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호정 모직 최 이사
호정 모직 최 이사는 차로 이동하며 기획팀에서 조사한 보고서를 봤다.
제프 우드가 I.J와 협력 관계라는 것을 밝힌 내용이었다. 지금 대중에게 유명하진 않았지만, 업계에선 조금씩 I.J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던 참에 제프 우드가 입을 연 것이다.
항간에는 디자이너가 한국 국적이 아니다, 제프 우드의 차세대를 이끌 디자이너다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지만, 제프 우드가 껴 있단 사실을 안 이후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떤 업체도 직접 교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 이사가 생각하기에는 달랐다. 기획팀에서 조사해 온 내용도 그렇고, 오히려 제프 우드와 인연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팀장, 연락이 왜 그렇게 안 되는 거야?"
"연락은 됐는데, 지금 작업 중이라고 합니다."
"무슨 작업을 매일 해. 디자이너가 그림 그려서 넘기면 끝이지."
"작업 중일 땐 다른 주문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 망하기 딱 좋네. 옷값도 슈트가 기본 100만 원이라며. 우리 어패럴에서 찍어내는 것도 그 정도 하잖아? 참, 뭐 별 볼 일 없어 보이던데. 제프 우드랑 연관된 거 확실해? 로고도 좀 달라 보이는데?"
"로고는 인피니티 기호를 중점으로 정장과 캐주얼을 사각형 수로 나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자료가 너무 없다 보니까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 숍을 신설동에 차렸어."
최 이사는 피혁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보며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이 동네도 많이 변했네. 예전엔 죄다 노점상이었는데."
"와보신 적 있으십니까?"
"예전에 내가 어패럴 있을 때 와봤지. 아직 멀었어?"
"이제 거의 다 와갑니다."
잠시 후 차가 멈추자 최 이사는 주변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낯이 익네. 여기 맞아?"
"네, 맞습니다."
"그래? 근데 뭐 이렇게 허술해. 간판만 새것 같은데, 벌써 망한 거 아니야?"
"일단 들어가 볼까요?"
"아니야, 같이 들어가자고."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간 최 이사는 눈에 보이는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았다. 분명 I.J임을 확인하고 들어왔는데 눈에 보이는 건 숍이 아니었다.
미용실에서나 보여야 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녀 정도 사이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보였다. 딸처럼 보이는 미용사는 힐끔 쳐다보고는 끝이었고, 대신 아버지뻘로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여기, I.J라는 숍이 아닙니까?"
그러자 남자가 목에 천을 두른 채로 일어섰다. 최 이사는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한 걸음 물러서서 남자를 봤다.
"죄송합니다. 가게에 손님이 찾아오는 건 처음이라서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그건 됐습니다. 여기 디자이너 좀 만나고 싶은데요."
"지금은 선생님이 작업 중이셔서 주문을 안 받으시는데, 예약하시고 가시겠어요?"
최 이사는 뒤에 서 있던 이 팀장을 봤다. 그러자 이 팀장이 앞으로 나서며 명함을 건넸다.
"호정 모직에서 나왔습니다. 선생님께 호성에서 왔다고 하면 아실 겁니다."
남자는 명함을 잠시 보더니 곤란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더니 가위를 들고 있던 어린 여자에게 물었다.
"유 실장, 조카님 작업 중이지?"
"네, 아까 드린 빵도 안 드셨더라고요."
"어떡하지? 한번 가봐야겠다."
"실장님! 제가 한번 가볼게요!"
갑자기 얼굴이 밝아진 여자가 안으로 사라졌다. 최 이사는 여전히 천을 목에 매고 있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실장님이셨습니까?"
"하하,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아! 저도 명함을 드렸어야 했는데, 명함을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여기."
<I.J Metal Craftsman>
실장 한성훈.
최 이사는 명함을 보다가, 문득 안으로 들어갔던 여자도 실장이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지들끼리 실장하고 그런 거 아니야?'
마치 소꿉놀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그제야 목에 두르고 있던 천이 보였는지 급하게 천을 떼어냈다.
"죄송합니다. 금방 치울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자가 급하게 빗질을 할 때, 안에서 슬리퍼를 끄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왔다.
상당히 어려 보이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이 흐느적거리며 걸어왔다. 그러더니 말도 없이 위아래로 훑어보고 서 있었다.
"임우진 디자이너 맞으십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임우진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호정 모직 최진형입니다."
우진은 앞에 보이는 남자가 신기한 나머지 인사가 늦었다. 굉장히 세련된 슈트를 입고 있는데, 렌즈를 빼고 있던 왼쪽 눈에서는 공장에서 입을 법한 작업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호정 모직이라고 하더니 보이는 것도 작업복인가?'
우진은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여전히 최 이사를 살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봤던 상복처럼 무늬를 찾을 수 없는 옷이었다.
"큼큼, 제 옷에 문제라도."
"아! 아니에요.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크흠, 다름이 아니라 몇 번 연락을 드렸습니다."
"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안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최 이사는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답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저희가 개발한 호정 HC는 캐시미어 250수로, 절대 해외 원단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한국 섬유 시장이 무시할 수준은 아니란 건 물론 아실 테고, 그중에서도 한국을 대표하고 있는 저희 호정 모직의 원단이라면 만족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원하는 원단을 전부 공급해 주신단 거예요?"
"물론입니다. 이 팀장, 준비한 카탈로그 좀 보여 드리지."
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이 서류처럼 된 스와치를 건넸다.
겉면을 넘기자 원단 조각이 붙어 있고, 원단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우진은 그 원단을 한 장씩 만졌다. 상당히 괜찮다고 느껴지는 원단도 많이 있었기에, 만약 원단을 제공받을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저희 기획 팀에서 구매해서 제공하는 형식이 될 겁니다. 그럼 옷 가격에 따른 세금이 조금 늘겠지만, 지금 들어가시는 비용의 1/5도 안 되실 겁니다. 하하."
"그럼 전 정말 호정 모직 원단을 사용했다고만 홍보하면 되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하하, 앞으로 여러 패션쇼를 나가실 텐데, 그때 그냥 호정 모직과 좋은 관계다, 라고 정도만 하셔도 됩니다. 하하."
"패션쇼요……?"
우진은 살짝 당황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데이비드 때문에 패션쇼를 생각해 봤다.
하지만, 미리 옷을 만들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패션쇼는 불구하고 가게에 있는 마네킹 옷도 만들 수 없었다.
멋쩍어진 우진은 목덜미만 쓰다듬었다.
"제가 패션쇼에 나갈 생각이 없어서요."
"왜요! 제프 우드가 인정한 실력이면 당연히 디자이너 브랜드를 내셔야죠. 그럼 그때 저희 호정 모직도 이용해 주시고. 하하, 지금만 봐도 직원분들이 전부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 벌써 브랜드 론칭을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
우진은 멋쩍게 웃고만 있었고, 최 이사는 거의 넘어온 듯 보여 환하게 웃었다.
"이거 온 김에 저희도 한 벌 구매해야겠습니다. 그 티셔츠와 바지! 구두까지 온 김에 구매하죠. 하하. 이봐, 이 팀장. 자네하고 자네 가족도 한 벌씩 구매하지. 하하."
그러자 이 팀장이라는 사람이 최 이사의 귀에 속삭였고, 최 이사는 한정판이라는 말을 들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우진은 자신에겐 관심이 하나도 없는 모습에 씁쓸했다. 오로지 제프 우드와 데이비드 때문에 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하, 농담입니다. 한정판인 거 알죠. 하하, 입던 거라도 구매하려고 했는데 구하기가 영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아쉬워서 해본 말입니다. 하하."
어색한 표정으로 변명하는 최 이사였다. 우진은 충분히 이해하기에 그저 웃어넘겼다.
"여기까지 찾아오신 건 감사한데 제가 혼자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물론 그러시겠죠. 그저 저희는 저희 제품이 이런 게 있다 소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뵌 겁니다, 하하."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면서 세운과 매튜가 들어왔다.
"아, 진짜 이 사람 좀 어떻게 해줘! 오늘도 불백 먹…… 아, 손님이 계시네. 죄송합니다……?"
세운은 인사를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최 이사를 뚫어지게 봤다. 그러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최 실장? 너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세운은 앉아 있는 최 이사의 멱살을 잡아 올렸고, 그 순간 우진은 최 이사라는 사람이 세운의 일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아직 미자나 성훈은 세운의 사정을 모르기에 놀란 눈으로 말리려 했다.
"마 실장님, 손님한테 왜 그러세요!"
"놔! 이 새끼가 무슨 손님이야!"
"당신 이거 안 놔? 이게 무슨 짓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최 이사도 세운을 본 순간 알아봤다. 자신을 한직으로 좌천시키게 만든 일등 공신을 몰라볼 수 없었다. 게다가 실장이라고 하는 걸 보면 I.J와도 연관이 깊은 것처럼 보였다.
"하하, 참 나. 당신 이거 안 놔? 이 팀장, 경찰 불러."
"그래, 불러! 불러, 이 새끼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우진은 눈까지 붉어진 세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물론 호정 모직의 제안이 솔깃했지만, 아무것도 없던 자신을 도와준 세운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실장님, 그만하세요. 최 이사님도 그 손 놓으시고요."
예상은 했지만, 들리지 않는지 멱살을 놓지 않았다. 그러자 미자가 마치 얼굴을 때리려고 하는 듯 주먹을 얼굴 앞으로 휘둘렀고, 깜짝 놀란 최 이사가 손을 놓았다.
"선생님이 손 놓으시래요."
"뭐야! 당신 미쳤어?"
우진은 미자의 행동에 흠칫 놀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세운마저 떼어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가운데에 섰다.
"최 이사님, 아무래도 제안은 거절해야 할 것 같아요."
"허, 이거 참. 이봐요. 고작 저런 사람 때문에 로또 당첨된 거나 다름없는 제안을 거절해요?"
"말이 좀 심하신 거 같아요. 뒤에 계신 분은 고작 저런 사람이 아니에요. 저 때문에 여기 이런 곳에 계셔서 그렇지, 해외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세요."
"하, 무슨. 거짓말이란 걸 내가 모를 줄 압니까? 팔리지도 않는 신발을 파는 주제에 해외는 무슨. 동남아에 신발 공장이나 취직하면 모를까."
모든 사정을 아는 우진은 최 이사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세운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잘못 아셨어요. 저희 실장님은 제게 과분할 정도로 실력 좋으신 분이시거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조만간 직접 들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I.J의 제품이 얼마나 굉장한지. 옷도 물론이지만, 구두 역시 세계 최고로 좋은 제품을 만들 거거든요."
우진은 매튜에게 배운 대로 어깨를 쭉 편 채 최대한 친절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최 이사는 대꾸하지 않고 우진을 한참이나 보더니 이내 등을 올렸다.
***
며칠 뒤. 룸을 잡아놓고 술을 마시던 최 이사는 생각할수록 화가 오르는지 술잔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 개새끼!"
가족 그룹이라 불리는 호정 그룹.
직계가 아닌 방계임에도 30대 초반에 실장이란 자리로 중요 직을 맡았다.
호정 어패럴 기획팀 실장. 오로지 아드리아노와의 계약으로 일궈낸 자리였다.
직계 가족이 경영을 맡는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는 어패럴에서 최연소로 실장까지 맡았으니, 직계가 아님에도 차세대 실세라는 소문까지 돌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아드리아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재수 없게도 IMF가 터져 버렸다.
이미 회사에서 구조 조정 및 몸집을 줄이고 있었기에 타격은 크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기획한 브랜드까지 폐기되었다.
최진형은 어패럴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될까 두려웠다.
모직이 그룹의 핵심이라고는 하나, 지금 상태로 모직이나 그밖에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지금까지 다른 가족들도 그랬듯이 다시는 돌아올 기회가 없었다.
이미 모직의 중요 자리는 전부 큰아버지의 사람으로 차 있었기에 기회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로 인해 발악을 하며 버텼고, 모두가 주춤하기만 하던 IMF 시절을 기회로 삼는 기획을 다시 세웠다.
아드리아노가 직접 만드는 구두보다 아드리아노의 이름을 빌려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
살기 위해 바쁜 서민을 아예 배제해 버렸다. 그리고 그 기획은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장인이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몰랐다.
시간만 잡아먹고 일에 진척이 없었다. 회유도 해보고 협박도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아드리아노가 죽어버렸다. 그는 기획이 엎어진 순간 한직으로 발령되었고, 최 이사 본인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절망을 느꼈다.
최 이사는 양주를 가득 따르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때, 그다지 반가운 얼굴은 아니지만 현재 자신에게 필요한 사촌이 들어왔다. 직계 가족이라는 이유로 돈과 명예를 전부 가지고 있는.
"형님, 날 보자고 하시고. 무슨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