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데이비드의 정장 1
장 노인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인지 우진이 걱정하는 것들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기 직원들 어떻게 먹여 살릴 게냐? 지금 네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옷 하나 만드는 데 몇 날 며칠 붙잡고 있는 거 같은데, 한 달에 몇 벌이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고 수제 공장에 맡기는 것도 아닐 테고."
아무리 빨리 만든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기에 우진도 내심 걱정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네가 실력까지 없었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지. 그런데 실력은 일류 디자이너들도 알아주지 않느냐."
옆에서 듣던 세운은 장 노인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영감님하고 같아. 일단 콜라보가 안 되더라도,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옷도 더 잘 나올 테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협력해서 만들게 되면 제가 직접 만들 수 없잖아요."
"네가 가르쳐 주면 되지 않느냐. 주댕이는 뒀다 어디에 쓰려고!"
장 노인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매튜와 세운, 우진을 한 번씩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외국인이 살림 맡는다면서? 뭔 살림이 이따위야!"
"저분은 MD라서요. 그래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후, 인식이 놈이 이럴 줄 알고 도와주라고 한 건가……. 이놈아, 앞으로 내가 여기 좀 있으면서 살림 좀 봐야겠다."
"네, 알겠어요."
"흐음? 그건 또 왜 그렇게 대답이 빨라. 이놈은 이거 가게 내달라고 해도 내줄 놈이네."
같은 옷을 입고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대답한 우진이었다.
"그런데 아까 들으니까 회장님이라고 하시던데. 회사 안 바쁘세요?"
"상가번영회장이시란다. 그 회장님 아니야."
세운의 속삭임에 우진은 오해한 스스로가 우스워 피식 웃었다.
일단 옷은 입고 있으니 같이 일할 거란 확신은 드는데, 아직 어떤 일을 맡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알바를 하던 미자만 하더라도 미용 자격증을 가지고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우진은 좀 더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장 노인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숍은 해본 적은 있으세요?"
"안 해봤지. 그런데 돈 버는 게 다 거기서 거기야. 그런데 차 부장은 밖에 있나?"
"네, 아까 나가셨어요."
"그래, 그럼 내일 준비해서 다시 올 테니 그리 알아."
장 노인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보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오지 마. 나흘 뒤 아침 9시까지 올 테니 그리 알고."
"10시에 가게 문 여는데……."
"젊은 놈이 뭐 한다고 그리 늦게 열어."
"아니에요. 어차피 가게에 나와 있으니까 아무 때나 오세요."
장 노인은 인사하는 우진은 힐끔 보더니 혀를 차며 차에 올라탔다.
***
다음 날.
우진은 완성시킨 장갑을 물끄러미 봤다. 벨크로 부분에는 니켈로 만든 I.J의 로고가 박혀 있었고, 그 밑으로는 'Bella'사에서 나온 화학 처리된 신소재가 이어졌다.
전에 세운에게 보여준 것처럼 고무장갑보다 약간 짧은 길이였지만, 직접 착용해 본 결과 이 정도 길이가 가장 안정적이고 적당했다.
어느 정도 길이가 있어야지 잡아당겨 고정을 시킬 수 있었다.
살짝 긴 느낌도 있었지만, 왼쪽 눈으로 데이비드를 봤을 당시 팔 안쪽까지 보이지 않았기에 고민하고 고민해서 만든 장갑이었다.
두께는 스판덱스보다 살짝 두껍지만, 탄력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물론 약간 뻑뻑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움직이는 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인체 공학적으로 만든 건 아니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우진은 데이비드의 장갑을 만들기 전 미리 만들어본 장갑을 손에 낀 채 씨익 웃었다. 이제는 보내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우진은 데이비드의 주소를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꺼냈다.
-네, 데이비드 씨 전화입니다. 지금 바쁘셔서 전화를 받지 못하니 용건과 연락처를 말씀해 주시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전 한국에 I.J 디자이너 임우진인데요."
-아하, 반갑습니다. 저번에 뵀죠? 전 샘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이 바쁘신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죠?
"옷을 완성시켜서 주소를 여쭤보려고요."
-지금 파리라서 나중에 보내주시죠. 아니면 호텔로 보내셔도 되긴 합니다.
"호텔로 보낼게요! 주소 좀 알려주세요."
하루 빨리 데이비드에게 보여주고 싶었기에 우진은 호텔 주소를 받아 적었다.
"제가 바로 보내 드릴게요."
-그러시죠. 그럼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미 옷은 완성되어 잘 보관하고 있었기에 보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장갑을 만든 적이 처음이다 보니 포장할 박스가 없었다.
그래서 우진은 구두 박스를 주문하는 곳에 물어볼 생각에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향했다.
사무실 문을 열자, 세운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모니터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고, 매튜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다.
"다 만들었어?"
"네, 장갑 넣을 박스 주문하려고요."
"장갑 장사할 것도 아닌데 천으로 주머니 만들어서 넣으면 되겠네."
"그것도 좋겠네요. 일단 주문부터 하고요."
매튜가 상당히 바빠 보였기에 우진은 직접 주문까지 했다. 당연히 한 개만 주문할 수 없었기에 또 언젠가 쓸 거라는 생각으로 대량으로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오후에 바로 보내준다고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여유 시간이 생긴 우진은 매튜의 옆으로 갔다.
"뭐 하세요?"
"I.J에 대해 요약…… 음, 있는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아, 어르신이 말씀하신 거 때문에요?"
"네, 제안서를 준비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미국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까지요?"
"현재 우리 위치가 그렇습니다."
"가서 안 돌아오실 건 아니죠?"
매튜는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우진을 한번 봤다. 그러고는 씨익 웃더니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우진은 매튜의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제일 처음 옷이 보였던 만큼 함께하리라 굳게 믿었다.
***
며칠 뒤.
패션쇼 준비로 파리에 와 있던 데이비드는 리허설이 한창인 런웨이에 서 있었다.
일반인들이 불편하게 볼 수 있는 오트쿠튀르 패션쇼였지만, 다음 시대의 트렌드를 주도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판가름 나는 장소이다 보니 헤슬에겐 가장 큰 행사였다.
더군다나 며칠 뒤, 헤슬보다 이른 시간에 제프 우드의 컬렉션이 열리는 바람에 신경 쓰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평소라면 무대에 올릴 의상을 입고 리허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수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 데이비드는 자신도 피날레 때 입을 의상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항상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데이비드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이번 오트쿠튀르의 콘셉트는 자연이었고, 최대한 관객들이 자연을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야 했다. 관객들이 쉽게 느낄 수 있도록 런웨이에 직접 장식을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데이비드의 런웨이는 생각보다 밋밋했다.
몽롱한 음악이 크게 들리는 현장에서, 마이크를 착용한 데이비드가 뒤를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런웨이 양쪽과 뒤쪽, 그리고 천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명이 켜졌다.
이번에 준비한 패션쇼의 주제인 자연에 맞춰 무대 뒤쪽에선 하얀 조명이 모델을 따라 움직였고, 양쪽에서는 초록색 빛이 런웨이의 바닥을 비춰 풀밭처럼 만들었다.
마치 숲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조명이었다. 그리고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숲과 상당히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나무를 형상화한 것 같은 갈색 원피스에, 어깨에는 나뭇잎이 달린 것처럼 연두색으로 염색한 깃털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일반인들이 본다면 저러고 어떻게 걸어 다닐 수 있을지 궁금해할 정도로 거추장스러워 보였지만, 데이비드는 작품과 무대연출, 그리고 모델까지 모두 만족스러운지 진행 담당자에게 다음으로 넘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조명이 바뀌었다.
보통 자연이라는 주제를 하면 계절에 관한 쇼가 많은데, 데이비드는 계절이 아니라 숲, 바다, 하늘이라는 자연을 주제로 쇼를 준비했다.
한참이나 이어진 리허설은 무대에서 인사까지 하는 것으로 끝났다.
"수고했습니다. 패션쇼 당일 오전에 다시 한번 리허설하기로 하죠."
다시 편안한 얼굴로 변한 데이비드는 진행 팀과 모델들, 그리고 관계자에게 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그동안의 강행군이 힘들었는지 정리를 부탁하고는 곧바로 샘을 찾았다.
샘과 함께 호텔로 돌아온 데이비드는 벌써부터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강행군 때문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숙소로 곧장 올라가려 했다.
그때, 호텔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데이비드를 불러 세웠다.
"데이비드 씨 앞으로 소포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객실로 옮겨 드릴까요?"
"음?"
데이비드는 영문을 몰라 샘을 봤다. 그러자 샘이 무슨 일인지 알아챘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객실로 옮겨달라는 말을 하고선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며칠 전에 말씀드린, 한국에서 보낸 소포 같습니다."
"아, I.J 말인가? 알겠네."
데이비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은 쉬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빨리 숙소로 올라가려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리는 순간,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했다.
"미스터 모리슨? 와우! 머리색이 변해서 몰라볼 뻔했네. 하하, 이렇게 마주할 줄은 몰랐네요. 같은 호텔이었나 보군요, 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귀를 울렸다.
"준비는 잘되가십니까?"
"그럭저럭. 매년 하는 일인데 준비라고 할 것까진 없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할 뿐입니다."
"하하, 우리는 준비가 너무 잘되고 있는데. 어찌나 생각한 대로 런웨이가 나오는지. 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뇌에서 곧바로 나오는 제프 우드의 말에도 데이비드는 표정 관리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표정 관리도 버거웠고 별로 말을 오래 섞고 싶은 사람은 아니어서, 인사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때, 제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완전 우리 팀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제프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샘이 입고 있는 옷이 똑같았다. 데이비드가 한국에 갔다는 걸 알고 있던 제프는 씨익 웃으며 샘을 가리켰다.
"하마터면 우리 팀인 줄 알 뻔했네. 하하, 한국에 가셔도 아무런 소득도 없어서 이걸 어쩝니까? 우리 매튜가 우진을 잘 보살피고 있는지 저도 한번 가보려고 했습니다, 하하."
그리고 그때 옆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한눈에 보아도 제프의 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I.J에서 나온 옷을 입고 있었다.
제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우진과 더 가까워 보이는 게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데이비드는 그런 제프를 보고 괜히 기분이 나빠져 엘리베이터에 오르려 했다.
그때 마침 소포 상자를 밀고 오는 벨 보이가 보였다. 그 상자를 보자 데이비드는 웃고 있는 제프를 골려주고 싶었다.
"그 소포, 제 것 맞습니까? 내가 데이비드입니다."
벨 보이가 확인을 하고선 맞다고 하자, 데이비드는 제프를 힐끔 보더니 벨 보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주십쇼. 한국에서 보낸 소중한 옷이니 내가 들고 가죠."
곧바로 샘이 팁을 주고 나서 짐을 나눠 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데이비드는 뒤에서 궁금해할 제프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쯤, 문이 다시 열렸다.
"한국? 혹시 I.J에서 온 겁니까?"
"맞습니다."
"음? 이거 한정판이라고 했는데?"
"허허, 그 옷이 아니라 정장입니다. 됐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정장을 만들어서 보냈군요. 허허, 그 친구도 참."
"뭐?"
갑자기 소리를 치는 제프였고, 데이비드는 그 반응을 보자 피곤이 싹 가시는 듯했다.
패션쇼 일정을 숨기다가 갑자기 자신들과 같은 날로 발표한 제프 우드 때문에 상당히 고생을 했는데, 그 고생이 싹 가실 정도로 통쾌했다. 그만큼 제프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 자식! 내가 만들어달라니까 어버버거리기만 했는데!"
"허허, 그랬습니까? 전 괜찮다고 했는데도 만들어 보냈군요. 패션쇼 때문에 파리에 있다고 하니 이곳으로 배송해 주네요. 허허, 그 친구도 참."
서로 상반된 표정을 짓는 두 사람 사이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밖에 있던 제프는 상자에 든 정장이 무엇인지 궁금해 미치겠는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