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커플 1
예약한다고 전부 옷을 맞추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우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여성용 백이 보인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설레기까지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눈에 보이는 대로 만드는 걸 포기하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춰줘야 할 듯싶었다.
남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다니까. 난 옷 많잖아. 자기 옷이나 맞추자."
"많긴 뭐가 많아. 전부 한 십 년은 된 옷들이잖아."
"빌리면 돼. 그냥 자기 옷 맞추자."
우진은 목을 긁적였다. 뉴욕 숍을 오픈하고 대금이 들어오면 자금 사정이 괜찮아지겠지만, 아직까진 직원 월급 주기도 빠듯했다. 그렇기에 퍼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방을 만들려면 세운이 필요한데, 세운은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기에 우진은 아쉬워하면서도 금세 마음을 접었다.
"두 분 재킷만 하시면 백만 원에 해드릴게요."
"그렇게 해주세요!"
남자는 애처로운 눈으로 여자를 봤고, 여자는 기대되는지 활짝 웃었다.
"그럼 스케치부터 할게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편안하게 계셔요."
"그럼 한 시간 뒤에 올까요?"
"아! 아니요. 제가 보고 그려야 해서요."
우진은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일단 특별함이 적은 남자부터 그렸다.
'머리는 서비스로 잘라줘도 되겠지.'
상당히 긴 머리를 정리한 포마드 스타일로 보였다. 지금 모습보다 훨씬 깔끔해 보였다. 옷도 정장 스타일인 남색 블레이저 재킷이라 상당히 깔끔했다.
옷 입은 모습을 보니 남자는 몸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다만 목이 조금 짧아서인지, 슈트 깃에 I.J 로고가 길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약간 신축성이 있어 보이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만져볼 수가 없기에 어떤 원단인지 가만히 들여다봤다.
스판 같으면서도 하늘하늘한 느낌.
일단 눈에 보이는 느낌대로 따로 작성해 둔 뒤 바지와 구두까지 전부 그렸다. 그러고서 여자 쪽으로 넘어갔다.
우진은 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머리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보이는 단발에서 밑부분만 펌을 한 것처럼 보였다.
일단 전체적인 인체를 그리고 나서 차근차근 다시 살폈다.
가방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안에 입은 원피스가 상당히 특이했다. 마치 한복 같은 느낌의 살구색 실크 원단에다, 세로로 주름을 줘서 펑퍼짐하면서도 실크의 특징을 잘 살려 늘어뜨린 덕에 날씬해 보였다.
오른쪽 눈으로 봤을 때도 날씬해 보였기에, 디자인으로 부족한 부분을 감춘다기보다는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느낌이었다.
어깨에는 하얀 재킷을 걸쳤다. 3버튼 형식의 클래식하면서 보이시한 느낌의 재킷이었다. 재킷만 본다면 오히려 남자보다 더 만들기 쉬워 보였다.
우진은 이번에도 멈추지 않고 보이는 대로 스케치를 완성했다. 은색빛의 구두까지 전부 그렸음에도 시선은 여성의 팔에 멈췄다.
결국 문제는 손에 들린 가방이었다. 보통 핸드백보다 큰 토트백이었는데, 기존 토트백보다도 약간 더 커 보였다. 그리고 시중에 판매되는 가방들처럼 금속으로 된 I.J 로고가 가방 입구에 떡하니 박혀 있었다.
옷이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줬고, 회색 토트백은 배색에 맞춰 조합이 되어 옷 전체를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게다가 지금은 블라우스랑 재킷을 입어서 그렇지, 캐주얼에도 어울릴 것 같은 백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지만, 현재로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스케치를 마친 우진은 두 남녀가 볼 수 있도록 스케치북을 돌렸다.
"와…… 오빠 정말 멋있다……."
"가을이 너도. 우리 가을이 너무 예쁘네……."
"안 되겠다! 난 다음에 맞추고 오빠 거로 하자!"
"또 그러네."
앞에 있던 우진은 목을 또다시 긁적거렸고, 두 사람의 실랑이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결정이 안 났는지 여성이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조금 뒤에 결정하면 안 될까요?"
"그러셔도 돼요."
"그럼 오늘 내로 결정해서 전화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혹시 안 맞추시더라도 연락 부탁드려요. 저희도 다음 예약을 준비해야 해서요."
커플은 들어올 때와 다르게 약간은 냉랭한 분위기로 가게를 나섰다. 우진은 소파에 앉아 스케치를 봤다.
"참, 애기들 같은데 벌써 결혼을 하네."
"네?"
"또 그림 그리느라고 못 들었네, 못 들었어. 아까 둘이서 계속 수군거렸잖아."
"뭐라고 그랬는데요?"
"백만 원이 할머니가 준 거라고 그러던데? 그 아가씨가 남자 할머니 얘기만 계속하더라고. 그런데 보통 시부모 될 사람 얘기하지 않나?"
"제가 결혼을 해봤어야 알죠. 그런데 실장님은 어떻게 잘 아세요?"
"그…… TV 보면 그렇잖아! 뭐 그런 걸 물어봐! 참, 우진 씨도 이번 주말에 친척 결혼식이라고 안 그랬어?"
우진은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휴대폰으로 달력을 봤다.
육촌. 먼 친척이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빠질 수 없었다.
***
I.J 근처 작은 커피숍에서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만 보던 홍단아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상무님, 감사해요. 이제 괜찮으니까 가요."
"괜찮기는. 지금 요 밑에 보이는 다리는 다른 사람 다리인가? 후들후들하는 게 내 눈으로 보일 정도고만."
"아……."
"잠깐 있다 가도 되니 진정하시게."
홍단아는 결국 최동훈의 사과를 받았다.
처음에는 호정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무서워 장 노인과 함께 자리를 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마주하자 두려움보다 그동안 느끼던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래서 사과하는 최동훈에게 눈물 섞인 원망도 했고, 정신없이 쏘아붙였다. 그러자 최동훈은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결국 홍단아 앞에 무릎까지 꿇으며 용서를 빌었다.
"그 녀석은 된 놈 같은데. 어찌 그런 애비를 만나서."
"그러게요……. 자기가 퇴사한다고 제가 다시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돌아가고 싶으신가? 그러시다면 내가 우리 임 선생에게 얘기해 보고."
"아니에요!"
"껄걸, 내가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네만,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리면 그 사람은 용서하게. 미워하더라도 최 이사를 미워하는 게 옳지 싶네."
그동안 겪은 게 있으니 사과를 받았다고 바로 풀릴 리는 없었다. 그래도 홍단아도 장 노인이 말한 것과 똑같이 느끼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면서 커플이 들어왔다. 테이블이 고작 세 개뿐인 작은 커피숍이다 보니 옆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아메리카노 한 잔하고 물 한 잔만 주세요."
"나도 아메리카노 먹고 싶거든?"
"조금만 마실래?"
"됐어. 나중에 우리 건강이 태어나면 그때 백 잔 마실 거다!"
귀엽게 투정 부리는 말에 홍단아는 커플을 힐끔 훔쳐봤다. 분명 대화상 임신 중인 것 같은데, 외모는 두 사람 모두 상당히 어려 보였다. 우진 또래나 그보다 한두 살 정도 위로 보였다.
홍단아는 허리를 숙여 장 노인에게 속삭였다.
"속도위반인가 봐요."
"남 얘기가 귀에 들어올 정돈데 어찌 그 다리는 진정이 안 될꼬? 일부러 다리 떠는 건 아닐 텐데."
놀리는 말에 홍단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후 그녀는 장 노인과 특별한 대화 없이, 그저 다리가 진정되기만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조용한 음악 사이로 뒤 테이블에서 대화하는 부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을아, 이번엔 내 말대로 하자. 결혼식도 안 하는데…… 어머님이 그거까지 나눠 했다고 그러면 더 안 좋아하실 거야."
"우리 엄마…… 휴, 됐어! 할머님이 나한테 줬으니까 내 말대로 해."
"너 웨딩드레스…… 그 돈으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너 웨딩드레스 입으라고 주신 돈이잖아."
"결혼식도 안 하는데 뭐 어때! 할머님은 나 예뻐해 주셔서 괜찮아. 오히려 잘했다고 하실 거야. 차라리 그 돈으로 할머님 선물 살까? 그래, 그게 좋겠다!"
"아니야. 할머니가 해준 것도 없다고 미안해하시는데 그것까지 돌려주면 서운해하실 거야."
"해준 게 왜 없어, 우리 오빠를 이렇게 키워줬는데! 히히, 그런데 오늘따라 내 말 안 듣는다? 자꾸 나 스트레스 줄 거야? 우리 건강이한테 안 좋다?"
"아, 미안."
홍단아는 들리는 대화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대화만으로도 예뻐 보이는 모습에 장 노인에게 동의를 구하려다가 다시 구박만 받을까 봐 말을 멈췄다.
그런데 장 노인도 대화를 듣고 기분이 좋은지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홍단아는 씨익 웃으며 말을 하려 했지만, 눈을 마주친 장 노인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커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아까 본 옷 정말 예쁘더라. 괜히 유명한 게 아니더라."
"나도 깜짝 놀랐는데. 대박 잘 그려. 오빠 머리 아까 그림처럼 잘라 봐."
"하하, 그럴까? 그거 보니까 조금 쪽팔리더라."
"쪽이 뭐야! 건강이 듣는데!"
홍단아는 손을 앞에 모은 채 엄지만으로 뒤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장 노인을 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손! 님! 우리 가게 손님인가 봐요!"
장 노인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해서 기분은 좋더라. 그 디자이너는 TV에 나온 거보다 더 어려 보이고. 가게는 작아 보이던데, 그런 가게 있으면 얼마나 벌까?"
"또 돈 얘기하네!"
"해야지, 분유값이랑 기저귀값 많이 들어간다잖아."
"천 기저귀 쓸 거거든요! 그게 더 좋다고 그랬어! 지금도 일 많이 하는데 더 할 생각하지 마. 그러다 진짜 쓰러지면 어떡해."
"괜찮아. 알잖아, 나 축구해서 튼튼한 거."
"그래서 하는 말이거든? 무릎도 안 좋으면서 하루 종일 편의점에 서 있다가 밤에는 배달하고! 얼마 전에 뉴스에서 배달하다 사고 난 거 보고 심장 덜컹했단 말이야!"
"조심히 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장 노인은 어렵게 사는 얘기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그때 앞에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니 입술을 우물거리는 홍단아를 봤고, 그녀가 울음이 터지기 전 발을 밟아버렸다.
"휴, 그럼 전화해서 아까 정한 대로 한다?"
"내가 할게."
"나 있는 데서 해! 나 없는 데서 다르게 말하지 말고!"
"알았어. 이따가 하자."
"히히, 그럼 그 옷 입고 사진 찍고! 아버님, 어머님한테도 인사드리러 가자."
"며칠 전에도 다녀왔잖아."
"그래도 옷 자랑도 하고! 오래 보시라고 사진도 찍어놓고 와야지! 뭐 기일 때만 가? 그러라고 법에 쓰여 있어?"
"그래…… 후, 가을아, 고맙다."
"또 그러네! 오빠 이만 가야겠다. 오늘은 내가 데려다주고 들어갈게."
"아니야, 내가 데려다주고 가도 돼. 지하철 타고 가려면 힘들어."
"그러든가! 히, 가자!"
커플이 커피숍을 나가자 홍단아가 훌쩍거렸다.
"남자 부모님은 돌아가셨나 봐요……. 할머니 밑에서 컸나 봐요."
"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만 우리도 일어나는 게 어떨까 하네만."
"네……."
***
세운은 바쁘다며 2층으로 올라갔고, 우진은 만들지 않더라도 일단 어울리는 원단만이라도 찾는 중이었다.
딸랑.
"오셨어요? 사과받으셨어요?"
"사과받았지. 하마터면 욕도 할 뻔했지, 아마?"
"누가요?"
"누구긴, 저기 홍 인턴밖에 더 있느냐.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홍단아라면 당연히 울었을 것 같았기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빨개진 얼굴로 서 있던 홍단아가 민망한지 재빨리 우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원단만 고르는 중이에요."
"아, 그 커플이요?"
"네?"
"20대 정도 커플 맞죠? 조금 전에 커피숍에서 봤어요."
"그래요?"
홍단아는 커피숍에서 들은 얘기를 우진에게 해주었다. 우진은 얘기를 듣자 괜히 들었다 싶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장 노인이 스케치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스케치인 게냐?"
"네. 그렇긴 한데 재킷만 만들 거예요."
"흠. 하긴, 우리 임 선생 이름값이면 백만 원도 싼 게지."
"아니에요. 그냥 그 정도 될 거 같아요. 제 인건비 빼도, 무늬 염색도 해야 하고 이 여성분 재킷 원단도 수지II 써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럼 그것만 해도 벌써 금액에서 반이 넘어가더라고요. 작업하게 되면 자세한 건 작업 지시서 써서 보여 드릴게요."
"그러시게."
장 노인은 사무실로 들어갔고, 우진은 홍단아와 남게 되었다.
"정말 너무 예쁘다……. 플리티드 원피스인데 가슴 바로 밑에서 주름이 시작하네요. 정말 이걸로 웨딩드레스 해도 되겠어요. 가뜩이나 임신 중이라 신경 쓰였을 텐데. 선생님 대단하세요. 정말 존경해요."
우진은 그제야 왜 주름진 원피스가 보였는지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실크로 보이던 원피스도 합성보다는 천연 실크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도저히 가격 선에서 답이 안 나왔다.
그때, 우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실례인 걸 알면서 부탁드립니다. 조금 뒤에 제가 전화 걸어서 재킷 두 벌을 맞춘다고 할 겁니다. 그건 상관하지 마시고 여자 옷만 부탁드려요. 사정이 있어서 메시지로 부탁드리는 점 죄송합니다.]
잠시 뒤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또 도착했다.
[저기…… 이따가 전화해서 재킷 두 벌 맞춘다고 할 거예요. 그냥 알겠다고만 해주시고 옷은 만들지 말아주세요. 제가 따로 연락드릴게요.]
우진은 한참이나 메시지만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