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옷이 보여-78화 (78/231)

078화 커플 3

다음 날.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우진은 김포에 위치한 커피숍에 자리했다. 운전할 줄도 모르면서 도움이 되고 싶다며 이른 아침부터 출근한 홍단아와 운전기사 역할을 한 성훈까지 총 세 명이 이종도를 기다렸다.

7시가 조금 넘었을 때 이종도가 커피숍에 들어왔다.

"기다리셨네요. 죄송해요. 8시 출근이라 지금밖에 시간이 안 되네요. 하암.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원래 지방엔 출장도 가는걸요. 괜찮아요."

이종도는 성훈과 홍단아에게도 인사하고선 우진이 시키는 대로 일어섰다. 그는 잠을 설쳤는지 계속 하품을 해댔고, 우진은 한 시간 뒤에 출근을 한다는 말에 서둘러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생님. 제가 알아보니까…… 맞춤옷 만들려면 최소 150만 원은 줘야 한다던데……."

"보통 그럴 거예요. 저희는 상무님이 원단을 좀 싸게 구해 오셨어요. 나중에 옷 완성될 때 전부 드리거든요. 그때 보시면 아실 거예요."

"네, 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제 건 좀 이상해도 되는데, 가을이 옷은 여기 그대로만 부탁드려요."

이종도는 디자인이 담긴 태블릿 PC를 보며 부탁했고, 우진은 여전히 이종도의 치수를 재며 대답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우진은 막상 대화를 하다 보니 안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기가 너무 어렵다는 걸 몸소 느끼는 중이었다. 자신이 상담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만들자니 예전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찜찜했다.

그러다 결국 우진은 대놓고 말을 꺼냈다. 옆에 있던 성훈이 깜짝 놀라 헛기침까지 할 정도였다.

"결혼사진 찍으시려는 거죠? 사실 저희 직원분들이 커피숍에 갔다가 두 분 대화를 들었나 보더라고요."

"네? 아, 그 할아버님하고 아가씨……."

"그분들이 저희 상무님하고 수습 디자이너예요. 여기 계신 분이 지금 말씀하신 그 아가씨예요."

"아…… 안녕하세요."

이종도는 잠이 확 깨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또 인사를 했고, 홍단아 역시 어색한 미소로 인사했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우연치 않게 듣게 됐어요."

"그렇군요……."

이종도는 그때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기억이 났는지 붉어진 얼굴로 우진에게 물었다.

"그럼 저희 사정을 알고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원단이 싸게 구해졌고요, 두 분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예쁘셔서 직원분들이 나섰어요."

"……."

우진은 막상 말을 꺼내긴 했는데 치수도 재고 말도 생각하다 보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점점 말도 없어졌고, 그러다 보니 말과 함께 분위기도 어색해졌다.

"그런데 두 분은 오래 만나셨어요? 완전 달달하시던데."

옆에 있던 홍단아가 질문을 했고, 이종도는 부끄러운지 수줍게 웃었다.

"학교에서 만났어요."

"대학교에서요?"

"네, 같은 과였거든요. 저는 복학생이고…… 가을이는 신입생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하하."

"완전 도둑인데요?"

우진은 깜짝 놀라 홍단아를 봤다. 항상 울먹거리기만 하던 홍단아가 연애에 대해 물을 땐 눈을 반짝거렸다. 이종도 역시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때 보니까 신부님이 똑 부러지신 거 같아요."

"그런 면이 있죠. 착하기도 하고…… 미안하게 괜히 저 만나서 고생하고 있죠……."

"안 그러신 거 같던데. 얼굴에 행! 복! 하다고 쓰여 있던데요?"

"그랬나요? 그저 고맙죠. 고아나 다름없는 저한테 인생을 맡긴 거나 다름없는데."

성훈 역시 놀랐는지 우진과 마찬가지로 홍단아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홍단아의 활약으로 여러 가지 몰랐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들었던 대로 남자의 부모님이 없다는 말과, 그로 인해 여자의 부모님이 두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

"그래서 이번에 맞춤옷을 입고 다시 처갓집…… 아니, 가을이 집에 인사드리러 갈 생각이었어요. 결혼식은 못 하더라도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시구나. 그래서 결혼식은 왜 안 하시려는 거예요?"

"앞서 말씀드린, 그런 것도 있고요. 제가 가족도 없고…… 직장도 없어서 올 사람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혼식도 안 하니까 가을이만이라도 좋은 옷을 입혀주고 싶었거든요. 저야 사실…… 죄송하게도 일을 하다 보니까 이런 옷 입을 일이 없거든요."

"왜요? 선생님이 스케치한 거 보면 엄청 잘 어울리시는데."

"하하…… 일하는 곳하고 어울리지도 않고요. 셔츠도 불편하고…… 제가 땀이 많아서, 하하. 그래도 이 옷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차피 예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

이종도는 미안한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고, 우진은 귀 기울여 들었다.

'아…… 언제 입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구나…….'

때에 따라서 한 번만 입는 옷도 있었다. 왼쪽 눈으로 보이는 옷들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옷들만 보이는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기에, 이번 역시 단순히 예식복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종도의 사정을 들어보니 사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우진은 태블릿 PC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

늦은 밤. 매튜가 한국에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모두 퇴근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부 응접실에 자리했다.

"홍 인턴은 처음 보겠네?"

"네, 좀 긴장돼요."

"깐깐하긴 해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나가라고 하면 내가 막아줄게. 아, 내가 나설 필요 없나? 성훈이한테 들으니까 말 잘한다던데? 하하."

"아니에요……."

"아니긴. 오전에 고객 만나서 대화도 다 이끌고 그랬다던데."

"그냥 연애하는 게 부러워서 물어본 건데……."

저녁에 도착한다던 매튜가 조금 늦다 보니 각자 대화를 하고 있었다.

우진은 매튜를 기다리는 중에도 조금도 쉬지 않았다. 아침에 가게로 돌아오자마자 지금까지 신부 옷을 만들더니, 이제는 신랑 패턴을 그리는 중이었다. 장 노인은 그런 우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름이라 쿨맥스 재고가 없어서 내일까지 공수해서 보내준다고 했으니까 내일이나 도착할 게다. 그리고 네 말대로 재고용으로 좀 더 주문했으니 그리 알거라."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도의 얘기를 듣자 바로 생각난 원단이 쿨맥스였다.

쿨맥스. 땀 흡수도 빠르고 땀이 마르는 것도 빨랐다. 게다가 냉감 처리를 한 원단이라 다른 원단에 비해 시원함이 느껴졌다. 가격 또한 기존에 사용하려던 원단보다 훨씬 저렴했다.

기존 시장에 쿨맥스 혼방 원단으로 만든 셔츠가 있어서 특별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쓰임새가 많은 원단이었다.

다만 값싸고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맞춤옷을 하는 숍에서는 자주 사용하는 원단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쿨맥스 셔츠 대부분은 대량생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진에게 그런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장 노인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열심히 패턴을 그리고 있는 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처음에 봤을 땐 그저 디자인을 잘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디자인뿐만 아니라 다른 작업도 잘하는 데다, 고객 한 명, 한 명 받을수록 눈에 보일 정도로 변해갔다.

처음엔 옷을 만들고 만족하더니 이제는 옷을 입는 사람까지 생각해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만 하더라도 패턴을 그리는 데 열정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면서 기다리던 매튜가 들어왔다.

"매튜 실장! 아니, 미국 가서 밥도 잘 못 먹었어요? 왜 그렇게 말랐어!"

세운의 농담에 매튜는 피식 웃고는 인사를 건넸다. 다른 사람들은 영어 문제로 기다리던 것과 다르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지만, 얼굴 표정만은 반가워했다. 매튜도 환영이 기분 좋은지 일일이 인사를 하고선 우진 앞에 섰다.

"다녀왔습니다. 선생님."

"……."

"……선생님?"

"고객 옷 준비하느라 정신 팔렸네, 또."

다들 우진을 두드리려 할 때, 매튜가 서둘러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작업 중에 방해하지 마십쇼."

매튜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았다. 상당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말이 통하는 세운이 대화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우진 씨는 진짜 옆에 불이 나도 모를 거야."

"바쁘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무슨 작업 하시는 겁니까?"

"이번 건 별로 돈은 안 되는 일인데……."

세운은 이번 일에 대해 설명을 해줬고, 그 얘기를 들은 매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패턴을 그리는 우진을 보며 활짝 웃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 일을 기회로 삼으시는군요. 저도 미국 일만 집중하느라 조금 죄송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나 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매튜는 세운을 보며 피식 웃었고, 세운은 오랜만에 보는 웃음에 얼굴을 찌푸렸다.

"모르실 만도 합니다. 워낙 말씀을 안 하시니까."

"둘이 무슨 얘기라도 했어?"

"안 해도 전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거 다 압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뭔데, 그게!"

"I.J가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알게 모르게 명품 계열에 들어섰지만, 빨리 오른 만큼 탄탄한 기반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젊은 부부를 통해 소비자에게 친근함을 주며 사회적 약자를 도움으로써 기업의 책임을 보여주려고 하시는 겁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하시려는 거죠. 당연히 지금 선생님 행보로 보면 언론에서 다룰 것은 분명합니다."

세운은 눈만 껌뻑거리며 매튜를 봤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우진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는 게 이제야 생각났다.

세운은 옆에서 박수까지 치는 매튜의 모습에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었다.

정말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

다음 날.

우진은 앞에 있는 매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프 우드에서 온 촬영팀더러 결혼식 사진을 찍어달라는 말이에요?"

"맞습니다."

"왜요?"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전부 얘기 들었습니다."

우진은 눈만 껌벅거렸다.

"이건 뭔데요? 촬영장 촬영을 가능하게 해주는 대신 식사를 제공받는다는 건……. 이래도 돼요?"

"됩니다. 이미 촬영팀에게 물어봤고, 촬영팀도 허락했습니다. 미스터 장이 Moon 매거진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공개 촬영을 허락해 주는 대신 받는 비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전부 비공개 촬영이어서 Moon 매거진에서도 허락할 겁니다."

언제 준비했는지 매튜는 일정부터 참여할 곳을 정리한 자료를 프린트까지 해왔다.

자료를 보다 보니 우진도 혹하긴 했다. 직접 들어가는 돈도 없었고, 매튜의 말처럼 홍보도 할 수 있는 데다가, 작게나마 젊은 부부의 결혼식을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Moon 매거진의 특종까지.

"제 나름대로 준비했는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신 것과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일단 물어보고요. 그런데 촬영 장소가 이렇게 많아요?"

"서울 시청에서도 환영한다는 대답을 받았고, 오늘 장소 미팅에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어디십니까?"

매튜가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이런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당사자인 이종도에게 말이라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진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선생님, 제가 금방 다시 전화드릴게요.

일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는지 전화가 바로 끊겼다가, 잠시 뒤 전화가 걸려왔다.

우진은 매튜가 준 자료를 보며 설명을 했고, 그 중간중간 전화를 끊고 다시 거는 일이 계속되었다.

"신경 쓰이시면 촬영 안 하셔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정말 감사해요. 감사한데 그런 특혜를 저희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특혜는 아니고요. 그러니까 음…… 상부상조? 저희도 도움을 받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종도는 계속 감사 인사를 했다. 우진은 뿌듯한 마음 한편, 이 정도 일에 울먹일 정도로 고마워하는 모습이 짠하기도 했다.

"그럼 쉬는 날이 월요일 맞으시죠? 마침 다음 주 월요일에 가빛섬? 세빛섬 중 한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괜찮으세요?"

-어디든 괜찮습니다…….

"그럼 신부님께는 저희가 따로 연락드릴까요?"

-아…….

이종도가 무슨 이유인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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