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준비 중 3
우진은 좁은 가게를 비집고 들어서는 사람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자세히 살펴봤다. 남자임에도 상당히 여리여리해 보였고, 키도 서양인치고는 굉장히 작았다.
캐리어까지 끌고 들어오다 보니 가게 안에 서 있을 장소도 없었다. 매튜는 다시 가게를 살펴보더니 자신의 캐리어에 앉았다.
좁은 가게인지라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진은 혹시 손님인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맡기실 건가요……?"
"네? 어라? 제이슨 씨한테 얘기 못 들었어요?"
"제이슨이요? 잘 모르는데……. 혹시 잘못 찾아오신 건."
"아까 임우진 씨 맞다면서요. 제대로 찾아왔는데. 얘기를 안 했나?"
우진은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제이슨이란 이름을 떠올려 봤지만,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 제프 씨는 아세요?"
"제프 씨요? 제프 우드요?"
"하하, 맞나 보네요. 정말 잘못 온 줄 알고 깜짝 놀랐네요. 제프 우드에서 파견 온 사람입니다."
"파견이요?"
얼이 나간 우진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러자 매튜가 차분히 설명을 했고, 우진은 그제야 제프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직 숍 시작도 안 하셨죠?"
"네, 아직인데……."
매튜는 고개를 끄덕거리니 가게를 둘러봤다.
"일단 여기는 좁아서 움직이기도 힘드니까 나갑시다. 근처에 조용하게 얘기 나눌 만한 곳 있나요?"
***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긴 매튜는 몇 번의 연결을 걸쳐 제프와 통화를 했다. 우진이 전화를 건네받자, 제프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그저 매튜를 믿으라는 말을 하고는 끊어버렸다.
"확인되셨으면 얘기 좀 해보죠."
"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말씀해 보시죠."
"왜 저한테 매튜 씨 같은 분까지 보내면서 도와주려고 하시는지……."
"흠…… 그건 직접 물어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제가 그분 생각을 전부 아는 것도 아니고요."
매튜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카운터에 가서 말도 통하지 않을 텐데 손짓 몸짓을 해가며 펜을 구해왔다. 우진은 궁금했던 질문을 했을 뿐인데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생각했다.
"빨리빨리 시작하죠."
"네?"
"지금부터 묻는 거에 대답해 주세요. 자료는 받았는데 누락된 게 있어서요. 지금 자본금은 얼마나 됩니까?"
"백만 원 조금 넘어요. 아, 천 달러 정도."
우진은 약간 부끄러웠지만, 여기서 부끄러워하면 왠지 아버지께 죄송해질 것 같아 최대한 당당하게 말을 했다. 그리고 매튜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렇군요. 그럼 작업실은 아까 봤던 그곳인가요?"
"거기는 아버지 가게고, 작업실은 없어요. 집에서 하려고요."
"오프라인 매장은 아예 없고, 온라인도 SNS를 통해서만 하시겠다는 건 맞죠?"
"네."
"그럼 거래처는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우진이 따로 걱정한 것들을 적어놓은 종이 가장 처음에 적어둔 부분이었다.
"대량 주문을 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서 소매로 가능한 곳을 알아보고 있어요."
"그렇군요. 물론 신발이나, 액세서리 같은 건 디자인하지 않으시겠죠?"
신발이나 모자 같은 것들이 보이긴 하지만, 만들어본 적도 없었고, 만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직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요."
종이에 열심히 써 내려가던 매튜는 콧바람을 내뱉었다.
"지금 봐서는 전부 소매로 구매하실 것 같은데. 그럼 단가가 올라가서 옷값이 상당히 비싸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부 다 혼자 하신다고 그러셨으니 직원도 물론 없겠죠?"
"네."
매튜는 질문을 계속했고, 질문들은 하나같이 직설적이었다. 대부분 우진이 걱정하던 것들에 대한 문제였다.
매튜는 청문회라도 되는 듯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펜 뚜껑을 닫으며 우진을 봤다.
"잘 알았습니다. 지금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요."
"네."
유학 초기에 회화가 익숙지 않아 낙제를 한 과목이 전략적 관리와 설계였다.
물론 우진은 그 뒤로 혼자 공부했고, 성격상 아는 정도로 끝내지 않고 책 내용을 외울 정도였다. 그래서 문제점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매튜의 반응으로 기분이 나빠지진 않았다.
우진은 따로 적어놓은 내용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한글로 적어놨기에 하나씩 가리키며 매튜에게 설명했다.
"가격 경쟁이 가장 큰 문제 같아요. 아무래도 원단하고 부자재를 소매로 구매해야 돼서 단가가 비싸질 거 같거든요."
"알고 계셨네요. 그럼 해결책도 생각하셨나요?"
"사실 옷을 잘 만드는 방법밖에는 해결책이 없어요……. 제가 하려고 하는 가게가 맞춤옷이거든요. 그런데……."
우진은 예전에 제프에게 말했을 때, 지적받았던 기억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말씀해 보시죠."
"네, 제가 하려고 하는 숍이 좀 특이해요. 고객이 원하는 옷이 아니라 제가 추천해 주고 만들어주려고 하는 숍이거든요."
"코디와 디자인을 같이하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물론 실력이 받쳐준다면 가능한데……."
매튜는 입맛을 다셨다. 본인 역시도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진은 구매 단계가 가장 비활성화된 곳이 SNS란 것도 조사했고, 그 해결책 역시 옷을 잘 만드는 법밖에 없다고 했다.
전부 옷을 잘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매튜는 아무리 봐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성공 가능성이 제로였다. 디자인 같지도 않은 디자인들이었다.
게다가 아직 학생으로 알고 있는데, 자신을 왜 이런 곳을 보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최근 작업하신 옷이 있으십니까?"
"아, 네. 얼마 전에 만든 옷이 있거든요. 잠시만요."
우진은 부모님께 만들어준 옷을 보여주었고, 매튜는 약간 놀랐다. 보고받은 자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렇지만 딱히 특별하진 않았기에, 여전히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전부라면 희망이 보이지 않네요. 아, 사진에서 보이는 옷 자체는 괜찮아요. 맞춤옷이라고 해도 틀이 있는 건데 그 기본적인 틀도 잘 지키고 있고, 그 틀 안에서 조합도 꽤 잘하셔서 차별성도 보이고요. 물론 유행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걸 감안하고 보더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들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만드신 옷만 해도 단가가 상당해 보이는데. 얼마나 들었습니까?"
"원단을 받은 것도 있고, 최소한으로 구매해서 좀 싸게 만들었어요. 6만 원 들었거든요. 아! 한 60달러요."
6만 원도 인쇄에 필요한 잉크값이 반을 차지했다. 매튜는 너무 싼 가격에 약간 당황했다. 사진으로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원단이 그렇게 싸구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그건 둘째 치고, 이걸 혼자 만드신다고 하셨으니 최소 열흘은 걸리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단가가 어쩔 수 없이 올라가겠죠."
"하루 걸렸어요."
"네? 공장에서 찍은 겁니까?"
"아니에요. 패턴부터 재봉까지 전부 하루 걸렸어요. 아, 팔 부분에 염색은 실크스크린으로 해서 미리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렸네요."
매튜는 어이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분명 쉬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믿지 않자니 혼자서 밤새워 가며 만드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지금 뉴욕에 있는 사람.
혹시 제프와 비견될 미래를 봤기에 사전에 포섭할 계획인가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자료에서 본 실력과 지금의 실력을 비교해 보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늘고 있었다.
"제가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온 건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해결책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시겠다면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네?"
"업무니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제 소개를 제대로 하죠. 제프 우드의 유럽 전체를 관리하던 MD 매튜 카슨입니다. 패션 경향 조사부터 론칭까지 모든 경험이 있고 최근 핀란드에서 제프 우드를 성공적으로 론칭했습니다. 그 밖에도……."
당장에라도 미국으로 가버릴 줄 알았건만, 남아서 자신의 소개를 하고 있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굉장한 사람이 왜 자신의 옆에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튜는 다시 펜 뚜껑을 빼고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머리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정작 중요한 것을 몰랐네요. 브랜드 이름이 뭐죠?"
우진은 한글로 적어놓은 이름들을 전부 영어로 옮겨 적은 뒤 매튜에게 보여주었다.
"이름에 인피니티가 왜 이렇게 많은 거죠?"
"아, 그게…… 제 이름으로 등록된 패턴이 있는데 그게 인피니티 기호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든요."
"특허 등록도 하셨습니까? 그럼 최소 일 년은 준비하셨단 건데……. 왜 이렇게 준비가……."
"제프 씨가 해주셨거든요."
매튜는 지금까지 대화 중 가장 놀란 얼굴로 변했다.
"이상하네……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닌데. 보고서에 왜 그게 빠졌지? 아무튼 그렇다면 이 이름에 제일 적당해 보이네요. 'I.J, Jin's'이든 'Jeans'이든 진의 인피니티 정도 되겠네요. 일단 멋있거나 눈에 쏙 들어오는 게 가장 좋습니다. 어떠십니까?"
매튜는 휴대폰에 있던 이름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상표명을 말했고, 우진도 그 이름이 생각보다 괜찮게 들렸다.
왠지 이름의 의미가 자신의 한계가 무한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거 같아요."
"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SNS 말고 I.J만의 사이트가 필요합니다. SNS는 홍보로만 사용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건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는 우습게도 고객이 있어야 시작을 할 수 있는 특이한 경우다 보니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고객이네요. 그럼 고객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아까 보여주신 옷만으로는 홍보할 내용이 너무 적습니다. 혹시 다른 작업을 하신 건 없으십니까?"
아직 허락을 구하지 못한 바비와 미자의 사진이 있었다. 우진은 태블릿 PC에 저장했던 사진을 매튜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비의 사진을 본 매튜는 팔짱을 끼고 턱에 손을 올렸다.
"음……."
말없이 한참이나 보더니 다음 장으로 넘기고 또다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던 매튜가 고개를 들어 우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작품이 맞습니까? 전문가가 작업해 준 거네요. 굉장히 좋네요……."
"그게 아직 그 사진에 있는 분에게 허락을 안 구했거든요. 그것도 전부 제프 씨가 찍어주신 거라……."
"그래요? 신기하네. 그분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무튼 제프 씨가 구한 모델이면 몸값이 꽤 나갈 텐데. 아무래도 무리겠네요."
"아니에요. 그분은……."
우진은 갑자기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매튜의 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바비에 대해 설명했고, 매튜의 얼굴은 점점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전문 모델도 아니고 그냥 원단 배달하는 사람이라고요……? 이런 사람이 왜……? 그럼 이분께 물어보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아직 물어보진 않았지만 허락해 주실 거 같아요."
매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비의 사진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그러다가 다음으로 넘기더니 자신의 머리를 비비며 태블릿에 얼굴을 파묻었다. 확대도 해보고 줄여도 보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원피스! 이것도 선생님이 디자인하신 겁니까?"
"아, 네."
"이 원피스는 모델이 직접 입은 사진은 없습니까?"
"있긴 있는데……."
"보여주시죠!"
우진은 휴대폰 대화창에 저장된 사진을 띄운 뒤 매튜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사진을 보자마자 매튜가 헛웃음부터 지었다.
그 헛웃음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진을 한 번 보고 또 사진을 보고 반복하며 계속 나왔다.
"저기, 선생님. 이분도 제프 선생님이 붙여주신 겁니까?"
"아니요. 이분은 그냥 제가 보고 그린 건데……."
우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튜가 자세를 고쳐 잡고는 앞으로 다가왔다.
"이분도 일반인은 아니겠죠……?"
"맞아요. 저기, 저분이신데."
우진은 카운터를 가리켰고, 매튜의 고개가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돌아갔다. 한참 동안 두리번거리던 매튜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디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저기 카운터에서 일하시는 분이요. 유니폼 입고 계신 분이거든요. 그 옆엣 분은 어머니시고."
매튜는 다시 카운터를 보더니 표정이 일그러진 채 고개를 돌렸다.
"장난하시는 건 아니시죠? 지금 저 사람하고 사진 속에 이 사람하고 같은 사람이라고요?"
"네, 맞는데."
매튜는 우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상당히 진지한 얼굴이었기에 거짓말 같지는 않았는데 도저히 같은 인물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매튜는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어! 어디 가세요. 매튜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