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유니폼 5
며칠 뒤.
대구로 내려온 우진은 미리 준비한 인터뷰 내용을 보는 중이었다. 옆에 학교 측 인사들이 자리한 건 당연했고, 최 대표와 'Position'에서 나온 직원들도 함께였다.
다들 삼삼오오 있는 반면, I.J는 우진과 매튜 단둘뿐이었다.
우진은 그 무리들에게 감사 인사를 끊임없이 받는 중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홍보도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수정고 동문회도 학교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하."
"아니에요. 그런데 이렇게 많이 오실 필요 없는데."
우진은 각기 다른 트럭에서 바쁘게 상자를 옮기는 사람들을 봤다. 동문회에서는 선수들을 위해 음식 및 야구 장비를 지원했고, 'Position'에서도 기본 장비 및 새로 만든 유니폼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훈련하는 선수들을 촬영하던 Moon 매거진 촬영팀들까지 함께였다. 선수들은 아직 유니폼을 받지 못해 본래 수정고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훈련이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촬영팀은 그 모습이 뭐가 좋은지 열심히 촬영했다.
한참이나 촬영이 이어진 뒤 감독이 선수들을 모아 전부 씻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전부 같은 머리 모양을 한 선수들이 단체로 뛰어올라 갔다. 그제야 Moon 매거진 장 기자와 고 기자가 우진에게 다가왔다.
"하하. 선생님, 정말 기대됩니다. 벌써 제목도 뽑았습니다!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훈련 중인 꿈나무들을 위한 선행! I.J의 임우진 디자이너!' 하하, 어떠십니까?"
"감사해요."
"저희가 감사하죠! 매번 저희한테 특종도 주시고! 아, 그 얘기 들으셨어요? 선생님이 옷을 만들어주신 부부 있잖아요. 내년 3월에 미국 간다고 그랬는데! 그것도 저희가 맡기로 했거든요."
"아, 그래요? 요즘 바빠서."
"하하, 그러시죠. 정말 후원도 하고,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아예 시골 학교를 후원하시는 편이 그림이 더 살았을 건데, 하하. 하긴 I.J 입장도 있으니까요."
우진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매튜를 봤다. 우진은 그렇게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그냥 조용히 후원한다고만 알렸으면 했는데, 매튜의 성화로 인터뷰까지 준비했다.
전부 'Position'과의 계약 내용 때문이었다.
보통 디자인 외주를 받으면 그 값을 받고 거래가 끝나고, 덧붙여 인센티브를 받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이번 계약은 달랐다. 사실 우진은 자신의 디자인을 'Position'이 제작하고 후원하는 걸로 끝내려 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흔히 하는 재능 기부의 일환으로 삼으려 했지만, 매튜와 장 노인은 물론이고 최 대표까지 그럴 순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기술지원비까지 받았으니 따로 비용을 받긴 그랬다.
물론 I.J의 로고가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로고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기에, 서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Position'은 아직 안정적이지 않아 자금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Position'은 계약금이 없는 러닝개런티를 제안했고, 장 노인이 곧바로 찬성해서 계약이 이루어졌다.
비율은 5년간 매출의 10%로 높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많이 팔리면 많이 팔릴수록 돌아오는 금액이 늘어났다.
스파이크 가격이 대략 20만 원 안팎이었기에, 그 정도만 받는다 해도 한 켤레당 2만 원이 들어왔다.
보통 운동화면 모를까, 스파이크라면 전문적으로 운동하는 선수나 사회인 야구단 정도만 사용했다. 거기에다 기존 업체들과 경쟁하는 입장이다 보니, 일 년에 1,000켤레만 팔아도 많이 팔린 수준일 것이다.
우진도 그 정도면 부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샤워를 마친 선수 전부가 우진이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고 마치 군인들처럼 열을 맞춰 주장 인솔하에 계단을 내려왔다.
또각또각.
시멘트 계단을 발맞춰 내려오니 스파이크 징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우진은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찡한 느낌이었다.
50명 정도 되는 선수들 모두가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내려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와…… 뭔데! 아까 그 꼬질꼬질하던 놈들 맞아?"
"프로 선수들…… 아니, 국가 대표 같다……."
옆에서 사람들이 선수들을 보며 웅성거렸고, 선수들도 그 반응이 싫지 않은지 붉어진 얼굴로 유니폼을 쓰다듬었다.
선수들이 모두 내려오자 우진은 앞으로 한 발 다가갔다. 보통 가봉을 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가봉 없이 완성한 옷이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 있어요?"
"없습니다!"
"괜찮으니까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말해줘요."
"정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편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군인들처럼 동시에 같은 말을 뱉었다. 우진은 멋쩍은 얼굴을 하고 선수 모두를 일일이 살폈다. 그리고 감독과 코치까지 살피고는 이상 없음을 확인했다.
"그럼 슬라이딩 한번 해볼래요?"
우진은 누빔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 순간 선수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그 모습을 본 감독이 큰 목소리로 버럭 했다.
"이 자식들! 유니폼이 새것이라고 시합 중에 슬라이딩 안 할 거야? 기껏 누빔도 해주셨는데! 안 되겠어! 전부 집합!"
우진은 선수들 표정을 이해하고 피식 웃었다. 아무리 선수라고 해도 새 옷인데 흙바닥에 미끄러지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다.
감독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모여들었지만, 옷을 만들어준 장본인인 자신을 향해 원망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다행히 장 기자가 끼어들었다.
"안 돼요! 일단 촬영부터 하고 뛰어다니든지 하세요. 아까 꼬질꼬질한 모습이랑 비교해야 한다고요. 자, 선수들! 앞에는 좀 작은 선수들이 쪼그리고 앉고, 뒤에는 큰 선수들로 이 열로 좀 맞춰주세요! 슬램덩크 봤죠? 그런 느낌으로!"
선수들은 감독을 힐끔 보더니 잘됐구나 싶었는지, 바로 장 기자 말대로 위치를 움직였다.
"옆에 감독님하고 코치님도 서야죠!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파이팅 포즈 짓는 겁니다! 하나, 둘, 셋!"
"수정고 파이팅!"
"자, 그대로 계세요. 몇 번 더 촬영해야 하니까."
우진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 대표도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대로 전국체전 우승까지 하면 정말 홍보 효과가 엄청날 것 같습니다. 일반 고등학생 야구부는 대부분 상하의 모두 메모리 100이나 150으로 만드는데 수정고 선수들은 옷만 봐도 잘할 거 같네요, 하하."
"누가 그러더라고요. 분명 우승할 수 있다고."
"그렇습니까. 하하."
촬영 중인 장 기자가 우진을 보며 소리쳤다.
"자, 주전 선수들만 남고. 선생님은 이리 오세요! 최 대표님도 오십쇼. 유니폼하고 스파이크 준비한 거 있죠? 그거 자연스럽게 전달하시면 됩니다, 하하."
그러자 최 대표가 우진에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가시죠."
***
며칠 뒤.
수정고에 대한 소식이 Moon 매거진에 실렸고, 그에 따라 우진은 몇몇 방송국과 가벼운 인터뷰를 해야 했다. 전처럼 크게 보도되진 않았지만, 우진은 오히려 그쪽이 편했다.
단지 그 일이 있고 나서 숍에 찾아오는 부류가 늘었다.
전에 한 번씩 만났던 브랜드 쪽 사람들은 그나마 편한 쪽에 속했다. 문제는 후원을 원하는 문의가 끝도 없었다. 전국에 후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다고 전부 후원해 줄 수도 없어 곤란했다.
우진은 미안하지만 곤란한 일들은 사무실 식구들에게 떠넘기고 응접실에 나와 있었다. 그런 우진의 앞에 거대한 팟사라곤이 자리했다.
"하루 일찍 불러서 미안해요. 집은 괜찮아요?"
"집 좁긴 하지만 좋아요? 그리고 오늘부터 출근한 걸로 쳐주시면 되죠?"
계속 질문하듯 말하는 팟사라곤이었다. 그냥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우진은 문득 매튜가 팟사라곤의 공적인 태도를 언급한 것이 생각나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유니폼도 제가 구매해야 하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어우. 잠깐 팔 좀 올려보시겠어요?"
시간이 있을 때 팟사라곤의 유니폼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몸이 얼마나 큰지 치수 재는 것도 버거웠다.
"키가 2m 9㎝네요."
"크죠? 별명이 거인이에요? 아버지가 러시아 사람이라 아버지 닮아서 그래요?"
"아, 그러시구나."
키를 감안하더라도 몸무게가 엄청났다. 배 둘레나 허리둘레로 봐서는 150㎏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우진은 지금까지 옷을 만들면서 허리둘레 55인치를 만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둘이 있으니까 편하게 영어로 말하세요. 그리고 여기 좀 잡고 계세요. 제가 팔이 짧아서……."
"제가 뚱뚱해서 그런 거죠."
우진이 그의 기분이 상할까 돌려 말했음에도 팟사라곤은 거리낌 없이 말을 받아쳤다. 그걸 보면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일단 겪어봐야 알 것 같다고 생각한 우진은 다시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그때, 숍 문이 열리며 홍단아가 들어왔다.
"어? 이제 온 거예요?"
"선생님! 으앙! 반가워요! 너무 반가워요……. 손님 계셨네요……."
"손님 아니에요. 인사하세요. 내일부터 출근할 팟사라곤 찌라티왓 씨예요."
"아! 그럼 저보다 막내 생기는 거예요?"
우진은 대답하지 못하고 멋쩍게 웃었다. 팟사라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장이 될 예정이었다. 그래도 홍단아는 기쁜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와, 엄청 크네요? 팟사라다 씨? 이름이 너무 어렵다."
"홈페이지랑 앱 담당하실 실장님이세요."
"실장님…… 이셨구나……. 네……. 그래서 유니폼도 바로 맞춰주시는구나……. 쏘리, 미스터 팟."
우진은 또다시 침울해진 홍단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마 실장님은요?"
"심부름 온 거예요……."
"아…… 네."
홍단아는 말없이 치수 재는 걸 도와주더니 끝나자마자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바빴다고 해도 홍단아의 유니폼을 늦게 만들어 준 건 사실이었기에 우진은 약간 미안해졌다.
"다 됐어요. 팟사라곤 씨?"
팟사라곤의 고개가 홍단아가 올라간 계단에 멈춰 있었다. 혹시 홍단아가 우울하던 모습이 마음에 걸린 건가 하는 생각에 우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아름다운 분도 같이 일하는 분이십니까?"
"누구요?"
"조금 전에 귀엽게 입술 내미시던."
"홍단아 씨요? 같이 일하는 분 맞아요.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우진은 아무래도 매튜의 짐작이 틀린 것 같았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다른 사람 일이라고 모른 척하진 않을 것 같았다. 역시 왼쪽 눈으로 유니폼이 보인 이유가 있었다. 우진은 기분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아! 맞다. 내일은 I.J 전체가 야구 구경 가거든요. 가시는 김에 같이 가시죠?"
"내일…… 그럼 아름다운 여성분도 오시는 겁니까?"
"아, 홍단아 씨는 아마 못 올 거예요. 전북 익산이라 아침에 출발할 거예요. 한 12시쯤 출발할 거니까 그때까지 오세요."
"아닙니다. 그럼 화요일에 출근하겠습니다."
우진은 약간 당황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아직 익숙지 않을 텐데 사람들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우진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
다음 날. I.J 식구들은 익산까지 내려와 경기장에 자리했다. 좌석은 프로야구와는 다르게 얼마 없었다.
가을이긴 하지만 아직 햇볕이 뜨거운데도 관중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보이는 좌석이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선수들의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중간중간 우진이 아는 얼굴도 보였다.
"저 사람들은 왜 온 걸까요?"
"궁금한 게지. 그냥 무시해도 될지, 아니면 자신들도 발맞춰 다른 디자이너와 손잡아야 할지 각 재고 있는 게야. 이번에 잘되면 자기네들도 바로 하겠지."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 노인을 봤다. 그렇게 손자인 창수를 못마땅하게 여길 때는 언제고, 시합에 나오지도 않는 창수를 응원하는 플래카드까지 준비해 왔다.
장 노인은 플래카드를 든 채 창수를 찾느라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이 인사를 하러 나왔다. 역시 창수는 후보에도 없었다. 우진은 실망했을 장 노인을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때, 함께 있던 미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툭 뱉었다.
"전략 분석원은 경기에 안 나와요."
"뭐? 나올지 안 나올지 유 실장이 어떻게 아나!"
"전력 분석원은 뒤에서 팀을 서포트하는 역할이거든요. 경기장에는 못 나와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에요. 아마 경기장 어디서 지금 보고 있을 거예요."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자는 야구 경기를 많이 봤는지 익숙하게 중계방송을 연결했다.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우진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미자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미자는 방송이 더 잘 들리게끔 휴대폰을 우진의 옆으로 옮겼다.
그렇게 한참 경기가 흘러갔다. 우진은 생각보다 재미없다고 느껴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그때, 미자가 한숨을 뱉었다.
"저것도 못 잡네. 이러다가 1회전 탈락하겠어요."
휴대폰에 들리는 중계방송도 비슷한 말을 뱉었다.
-청룡기에서 힘을 너무 뺀 건가요? 아니면 많은 관객들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걸까요? 우승 후보인 수정고가 무너지기엔 너무 이른 거 같지만, 전국체전이라면 이런 게 가능하죠. 그래도 오늘 수정고가 보여주는 내야 수비진의 실책과 소극적인 주루 플레이는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