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라온 엔터 3
후는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금까지 봤던 사람들은 하나의 옷을 완성해야 빛이 나며 다른 옷이 보였건만, 후라는 가수는 부르는 노래에 따라 옷이 달라 보였다. 심지어 지금은 겹쳐 보이는 옷도 아니었다.
상당히 큰 키에 모델 같은 몸매 덕에 하얀색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만 입었을 뿐인데도 멋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저 옷을 본 듯한 느낌을 받은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두식 매니저님이구나."
우진은 똑같은 옷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났다는 기쁨에 혼잣말을 뱉었고, 그 순간 연주가 끊겼다. 연주를 하던 윤후나 옆에 서 있던 김 대표까지 놀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진짜 신기하네. 아까 두식이랑 대식이 맞추는 것도 그렇고."
오히려 우진은 갑자기 받은 질문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이 노래가 두식이 형 얘기인 거 어떻게 아셨냐고요. 두식이 형 얼굴 보면 실연당한 게 보이는 건가?"
"참 신기하네……."
정작 당사자인 우진은 깜짝 놀랐다. 알고 한 얘기도 아니었고, 그저 같은 옷이 보여서 뱉었을 뿐이었다.
"그냥 느낌인데……."
"오늘 처음 본 거 아니에요? 신기하네. 그럼 이 노래는 누구 얘기로 만들었는지 맞춰봐요."
윤후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고, 우진은 눈만 껌뻑거렸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순간 윤후의 옷이 바뀌었다. 이번 역시 본 적 있는 옷이었다. 어디서 봤는지 찾을 필요도 없었다. 바로 옆에 있었다.
"대표님인 거 같은데요……."
"허……."
"우와, 엄청 신기하네. 그럼 이건요?"
우진이 윤후의 주변 사람들을 전부 알 리가 없었기에 처음 보는 옷도 있었다.
윤후는 자신이 왜 이런 이상한 퀴즈를 내고 있는지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끝없이 질문했고, 그 덕분에 우진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왼쪽 눈으로 보인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 윤후라는 사람이 특별했다. 노래를 부를 때는 아예 노래 속 주인공, 노랫말의 당사자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처음과 달리,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자신의 얘기가 아님에도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비록 다른 분야이지만, 윤후를 보면 배울 것이 많았다.
윤후가 노래를 즐기듯 우진도 옷 만드는 걸 즐기고 있다는 점은 같았다. 하지만 윤후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은 아직 어려웠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그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긴 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생각을 배제하고 철저히 고객이 원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왼쪽 눈으로 디자인이 보이고 있지만, 언제까지 눈에만 의존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연습했고, 그 결과물을 홍단아에게 칭찬받았을 때의 느낌은 잊을 수 없었다.
왼쪽 눈으로 보인 옷을 만들 때 느꼈던 보람보다 스스로 해냈을 때의 보람이 더 컸다.
우진은 윤후를 보며 방향성을 제시받은 느낌이었다.
고객이 원하면서 자신의 색을 보여주는 일.
아직 부족하기에 당장 결과물을 내놓기는 어렵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지금 겹쳐 보이는 윤후의 옷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왜 웃기만 해요. 이건 누구 노래게요?"
"……."
너무 과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우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뒤. 우진은 사무실에 앉아 일정을 정리했다.
'채우리는 그냥 노래에 맞게 보이는 거고. 그분은…… 대단하다.'
우진은 윤후에게서 느낀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지 가게에 돌아와서도 생각에 잠겼다.
채우리와의 대화는 적었지만, 얘기를 하다 보니 직업 특성 때문에 그런 디자인이 보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노래에 맞춰 무대에서 입을 옷, 그 옷이 보인 것이었다.
때문에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옷을 입고 티저 영상을 촬영하고 싶다며 빨리 완성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기에 서둘러야 했다.
이미 가봉을 완성해 놓은 상태였고, 채우리가 입어본 뒤 자잘한 부분만 체크하면 끝이었다. 그때 신발을 가져온 홍단아가 쭈뼛대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오늘은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저도 후 님이 부르는 노래 듣고 싶은데……."
"다음에요."
홍단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한참을 보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자칫하면 밤새도록 노래를 들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때, 장 노인이 마구 웃으며 들어왔다.
"난리도 아니네. 그때 그 양반들이 잘 배워갔고만. 오늘 1호 받은 사람이 인터뷰를 잘했어, 하하."
뉴욕 아제슬에서 3일 만에 첫 번째 완성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옷 주인은 옷을 받음과 동시에 수많은 언론과 인터뷰를 해야 했다. 그 인터뷰로 인해 아제슬의 인기는 당분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 입고 계신 옷이 아제슬에서 주문한 옷입니까? 어떠십니까?
-휴, 8,000달러가 전혀 아깝지 않은 옷? 이건 입어봐야 알아요.
-뭐가 어떻게 다른가요? 보기에는 기존의 옷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정말 입어봐야 알아요. 말로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앞으로 다른 옷은 더 이상 못 입을 거 같아서 큰일이에요.
그 뒤로도 기자들은 옷을 받은 사람들과 차례대로 인터뷰를 했고, 전부 같은 내용을 내놓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아제슬에 대해 궁금해했고, 늦게나마 주문을 하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랜 준비 기간이 무색하게, 며칠 만에 2,000벌 한정이 완판되었다.
순식간에 160억이 넘는 돈을 벌어들인 것이었다. 제작을 하느라 아직 옷을 못 받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완성될 것이었다.
당연히 한국에서도 아제슬 신드롬이라는 제목으로 집중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그 결과로 I.J 숍은 전화를 또 내려놓았지만.
"그럼 이제 우리도 자금 사정 좀 풀리겠고만."
"좀 전에 매튜 씨가 세금하고 기타 비용 다 떼면 23억 정도 들어온대요."
"그렇게 적다고? 우리가 2할인데 너무 많이 떼가는 거 아닌가?"
"메일 보냈다니까 한번 보세요. 그냥 패턴만 넘겼으면 그렇게 크지 않았을 텐데, 뉴욕에 간판 내건 게 큰 거 같아요. 그래도 우리는 두 곳하고 다르게 주식회사가 아니라서 이 정도만 해도 굉장한 거 같은데. 매튜 씨 말로는 지금 두 곳은 밑지는 장사나 다름없대요."
"하긴 그렇지. 그래도 지들 이름은 완전 견고해졌으니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을 게다."
"아마 곧 다음 옷도 준비하게 될 거라고 했어요. 이번이 시험 시즌이었다면 다음엔 제대로 낼 거라고 하더라고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매튜의 탓도 있는 데다가 아직 실제로 받은 돈이 아니기에 23억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되지 않았다. 우진은 그저 돈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 기뻤다.
띠리리리.
그때, 전화가 울렸고 번호를 보니 오늘 약속한 라온의 대표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하하하.
"네. 오늘 가기로 했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은요.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시기 힘드실 거 같아서 우리더러 직접 가라고 했습니다, 하하.
"아…… 숍 앞에 기자분들이 많아서 곤란하실 텐데."
-곤란하긴요. 어떻게 저희가 선생님을 오라 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아까 출발했으니까 이제 곧 도착할 때 됐을 겁니다.
불편할 게 뻔한데도 굳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벌써 출발했다는데 돌아가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전화를 끊은 우진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기에 서둘러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가게 밖에서 지금까지와 다르게 건물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을 나가자, 건물 뒤 작업실에 있던 성훈도 놀랐는지 가게로 들어오고 있었다.
"뭐지? 또 무슨 일이야?"
"휴…… 출발했다고 하더니 도착이네요. 채우리 씨예요."
"아, 그래? 인기가 엄청 많은가. 난리도 아니네. 연예인이 타는 차는 저렇구나. 엄청 크네. 자, 이거. 만들긴 했는데 처음이라 잘 만들었는지 모르겠네. 조금 고생했어. 하하, 일단 사무실에 둘게."
성훈에게 부탁한 귀걸이로, 임시로 느낌만 보려고 만든 것이었다. 귀걸이를 받아 든 우진은 밖의 상황이 궁금해 창문으로 가게 밖을 살폈다.
채우리가 생각보다 인기가 많았구나, 란 생각을 하며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기자들이 카메라를 우진에게로 돌렸고, 우진은 머리를 긁적이고선 차 문을 두드렸다. 곧 차 문이 열렸다.
"우진 선생님!"
"후 씨?"
"내가 찾아보니까 우리 동갑이던데! 친구 할래?"
그러자 차에서 두꺼운 손이 나오며 윤후를 가로막았다.
"나이만 같으면 죄다 친구 하자고 허네. 미쳐불겄네."
저번에 봤던 대식이라는 사람과 처음 보는 외국인까지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양쪽에 서서 기자들의 카메라를 가로막자 윤후와 채우리가 서둘러 내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숍 유리창에는 기자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셔터 내려야겠지?"
성훈은 가게 밖으로 나가 기자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양해를 구하더니 셔터를 내렸다. 응접실에 자리한 우진은 왜 윤후까지 이곳에 따라왔는지 궁금했다.
"우진아, 친구 할 거지?"
이런 식으로 친구가 되는 건 처음이었다. 친구 한다고 해도 전혀 편할 것 같지 않았다. 대식은 고개를 젓고 있었고, 채우리는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나 오늘 통역으로 왔어."
"통역 같은 소리 허네. 나도 있는디."
노래 부를 때만 존경스러운 사람. 말수가 적은 우진에게 윤후는 너무 말이 많은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옆에 있던 외국인이 인사를 건넸다.
"영어 가능하십니까?"
"네."
"다행이군요. MfB에이전시 앤드류 윌슨입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MfB라 하면 우진도 들어본 적 있었다. 미국에서 유명한 모델들도 MfB 소속이 상당했기에 못 들어본 게 이상했다. 그런 MfB에서 숍을 방문했다는 것이 의아했다.
"내 일을 봐주고 계시거든. 내가 양쪽 소속이라. 나뿐만이 아니라 여기 우리 씨 있는 F.I.F도 양다리야."
"양다…… 리."
그사이 앤드류라는 사람이 가방을 열더니 서류철을 꺼냈다. 딱 풍기는 느낌만 놓고 보면 매튜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차가워 보였다.
"저희 채우리 양이 이번에 아주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걸 그룹 수명은 상당히 짧습니다. 이번에 선발 주자인 우리 양이 잘되어야지 그 뒤에 나올 멤버들도 그 길을 따라올 수 있습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다. 연예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궁금하지도 않았기에 저런 얘기를 왜 자신에게 하는지 의도만 파악하려 했다.
"그래서 저희가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려 합니다."
"도움이요?"
"네, 물론 후 씨가 곡을 만들었다는 점도 홍보할 예정입니다. 거기에 더해 선생님께서 만들어주신 옷을 밝힐 예정입니다."
밝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채우리가 인지도가 적다고 해도 분명 광고 효과도 있을 것이기에, 오히려 밝혀주면 이쪽이 고마웠다.
"그거야 옷이 완성되면 채우리 씨 옷이 되는 거니까 문제없을 거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일단 앞에 내용은 저희가 내보낼 보도 자료입니다."
< I.J 임우진 디자이너의 드레스 >
"그 제목으로 달아오르게 한 뒤 다음 기사가 나올 겁니다."
< 드레스의 주인공. F.I.F의 채우리 >
< 티저 영상에서 여신을 보다 >
< F.I.F 채우리 솔로로 컴백 D-3 >
차곡차곡 순서대로 준비된 자료였다. 기사는 기자만 쓰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란 점도 놀라웠고, 빈틈없이 준비해서 온 모습도 대단해 보였다.
"이렇게 순서대로 기사가 나올 예정입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진은 장 노인에게도 보여주었다. 상의는 해봐야겠지만, 우진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그럼 옷은 어떻게 되는지."
"잠시만요. 가지고 나올게요."
우진은 서둘러 옷을 들고 나왔다. 원피스이다 보니 가봉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완성한 상태였다.
"여기 커튼 안에서 입어보시겠어요?"
우진은 옷을 받아 든 채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잠시 뒤 채우리가 커튼을 열었다. 우진은 자연스럽게 채우리에게 다가가 허리를 잡았다.
"끈이 스트랩으로 넓게 이 부분을 둘러쌀 거예요. 벨트처럼요. 아마 이 정도인데 어떠세요?"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럼 이대로 착용해 볼게요."
우진은 직접 눈으로 보이는 대로 허리끈을 최대한 타이트하게 맸다. 그러는 사이 성훈이 사무실에 있던 신발 박스를 가져왔다. 우진은 씨익 웃으며 신발마저 착용시켰다.
"흠…… 워째 예쁘긴 헌 거 같은디. 그림으로 본 느낌은 아닌디? 우리 너 밤에 뭐 묵은 거 아니여?"
우진은 한발 떨어져 채우리를 보고선 씨익 웃었다. 옷은 이대로 완성하면 될 것 같았다. 이제 앞머리만 자르고 머리를 묶기만 하면 저번에 스케치한 그대로 느낌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