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같은 옷 2
우진이 보기에도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 코도반 특유의 반짝거리는 가죽이 굉장히 세련되게 느껴졌다. 렌즈를 빼고 있던 우진은 미자의 발로 눈을 돌려, 세운이 만들어 온 신발과 완전 똑같음을 확인했다.
"정말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돈 받고 하는 건데요. 빨리 촬영해요. 집에 가려면 또 한 시간은 가야 하는데. 하하."
빨리 보고 싶다는 기대감에 우진은 하이힐이 든 박스를 들고 미자의 앞에 섰다. 미자를 의자에 앉히고 신발을 벗기려 했다.
텅!
"어?"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정말 죄송해요! 아, 어떡해…… 제가 신을게요. 정말 죄송해요……."
우진은 머리를 부여잡고 놀란 눈으로 미자를 봤고, 미자 친구들은 고개를 돌리며 큭큭거렸다.
"저년, 저 버릇 어디 안 간다니까."
"그래도 어떻게 머리통을 때려. 하하하하."
우진은 여전히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고, 미자는 그 와중에도 신발을 신으며 붉어진 얼굴로 사과를 했다.
하이힐을 신은 미자는 우진을 마주 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울상인 얼굴로 패딩을 벗었다.
"와……."
"뭐야! 내 팔 봐봐. 털 다 섰어. 어우! 소름 돋아. 저게 어떻게 미자야……."
미자가 패딩을 내려놓는 순간 머리를 잡고 있던 우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빛난다……."
말 그대로 빛이 났다. 제프에게서 봤던 빛과 똑같은 빛이었다. 우진은 왼쪽 눈을 비벼도 보고 껌뻑여도 봤지만, 여전히 빛은 그대로였다.
우진은 걸음을 옮겨 미자의 앞으로 갔다. 미자를 빙빙 돌았다. 왼쪽 눈으로 보이는 모습과 오른쪽 눈으로 보이는 모습이 완벽히 일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원피스 모습으로 보였는데 갑자기 빛이 났다. 왜 빛이 나는지, 제프 말고는 보이지 않았던 빛이 왜 보이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우진은 미자를 위아래로 살피며 아까와 다른 점을 찾았다.
하이힐. 다른 점은 하이힐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습하고 똑같이 만들면 빛이 나는 거였어? 아니지. 그럼 제프는……?'
미자의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놀라고 있느라 우진의 행동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매튜는 달랐다.
"선생님,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신경 쓰이시는 부분은 곧바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넋 나간 우진의 모습에 매튜가 나섰다. 영상 촬영도 아니고 하이힐을 착용한 전신 샷 몇 컷만 찍으면 됐다. 그 와중에도 우진은 미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세운이 우진에게 조용하게 속삭였다.
"신발 디자인을 보고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는데, 완전 대박인데요? 모델이 좋아서 그런가. 완전 자기 옷이네."
세운의 말을 흘려듣던 우진의 눈가가 가늘게 떠졌다.
'자기 옷? 내가 만든 옷이 아니더라도 자기한테 맞는 옷이면 빛이 나는 건가?'
우진은 확인을 위해 어색한 얼굴로 촬영에 임하는 미자에게 다가갔다. 미자 앞에 선 우진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이힐 좀 벗어보실래요?"
우진의 한마디에 촬영장의 모든 시선이 하이힐에 집중됐다. 미자는 곧바로 신발을 벗으려 했고, 세운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왜요? 난 디자인 그대로 뽑았는데. 하이힐에 문제 있어요?"
"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좀 확인해 볼 게 있어서요."
세운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한 발 물러서자, 미자가 하이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미자에게서 보이던 빛이 사라졌다.
"어? 사라졌다."
"뭐가 사라져요?"
우진은 미자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하이힐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왼쪽 눈으로 보이는 대로 옷을 입으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우진은 한동안 하이힐만 바라보다가, 미자의 모습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왼쪽 눈에 하이힐과 맨발이 겹쳐 보여야 하는데, 하이힐이 사라지고 어디서 본 듯한 검은색 구두가 보였다. 그것도 홀로그램으로.
우진은 당황하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원피스를 입고 있기에 맨다리가 보여야 하는데 검은색 데님 바지가 보였다. 우진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고개를 빠르게 들어 올렸다.
"어! 변했어! 뭐야! 변했다!"
"네? 뭐가 변해요?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미자의 옷이 변해 있었다. 오른쪽 눈에 비치는 실제 모습은 아까 본 그대로 검은색 바디컨 원피스인데, 왼쪽 눈에 비치는 모습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하얀색 티에 검은색 데님 바지에 검은색 구두.
매튜와 세운에게서 봤던 것과 같은 옷이었다.
우진은 한 발 뒤에 있던 세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세운도 똑같은 옷이었다. 작은 커피숍 안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세 사람이 같은 옷이었다.
매튜, 세운 그리고 미자.
우진은 넋 나간 얼굴로 뒤에 있던 매튜와 세운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왜 그래요? 우진 씨!"
우진에게 손목을 잡힌 두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끌려왔다. 두 사람이 자리한 곳은 미자가 서 있던 곳이었다. 우진은 매튜와 세운을 미자의 양쪽에 세웠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건지."
세운의 불만에도 우진은 한 발 물러서 오른쪽 눈을 가렸다. 옆에 세워놓고 봐도 다른 점 하나 없는 똑같은 옷이었다.
우진은 세 사람의 등 뒤로 자리를 옮겼다. 세 사람의 등에는 커다란 인피니티 기호가 새겨 있었다.
'매튜하고 아저씨는 같이 일한다고 해도, 미자 씨는 왜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지?'
매튜는 우진의 이상한 행동에도 별말 없이 따르며 이렇게 세워놓은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기에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있는 우진을 봤다.
고민이 가득해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분명 다른 생각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때, 옆에 있던 세운이 뒤로 돌려 했다.
"가만있어 주시죠.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모델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말이라도 좀 해주고 하든가요."
"음…… 모델?"
매튜는 이해를 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세운을 위아래로 훑어봤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도 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우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선생님, 미자 양을 돋보이게 할 남자 모델이 있었으면 하시는 거 같은데, 좋은 생각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세운 씨와 저는 모델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미자 양만 촬영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우진은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했던 터라 매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 모델은 천천히 구해보겠습니다. 고객이 없다고 너무 조바심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자 세운도 몸을 돌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참 나. 나같이 배 나온 사람을 모델로 쓰려고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그림만 보신 겁니다."
"뭐 이해는 하는데. 아! 우리 둘 다 키가 작으니까 하이힐도 벗으라고 한 거였네."
매튜의 착각에 이어 세운도 오해를 했다.
"왜 말을 못 하실까. 저번에도 느꼈는데, 그런 것도 말을 못 하면 디자이너는 어떻게 하려고. 모델들 휘어잡고 하려면 적어도 할 말은 해야지. 너무 무디면 안 돼요."
두 사람의 오해에 우진은 얼떨떨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운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빨리 촬영하죠. 시간도 늦었는데."
다시 촬영이 이어졌고, 우진은 의자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미자의 옷에 정신이 팔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못하고 행동했다.
다행히 이번엔 오해 전문 매튜 덕분에 이상하게 넘어갔지만, 눈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왼쪽 눈에 보이는 대로 입으면 변하는 게 맞는 건가. 어떻게 확인하지. 아!'
바비는 미국에 있으니 불가능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부모님 두 분이 계셨다.
확인이 가능하단 생각이 들자 또다시 흥분됐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실수하지 않으려고 가슴을 쓰다듬고선, 촬영 구경 중인 세운을 불렀다.
"선생님, 제가 신발 디자인을 드리면 다시 한번 제작해 주실 수 있으세요?"
"또요? 저 하이힐 같은 건가요?"
"아니에요. 그냥 일반적인 구두예요."
"가능은 한데, 이러다 완전 그쪽 소속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긴 최근 돈 벌어본 거라고는 우진 씨가 맡긴 거 말고는 없는데 잘됐죠, 뭐. 디자인 보내놔요."
***
일주일 동안 신설동 세운 슈즈를 매일같이 방문했던 우진이 향한 곳은 영등포였다.
신발이 거의 완성이 되었는데, 발등 부분에 들어가는 금속 버클이 문제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도림과 영등포 사이의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곳을 찾아왔다.
우진이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반겼다.
"조카님! 여기까지 오고. 워낙 개미굴 같아서 찾기 어려웠을 텐데."
"안녕하세요."
"그런데 옆에 분은……."
"아! 여기는 저하고 같이 일하시는 매튜 씨라고 해요."
매튜에게도 소개를 하고선 수선 가게만 한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우진은 신발의 디자인을 보여주었고, 그 뒤에 다시 무늬를 보여주었다.
"이 문양 가운데에 끈이 들어갈 수 있게 하면 되겠네요. 저번에는 작아서 힘들었는데 이건 그나마 낫겠네요."
"그래요? 휴, 다행이다."
"그럼 이건 얼마나 필요해요? 백 개?"
단 두 개만 필요했다. 어머니의 신발에만 들어가기에 양쪽 신발 하나씩.
하지만 단추도 무료로 만들어줬는데, 이번에도 무료로 해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없는 행동이었다.
"오십 개 정도 괜찮을까요……?"
"그래요. 이건 찍어도 되겠네. 그럼 단가도 싸지거든요. 신발에 들어가면…… 음. 뭐가 좋으려나. 니켈 도금 괜찮죠? 신발에 물 들어가고 하니까 녹슬지 말라고."
"네, 그렇게 해주세요. 색은 은색 그대로 유지되나요?"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그냥 해줄게요."
"아! 아니에요. 저번에도 그냥 주셨잖아요."
"에이, 됐어요. 이거 개당 300원씩 받아봤자 만 원 조금 넘는데. 하하. 괜찮아요."
전과 상당히 많이 나는 가격 차이였다.
"전에건 죄다 수작업해야 해서 그런 거고. 이거는 금방 해요."
"아…… 그런데 혼자 하시는 거예요?"
"하하, 원래 세 명인데, 어쩌다 보니 혼자 됐네요. 그나저나 밥은 먹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조카님 밥도 안 먹이고 보낼 순 없죠. 저분도 한식 드시나?"
성훈은 곧바로 식사를 주문했다. 우진은 버클을 공짜로 만들게 되었으니 밥값이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에서 신문지를 덮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제가 계산할게요. 얼마예요?"
우진의 질문에도 배달 온 아주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갔고, 남아 있던 우진은 지갑만 만지작거렸다.
"달아놓고 월마다 계산하니까 안 내도 돼요. 하하, 이리와요."
밥까지 얻어먹게 된 우진은 미안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좁은 사무실에 다닥다닥 붙어 식사를 했다.
"장사는 잘돼요?"
"아직 그냥 그래요. 다행히 한 분 맞추셨어요."
"그래요? 대단하네. 그런데 한 벌 맞추는데 얼마나 들어요?"
"그게 조금씩 다른데, 남성 슈트 기준으론 백만 원이에요."
"어이구! 그렇게 비싸요? 원래 다 그렇게 비싼가……?"
성훈은 진심으로 놀랐는지 혀까지 내밀었다. 그러고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괜히 자랑하시던 게 아니었네요. 하하, 유학생 아들이라고 어찌나 자랑하셨는지. 아이고, 내가 좀 살 만해야 조카님한테 옷도 좀 맞추고 할 텐데."
우진은 성훈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살펴나 보자는 생각으로 눈에 손을 올리다 말고 매튜를 힐끔 봤다. 렌즈를 뺄 때마다 병원에 가라고 하도 성화여서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식사가 입에 맞는지 정신없이 먹고 있었기에 우진은 조심스레 렌즈를 뺐다.
"컥, 커억."
"아이고! 잠깐만 있어봐요! 여기 물. 천천히 먹지. 물 더 줄게요. 기다려 봐요."
우진은 물을 받아 마시고 가슴을 두드렸다. 이런 실수를 안 하겠다는 얼마 전 다짐과 다르게, 성훈의 모습에 너무 놀란 나머지 사레까지 들렸다.
우진은 물을 마시며 진정하고 성훈을 다시 살폈다.
네 번째 같은 옷.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는 성훈의 등에도 역시 인피니티 기호가 새겨져 있었다. 매일 만나는 매튜 덕분에 우진의 노트북에는 스케치까지 그려진 상태였다. 이제는 재봉 선까지 눈에 익었다. 그런 옷을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우진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성훈을 살폈다.
"이해합니다. 저도 한국에서 먹은 것 중에 제일 입에 맞는군요. 불백? 다음에도 이거 먹어야겠습니다."
"네, 많이 드세요……."
매튜의 이상한 오해 덕분에 약간 진정이 됐다. 성훈까지 같은 옷이 보이자 어느 정도 옷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전부 나를 도와주신 분들이구나…….'
아직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