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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옷이 보여-30화 (30/231)

030화 같은 옷 1

"어? 이거 마감 처리가 안 보이네요? 이상하네. 이 기술은 아드리아노 선생님 말고는 없는데……."

우진은 약간 놀란 얼굴로 교수를 보며 물었다.

"아드리아노 선생님을 아세요?"

"그럼요. 제 신발 보이죠? 이십 년 전에 헤슬에서 어렵게 구한 겁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은 죽 신고 있지만, 한 켤레는 아예 신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신발을 수집하고 그러진 않는데 왠지 보관해야 할 것 같아서. 하하. 참, 호정 그룹 산하에 있는 '에뚜알' 아시죠?"

"'에뚜알'이요? 신사화 전문으로 파는 곳 맞죠?"

"네, 아시네요. 오래전에 거기서 아드리아노 선생님과 계약한다고 얘기가 돌았거든요. 워낙 비밀리에 진행돼서 그 소문이 진짜인지 긴가민가했는데, 아드리아노 선생님이 한국에 와버렸죠. 그래서 공공연하게 진짜라고 소문이 돌았고, 다들 엄청 기대했는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우진은 매튜를 들은 게 있냐는 얼굴로 봤고 매튜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건 스카우트 팀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아, 얘기가 이상하게 빠졌네요. 아무튼 이 멜빵에서 보이는 마감 처리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그만. 하하."

우진은 혹시 세운이 지금 그렇게 지내는 이유가 김 교수가 말한 부분에 있지 않을까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김 교수도 아는 게 없었다.

그렇게 옷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고, 우진은 슬슬 일어나려 했다.

"제가 돈을 계좌 이체로 보내긴 했는데, 이 옷을 보니 오히려 돈을 보낼 때 걱정하던 게 죄송하네요. 사실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매튜 씨를 만나고만 싶다는 생각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정말 앞으로도 죽 이용할 것 같습니다."

"만족하셔서 다행이에요. 교수님 같은 분을 첫 고객으로 맡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제가 지인들에게도 소문 좀 내겠습니다, 하하."

그러자 매튜가 상당히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주문을 하실 거면 빨리 하셔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주문이 하나 들어오면 그 시점부터는 다음 주문을 받지 않으십니다."

"아! 그러시군요. 굉장하네요. 그러니까 이 정도 퀄리티가 나왔죠. 안 봐도 금방 유명한 숍이 될 것 같네요. 하하, 그럼 제가 오히려 이득인 건가요? 명품 옷을 싼 가격에 구매했다는 게?"

"그렇습니다."

우진은 왠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사람을 대할 땐 그렇게 눈치 없던 매튜인데, 고객을 대할 땐 거의 사기꾼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이 괜찮으시다면 저희 홈페이지에 교수님 사진을 게재했으면 합니다. 'I.J'에 방문하는 다른 고객들에게 완성품을 입은 고객들의 사진을 보여 드릴 예정입니다. 부담스러우시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제 사진을요?"

"네. 저희 홈페이지에서 보셨겠지만, 전부 모델이 아닌 일반인입니다."

"전부 다요? 저번에 그 전속 모델이라는 학생은……."

"그분은 일반인이신데 저희가 영입한 분입니다. 만약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시면 바로 내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뭐 그렇다면……. 그런데 여기는 좀 지저분해서."

매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

우진은 서인대 캠퍼스 벤치에 앉아 촬영한 사진을 봤다. 몇 장 되지는 않았지만, 그중 재킷을 벗어 들고 멜빵에 손을 끼고 있는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시작이 좋습니다. 김 교수가 엄청 마음에 들어하더군요."

"다행이에요."

"김 교수의 반응을 보니 지인들에게 소개를 해줄 것 같습니다."

우진은 그 말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튜와 세운처럼 같은 옷이 보인다거나, 김 교수가 또 옷을 주문해 버리면 큰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 문제를 해결하려면 직접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제 가실까요?"

"조금만 앉아 있다가 가요."

우진은 캠퍼스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살펴볼 생각으로 가방에서 렌즈 통을 꺼냈다. 렌즈를 빼는 일이 처음에는 번거롭지 않았는데, 지금은 뺄 때마다 매튜의 눈치도 봐야 했기에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렌즈를 뺀 우진은 일단 왼쪽 눈을 감고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보이면 또다시 오바이트까지 할 수 있었다.

우진은 천천히 눈을 뜨고 혼자 지나가는 사람들 위주로 살폈다. 역시나 특이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다행히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불편하시면 병원을 가보시죠."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우진은 머쓱하게 웃고선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슬슬 익숙해지자 두 명, 세 명으로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까지 봤다.

어지럽기는 했지만, 참을 수 있을 정도였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봤다.

그때, 앞을 지나가는 학생 무리가 갑자기 멈췄다. 우진은 혹시 자신이 쳐다본 것 때문에 오해를 할까 봐 급하게 사과를 하려 했다.

"그런 게 아니……."

"선생님, 아니세요?"

"네?"

"미자네 옷가게 디자이너 맞죠? 미자 보러 오셨어요?"

미자 친구들이었다. 얼굴이 기억나진 않지만.

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앞에 있던 학생들 중 한 명이 전화를 꺼냈다. 딱 봐도 미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미자에게 신발이 만들어지면 사진을 다시 찍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엄청 동안이세요!"

"선생님이래. 꺄하하하."

여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신나서 웃고 떠들었고, 우진은 이런 관심은 처음이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아직 어색했다.

그때, 뒤에 있던 건물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선! 생! 님!"

"아…… 미자 씨."

여학생들은 또다시 마구 웃었다.

"미자 씨래. 어우, 이상하다. 히히히."

"미자 씨! 빨리 와!"

우진은 빨개진 얼굴로 미자를 봤고, 미자는 전과 다르게 환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렌즈를 빼고 있던 우진의 눈에는 몸에 붙는 원피스를 입고 뛰어오는 미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때문에 우진은 얼굴이 더욱 붉어진 채로 애꿎은 눈만 비볐다.

미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매튜에게도 인사했다.

"학교에 왜 오셨어요?"

"볼일이 있었거든요."

"그러셨구나. 바쁘신데 제가 방해한 거예요?"

"아니에요. 볼일 다 보고 가려던 참이에요. 안 그래도 미자 씨…… 한테 부탁할 것도 있었거든요. 크흠."

마치 관객처럼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는 미자 친구들 때문에 우진은 괜히 헛기침을 뱉었다.

"저번에 보셨던 스케치 기억하세요?"

"네! 당연하죠."

"그 스케치에 있던 신발을 만들 거 같거든요."

"신발요?"

"네,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나죠. 하이힐이었죠……?"

아무래도 신발은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은 미자의 모습에, 우진은 오히려 자신이 멋쩍어졌다. 하긴 처음에 부탁했을 때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렇기에 지금 모습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하이힐인데, 완성되면 혹시 그 신발 신고 다시 촬영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그래요? 저번처럼 가게에서 촬영하는 거예요?"

"네, 그럼 좋죠."

"그럼 엄마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영업 끝난 시간이면 괜찮을 거예요!"

미자는 전과 다르게 말도 잘했고,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옷은 그대로인 거죠?"

"네, 달라지는 건 신발뿐이에요."

"알았어요! 옷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우진은 미자의 변한 모습이 적응이 안 돼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할 말도 전했고, 볼일도 끝난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일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요."

"벌써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까 교수님하고 먹었어요."

"아, 네. 알았어요. 그럼 전화 주세요!"

혹시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자는 매우 아쉬워했다. 그러다가 평소 미자의 모습을 떠올린 우진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스스로가 웃긴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앞에서 지켜보는 미자 친구들에게도 인사를 하고선 자리를 떠났다.

매튜와 함께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 올라타자, 매튜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미자 양이 기분이 좋아 보이더군요."

"저만 느낀 게 아니죠?"

"네, 대화는 못 알아들었지만, 미자 양이 웃는 걸 보니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우진은 아마도 매튜의 말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매튜가 아니었으면 괜한 오해를 할 뻔했다.

***

며칠 뒤.

늦은 밤 방에 있던 우진은 매튜가 도착한 소리에 거실로 나갔다. 매일같이 집에 방문하는 매튜는 부모님과도 이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식사는 했어요?"

"왓?"

"식사. 그러니까 밥 먹었냐고."

"쏘리, 아이 돈 노우."

여전히 말은 안 통했지만.

우진은 매튜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노트북을 펼치며 매튜에게 내밀었다.

"오늘도 주문이 없는데 뭐 잘못된 거 아닐까요……?"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오늘 새롭게 촬영하면 좀 변할 수도 있습니다."

시작이 좋았기에 손님이 있을 줄 알았는데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어찌 된 게 방문자도 날마다 줄어들고 있었고, 간간히 올라오던 원피스에 대한 질문도 뚝 끊겼다.

"준비하시죠. 세운 그 사람은 가게 들렀다가 바로 온다고 했습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세운이 마무리 작업까지 해서 직접 가져오기로 했다. 우진이 가서 가져오려고 했지만, 세운은 촬영 현장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 마침 우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제 출발해요. 기대해요! 금방 갈게요!]

신설동에서 오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다. 준비를 하기엔 적당한 시간이었다. 우진은 미자에게 출발한다고 메시지를 보냈고,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미자 씨, 지금 가도 괜찮을까요?"

-네! 그런데…… 친구들이 구경한다고 와 있는데 괜찮을까요……?

"네? 아, 저번에 학교에서 봤던 친구들이요? 괜찮을 거 같아요."

약간 찜찜하긴 했지만, 전 촬영 때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럼 지금 출발할게요."

우진은 전화를 끊고선 곧바로 매튜와 집을 나섰다. 커피숍은 가까웠지만, 촬영 소품이 많았기에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금방 도착했고, 우진은 매튜와 함께 짐을 내렸다.

딸랑.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니 촬영 경험이 있어서인지 미리 테이블을 한쪽으로 정리해 놓았다.

"오셨어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히히히."

주인아주머니는 안 계셨고, 미자의 친구들이 대신했다. 미자는 풀린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롱패딩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안에 원피스를 이미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이힐은 조금 있다 오기로 했거든요. 그전에 다른 준비부터 할까요?"

"네. 저번처럼 여기 앉을까요?"

미자는 킥킥거리는 친구들은 향해 주먹질을 하고선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매튜가 소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미자의 머리가 길어질 때마다 친구들은 바쁘게 사진을 찍어댔고, 옆에서 지켜보던 우진은 혹시나 또 미자에게 문제가 생길까 걱정스러운 맘에 입을 열었다.

"학교에는 올리지 말아주세요. 미자 씨가 저번에도 한번 오해를 받아서."

"오…… 미자 씨……. 큭큭. 알겠어요! 선생님!"

서로를 가볍게 때리며 좋아하는 모습에 우진은 머리만 긁적거리며 미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 뒤 매튜가 헤어피스를 붙이는 동안 렌즈를 뺐다. 맨눈으로 미자를 보니 역시나 원피스였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진은 미자의 친구들도 살폈다. 하나같이 평범했는데, 심지어 어떤 학생은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 와중에도 I.J의 로고는 어디에 어떻게든 박혀 있었다.

자주 보는 직사각형의 로고도 있었고, 길게 늘려 선처럼 보이게 한 것도 있었다. 평범한 옷들이지만, 조금이라도 로고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려고 열심히 살폈다.

그러는 와중 매튜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됐습니다. 이제 신발만 오면 됩니다."

아직 세운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우진은 촬영이 조금이라도 더 잘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 가게를 살폈다. 그때, 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커피 드실래요?"

"그럴까요. 여기 삼천오백 원, 아니, 칠천 원이요. 매튜 씨 것도 주세요."

"괜찮아요. 그냥 드릴게요."

돈까지 받았던 저번과 다르게 서비스라며 커피를 가져왔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네?"

그때, 커피숍 문이 열리면서 세운이 들어왔다. 우진은 반가운 얼굴로 세운을 맞이했다.

"왜 이렇게 멀어. 휴."

"이게 하이힐이에요?"

"거참. 인사도 안 하고 오자마자 하이힐부터 찾네! 서운하게!"

세운은 투덜거리면서도 우진을 이해하는지, 들고 온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멀리에 있던 미자 친구들도 궁금했는지 기웃거렸다. 가게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세운은 상자를 열었다.

"이야! 완전 예쁘다!"

"어머! 완전 대박. 미자야! 저게 네가 신을 하이힐이야?"

"장난 아니다……."

미자 친구들은 세운이 가져온 하이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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