이 안 될 정도로.
"하하핳핳핳하! 공정하게 준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경영인으로서 감점이다.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다."
나는 선물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자, 하나의 사진을 보여줬다.
HSW라고 적혀있는 을지로 역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었다.
먼 훗날이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아빠가 준 땅보다 더 가치가 높은 서울 역세권의 고층 건물.
거기에 법이 개정되면서, 더 이상 해당 지역에 저것보다 높은 건물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준다고요?"
"예끼 이눔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되겠느냐!"
"그럼요...?"
"입구는 지하에 따로 있고, 이곳 옥상, 52층과 53층은 내가 살던 곳이다."
"아 뭐야... 저도 집 있거든요? 그리고 아빠가 해준 밥 먹어야 해서 밖에서 못 살아요~"
"파티룸으로 꾸며 놨다."
"...콜."
"당연히... 네 명의로..."
"소녀... 할아버님의 옥체를 한 번 안아드려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오거라."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다연이는 웃으면서 우리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파티룸이 어떻게 꾸며져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아무 것도 없으면 뭐부터 사야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기석이 따로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아쿠아리움을 방불케 하는 공간과, 각종 오락시설, 야외 수영장 등.
파라다이스가 펼쳐져있었다.
무엇보다 나이에 맞게 인테리어를 주기적으로 바꿔준다는 것...
미쳤다 정말로.
담당자가 명함을 주면서 가능한 사용하기 전날에 말해달라고 한다.
당일에 말하면 어떻게 되냐니까, 한성 마케팅부 사람들이 사용상 편의를 위해 준비하는시간이 촉박할수록 점점 바빠질 뿐, 이용하는 것에 달라지는 건 없다고 한다.
시간을 두고 원하는 걸 말해준다면, 이기석의 허락에 따라 이뤄준다는 게 참... 기가 막히다.
다연이와 나는 파티룸을 나와서 본사 내부를 탐방했다.
사원증? 임시 출입증? 관계자 외 출입금지? 그딴 거 없다.
그냥 다연이 앞장세워서 돌격하면 된다.
회사 안 어느 공간이든 프리패스인 다연이의 얼굴...
다연이를 발견하고 치근덕대는 어른들이 많아서 다연이가 귀찮아하며 불편한 티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다연이를 보고 대신 말을 꺼냈다.
"저희가 알아서 구경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염치가 없었군요. 하하."
내 말에도 극존칭을 쓰는 사람들.
전에 서울에 있는 지사에서,
다연이랑 신나서 돌아다니다가 나에게 함부로 말한 임원급 인사가 있었다.
그대로 지방으로 좌천된 임원.
생각보다도 서열이 높았던 임원이었는지, 그 뒤로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거의 한성의 직계를 건드린 것과 같은 조치를 했던 이기석이기에...
험악한 분위기로 회의를 하거나 토론을 하다가도, 나와 다연이가 지나가면 고요해졌다.
와... 이게 재벌가의 삶인가...
부러움이 섞인 시선들도 보이고,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깃든 시선들도 가득하다.
무엇보다 말단 사원부터해서 보이는 사람들 전부, 대한민국 상위 1% 사람들...
지나가서 아무나 잡고 모교를 물어본다면 한국대, 혹은 유수의 해외대학 출신일 것이다.
외국인도 겁나 많은 게 10명 잡고 물어보면 무조건 하버드 나온다, 이건 장담한다.
"끄아아아! X됐다!!!"
"저희 어떻게 합니까!?"
"그걸 왜 안 가져와서..."
"미안하다..."
갑자기 소란스러운 방안.
다연이와 내가 얼굴을 빼꼼 들이밀어 보니, 회의실에 4명이 있었고, 그 중 아빠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이 자신의 머리를 잡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하아... 과장님한테 엄청 까이겠네... 야 재훈아 회의까지 몇 시간 남았냐?"
"4시간 남았습니다."
"아... 진짜..."
잠시 노트북에서 시선을 뗀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히이이익!!!!""
그리고 옆에 있던 재훈이라 불린 남성도 같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귀신이라도 본것 마냥 기겁했다.
다연이가내 눈치를 봤고,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네,넵!!! 안녕하십니까!"
"구경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투덜거릴 땐 언제고 갑자기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3명, 아빠 나이의 남성이 우리에게 의자를 가져다 줬다.
"커피라도... 한... 아니, 음료수라도 드릴까요?"
나는 갑자기 놀리고 싶은 마음에 찌릿 쳐다봤다.
"앞에 말한 커피는 왜 취소한 거예요?"
내 질문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남성.
잠시 고민하더니 대뜸 사과부터 박는다.
"죄송합니다!"
"이유는?"
"싫어하실 줄 알았습니다."
"왜죠?"
"제 조카가 아가씨랑 나이가 비슷한데... 커피를 싫어해서 아가씨도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 변명이다.
"그럼 음료수라도 줘 봐요, 아이가 좋아할 것 같은 걸로..."
"...네!"
내가 장난친 건 이 아저씨 하나였지만, 더욱더 식은땀을 흘리는 3명...
다연이가 괴롭히지 말라는 듯이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나는 다연이에게 웃어보였고, 다연이는 나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음료수를 가지러간 아저씨가, 손님용 컵을 찾아서 알로에를 담아줬다.
'와... 골라도 하필이면 이걸...'
이 음료수는 다연이가 서걱거린다며 엄청 싫어하는 음료수였다.
"".....""
X된 것 같은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창백해지기 시작한 남성.
착한 다연이는 남성의 성의를 생각해 억지로 먹으려했지만, 힘들어보였다.
"와, 다연이 진짜 착하다... 입도 못 대는 알로에 음료를 마셔주네..."
"시유나... 그러지 마... 나 괜찮... 으으"
"죄송합니다!"
이들의 식은땀 때문인지 회의실이 후끈 달아올랐다.
"너무 덥지 않아요?"
재훈이라는 남성이 내 한마디에 빠르게 에어컨의 온도를 낮추더니 다시 빠르게 앉았다.
칼 각 봐라, 이정도면 70년대 군인들보다 각이 잘 잡혀있다.
저기 보이는 언니도 흔들리는 동공으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동공이 저렇게 흔들리는데 뭐가 제대로 보이긴 하나?'
"우리 다연이, 커피 좋아하는데 그치이?"
심각하게 떨리는 아저씨의 눈을 보고 있으니 안쓰럽긴 하지만, 아빠를 놀리는 것 같기도 해서꽤나 재밌다.
나도 꽤나 악취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만하기로 했다.
"4시간 뒤에 무슨 회의가 있는데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말하는 아저씨.
"이번, 차세대 핸드폰에 들어가는 부품들의 안전성과, 협력업체인 중견, 중소기업들과의 계약 내용, 초창기 개발 비용 등 차후 사업의 방향성과 기획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말만 들어봐도 내가 건들고 싶어도 못 건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와줄 수는 있지.
"왜 시간이 부족해요?"
"완성해둔 PPT를 연습한답시고 멀리 있는 본가에 두고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만드는 거고요?"
"예..."
"원래 여분 안 만들어요?"
"제가 최종으로 합치는 거였어서..."
"시간은 얼마나 필요한데요?"
"적어도... 4시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 여기 있다고 말하고, 회사 안내해주고 회사 일에대해서 설명해주느라 회의 2~3시간 미루자고 해봐요. 따지는 사람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주고요."
그재서야 화색이 든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화색이 돈 아저씨를 보고 생긋 웃었다.
"다연이 커피..."
"아... 예!!!"
나는 의자를 움직이며, 이들이 만들고 있는 자료를 지켜봤다.
끝없이 나열된 문서들에 눈이 어지럽다.
"음...? 저기 맞춤법 틀렸어요."
"아! 감사합니다."
"하나하나 감사하다고 하게요? 그냥 빨리 수정해요. 여긴 영어 스펠링 틀렸구..."
나는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중견기업 공장에서 실리콘 45t......?"
"이건 미래 예측이라면서 너무 현실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하나씩 지적하자 경악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회의 1시간 더 미뤄요."
"넵!!"
"신소재... 이유가 있어서 개발하는 거예요?"
"예, 비슷한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기업이 일본에 있긴 하지만, 수입에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할 뿐더러, 일본 측에서 생산을 중단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소재사업 인수를 통한 수직계열화..? 이건 또 뭐에요?"
"아 넵... 방금 말씀드린 신소재처럼 원자재 생산부터 완제품 제조 및 판매까지 계열사로 운영하는 겁니다. 그래서 특히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신소재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기업을 인수하려는...... 그래서 이 수직계열화를 다시 말씀드리면..."
"그만! 이해했으니까 한 번만 말해요."
"앗... 죄송합니다."
"일단 노트북 줘요."
나는 아예 노트북을 뺏어서 틀린 글을 수정하며,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다연이도 내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나보다.
아직이 프로젝트의 50%도 이해가 안됐지만, 이정도로 만족하고 노트북을 돌려줬다.
"맞다 아저씨?"
"네?!"
"위에서 뭐래요?"
"얼마든지 시간 준다고, 아가씨들을 잘 모시라고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고, 문이 덜컹 열렸다.
누군지 확인하고 기겁을 하는 4명.
"아빠!"
다연이의 아빠 이진석이다.
뒤에서 나를 보기위해 얼굴을 빼꼼 내미는 우리 아빠도 있었다.
"아빠 일로 와봐."
"응!"
역시 내가 부르면 5초를 넘긴 적 없는 아빠가 방긋 웃더니, 내 뒤에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하다 왔어?"
"형님이랑 낚시 여행계획 했는데?"
"굳이 여기에서?"
"응응, 형님이 바쁜 척 해야 된대."
이진석의 얼굴이 급격하게 썩어 들어갔다.
후훗, 우리 아빠는 내 앞에서 비밀따윈 없다.
밝게 웃으면서 말하는 아빠의 발언은 꽤나 폭탄이었다.
"아저씨 바쁜 척 다했어요?"
"...크흠 그렇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엄청 잘 챙겨줬어요, 바쁜데도 놀아주고."
"호오..."
"저희도 더 놀고 싶어서, 회의 좀 늦추자고 땡깡 부렸는데 괜찮죠?"
"물론이지."
이진석은 옆에 있는 비서에게 무언가 말하더니, 이들의 이름을 적어갔다.
알수 없는 쾌감이 몰려오는지, 기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꽤나 볼만했다.
"아저씨."
"응?"
"다연이 낚시 잘하는 거 알아요?"
"정말이니?!"
"저번에 알려줬는데 다연이가 재밌어하던데요? 그치 다연아?"
"응! 재밌었어. 내가 아빠한테 말하려했는데, 시유니가 말했네..."
"앗... 빨리 말하지..."
"하하핳 장난이야~"
이진석은 반짝이는 눈으로 다연이를 쳐다봤다.
"다음에 아빠랑 낚시 갈까?"
"시유니랑 아저씨도 같이!"
"물론이지~"
이진석은 요즘 자신이 사랑하는 딸 다연이랑 어색해진 것 같아, 뭐라도 같이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오... 부녀끼리 다음에 붕어 낚시하러 가요."
"상당히 좋은 생각이다."
"그쵸?"
오늘 이후, 한성에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다연이와 내가 놀러왔을 때, 선택을 받으면 초고속 승진이 가능하다는 것과 함께...
내가 한성 후계자의 예비 며늘아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