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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옷이 보여-48화 (48/231)

048화 누구세요?

인사도 아니고 대뜸 뭐 하냐고 물은 셈이었다. 당황하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갑작스럽게 보인 탓에 차분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아! 말이 잘못 나왔어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친구분이세요?"

"크흠, 그렇네만."

"이리로 앉으세요."

I.J 식구들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했다. 양해를 구한 우진은 매튜에게 렌즈를 건네받아 착용하고 돌아왔다.

"아까는 놀라셨죠. 죄송해요."

"됐네. 그런데 왜 여기 자리 잡은 게야?"

"불편하시면 옮겨 드릴까요?"

"아니, 나 말고, 자네 말이야."

궁금한 나머지 앞에 앉아버렸다. 분명 연관이 생길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길래 할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이 한정판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지 너무 궁금했다.

"할아버지 친구분이라고 하셔서요."

"엄연히 따지면 내가 형이지."

"아, 네."

노인은 피식 웃더니 대뜸 고갯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인식이가 그렇게 외손주 자랑하더니, 다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고만?"

"아, 그냥 아는 분이 보내주셨어요."

"아는 분이 제프 우드면 대단한 거 아닌가? ……놀라긴, 네 할아비가 뭐 하던 사람인 줄 알 텐데. 여기 온 사람도 대부분 이쪽 일하는 사람일 거고."

노인이 제프 우드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말해 약간 놀랐지만, 뒷말을 듣고 수긍했다. 지난번에 어머니에게서, 우진이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대구에서 재직 공장을 하셨다는 걸 들었다.

그제야 왜 화환이 들어왔을 때 다들 웅성거렸는지 이해되었다. 할아버지 손님은 물론이고 아버지 손님까지 전부 패션에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이었다.

"서울에서 옷 가게 한다고?"

"네, 얼마 안 됐어요."

"그래. 그럼 원단은 지금까지 어디에서 받아서 썼나?"

"아니요. 아직 소량으로 구매를 해서요. 소매로 구하거나 누가 주시고 그러셨어요."

옆 상에 있던 I.J 식구들은 가게에 대해 말하는 우진을 봤다. 기밀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만약에 노인이 묻는다면 바로 말해줄 것처럼 착실히 대답하는 우진을 보며 다들 의아해했다.

세운은 나누는 얘기가 이상한지 매튜에게 실시간으로 통역했다.

"그럼 전화번호하고 주소 적어주게. 필요한 건 전부 구해줄 테니."

"네?"

"뭘 자꾸 되물어. 나 서문에서 원단 장사해. 그러니까 원단 싸게 대준다고."

우진은 그제야 왜 이 노인이 같은 옷을 입은 것으로 보였는지 이해했다. 옆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I.J 식구들만 봐도 전부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었기에, 이 노인도 분명 I.J에 도움이 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진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크흠, 고민하지도 않는 걸 보면 인식이를 빼다 박았고만."

"그런가요?"

"그렇지. 그러다 망했거든."

우진이 헛기침을 하자 노인은 피식 웃더니 옆 테이블을 쳐다봤다.

"옆에서 훔쳐 듣는 양반들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인가?"

"아, 네."

"생각보다 동료가 많고만? 저 외국인도?"

"네. 옆에 계신 분들이 전부예요."

"그래. 인식이한테 듣기로는 구멍가게라고 하던데, 그 정도는 아닌가 보고만?"

노인은 피식 웃고는 일행들을 보며 물었다.

"저기서 가게 살림 꾸리는 사람이 어떤 분이신가?"

"저기 저분이세요. 매튜 카슨이라고 미국인이세요."

"그럼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겠고만. 알았네, 지금은 일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니까 조만간 다시 들르도록 함세."

노인은 음식은 손도 안 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야겠고만."

노인이 나가려 하자 가게에 있던 사람들 일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인사했다.

"됐네, 인식이가 마련한 자리인데 나한테 인사는 무슨. 들던 거나 마저 들게나."

노인은 구시렁대듯 말하며 나갔고, 우진은 인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전부 나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와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때, 입구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안 나오고 뭐 하는 게야? 어리바리한 건 인식이하고 똑같고만."

"네?"

"연락처도 안 주고 어떻게 연락하란 말이냐!"

***

며칠 뒤.

학교에 오랜만에 나온 미자는 친구들이 있는 학교 식당으로 가느라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강의실부터 식당까지 거리가 있던 터에 한참을 걷던 미자는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봤다.

"뭐야?"

그러고는 다시 지나쳐 가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봤다. 등에는 지금 미자가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자신의 옷은 인피니티 무늬였지만, 남학생의 옷에는 사각형 안에 커다란 인피니티 무늬를 세워 8처럼 보이게 만든 무늬가 있었다.

분명히 이 옷은 한 벌 빼고는 죄다 외국에서만 팔려서, 한국에서는 I.J에 있는 사람들만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돈을 주고 산 사람이 자신이었다.

미자는 남학생을 따라갈 생각으로 몸을 돌렸고, 걸음을 빨리 걸어 남학생의 옆에 섰다.

그리고 팔뚝을 보니 차이점이 보였다. 자신의 옷에는 등에 새겨진 무늬가 축소되어 박혀 있었지만, 남학생의 옷에는 로고 대신 그림이 박혀 있었다.

옆으로 앉은 사자가 왕관을 쓴 그림.

TV에서도 간간히 저 브랜드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고, 미자 본인도 저 브랜드의 트레이닝 복을 가지고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미자는 걸음을 멈추고 불쾌한 얼굴로 강의실로 올라가는 남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한데 나 오늘 그냥 갈게."

-너 오후 강의 빠지려고?

"응.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내일 봐."

지금 미자에겐 강의가 중요하지 않았다.

***

가게에 우진이 없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매튜는 혼자 시장 조사하고 홈페이지를 관리한다고 바빴지만, 다른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 빈둥댔다.

"우리 우진 씨가 언제 오려나."

"그러게요. 이사하느라 문 닫고, 데이비드 씨 옷 만든다고 주문도 안 받고. 너무 오래 쉰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하긴 한 달이나 넘게 문 닫고 있었으니까. 아예 폐업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래도 망하진 않을걸? 여차하면 데이비드 오라고 해서 같이 사진이나 한 방 찍은 후에 SNS에 올리면 될 거 같은데. 하하."

세운과 성훈이 할 일이 없어 시답잖은 대화로 시간을 보낼 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우진 씨!"

"조카! 아니, 임 선생!"

"다녀왔습니다."

그러자 매튜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건네며 우진에게 다가왔다.

"미스터 장이 보유하고 있는 원단 목록을 받았습니다."

오자마자 일 얘기부터 하는 매튜였다.

"조금 놀랐습니다. 원단은 물론이고 가죽까지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직수입으로 들어오는 원단 수도 상당하고요. 단가는 조절해야겠지만, 보유량만은 어디도 비교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스터 장이 조만간 이곳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알겠어요. 일단 저는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자리를 비운 사이 벌써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역시 같은 옷을 입은 사람 중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로 오기 전 어머니가 주셨던 연락처가 생각났다. 우진은 3층으로 올라가면서 지갑에 넣어둔 메모지를 꺼냈다.

할아버지의 글씨체로 적혀 있는 집 번호였다. 할아버지가 신경 써주셨는데 거절해야 한다는 사실이 죄송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장 노인이 끌렸다. 장 노인도 할아버지로 인해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킨 우진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 번호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그래.

우진은 대뜸 반말부터 하는 모습에 전화를 한번 보며 피식 웃었다. 할아버지 친우분 아니랄까 봐 목소리도 우렁찼다.

"전 임우진이라고 합니다. 백인식 할아버님 외손주입니다."

-알아. 왜 전화한 게야?

"아……."

상당히 툴툴대는 말투에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화하면 알 거라고만 전달받았기에 원단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연락한 건가 싶었다.

-왜 전화했냐니까?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는 게냐?

이상한 말을 하는 노인의 목소리며 말투가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아 고개를 갸웃거린 우진은 천천히 설명했다.

"그게…… 할아버지께서 전화하면 알 거라고 하셨거든요."

-뭐? 저세상에서? 너 무당이야?

"아니요, 저는 원단 가게 하시는 아는 동생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사실 왜 전화하라고 하셨는지 잘 몰라서요."

-동생? 동생? 인식이 썩을 놈이! 그리고 이놈 이거, 웃긴 놈이네. 너 지금 장난치려고 전화한 게냐?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저희가 거래처가 생길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장난 전화한 거 아니에요."

-뭐? 이 녀석아, 거래처가 어딘데!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그 미국인이랑 얘기도 잘 끝났는데.

우진은 그제야 한 사람이 떠올랐다.

"누구세요?"

-뭐? 이 녀석이, 처음에는 뭐 하냐고 묻더니 이제는 누구냐고? 나 장필도다. 이놈아!

"……아! 어르신,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가 남긴 연락처가 장 노인이란 걸 깨달은 우진은 전화에 대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하자 장 노인은 다행히 이해하는 듯싶었다.

-인식이 그 자식이 원래 앞뒤 잘라먹고 말하는 게 있으니까 내 이해하지. 발인은 잘 했고?

"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잘 끝났어요."

-그래, 요즘 날도 좋았으니 다행이지. 어디다 묻었느냐?

대부분이 할아버지에 관련된 대화였다. 장 노인도 할아버지에게서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했다. 대뜸 연락해서 자기 죽으니까 외손주 좀 도와주라고 한 게 마지막 통화였다고 했다.

성격상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아는 척했다고도 말했다.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할아버지나, 그걸 참지 못하고 직접 찾아온 장 노인이 생전에 같이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한참이나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했다.

-다음 주 정도에 서울에 올라갈 테니 그리 알거라.

전화를 끊은 우진은 장 노인과 전화번호의 사람이 같은 분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종이에 적힌 할아버지 글씨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미리 예상하고 받아들이고 있어서였는지 죽음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게 되니 죄송한 마음이 컸다.

그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면서 세운이 큰 소리로 우진을 불렀다.

"우진 씨! 우진아! 내려와 봐! 큰일 났어!"

"왜 그러세요?"

"우리 유니폼 카피당했어! 빨리 내려와 봐!"

우진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곧바로 내려갔다. 그러자 아까 없던 미자도 와 있었다. 매튜의 자리에서 다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선생님!"

"네, 잠시만요. 매튜 씨, 카피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호정 어패럴 브랜드인 라이언 킹덤에서 비슷한 디자인으로 출시가 된 듯합니다."

우진도 급하게 매튜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모니터를 봤다.

"이게 뭐예요?"

"TV 프로그램이라는데 호정에서 협찬을 한 듯합니다."

모니터에는 우진도 들어본 적 있는 연예인들이 라이언 킹덤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다.

"완전 다른데요?"

"이름표 때문에 잘 안 보여서 그럽니다."

매튜가 마우스를 내리자 제품 전체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자신이 만든 모양과 비슷한 무늬가 등에 떡하니 새겨져 있었다.

인피니티 무늬를 세로로 세워 8로 보이게 만들어놓았다. 그냥 숫자 8처럼 보이는 디자인이었고, 하얀색만 있는 I.J 제품과 다르게 색도 굉장히 다양했다.

우진은 완전 다른 옷으로 보여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다른 거 같은데……."

"네,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 이미지에 타격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기업인 만큼 대량으로 물량을 뿌려댈 텐데, 그럼 우리 옷이 비슷하게 카피한 이미테이션이 돼버리고 맙니다. 무엇보다 가격이 이건 한국 돈으로 19,900원. 우리는 세트 한정으로 판매했다고 해도 약 30배가 넘는 차이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신체에 맞게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든 옷과 똑같은 치수로 찍어낸 옷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진은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세운이 신경 쓰여 옆을 보니 역시나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때, 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Moon 매거진에서 나왔습니다.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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