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옷이 보여-112화 (112/231)

112화 고민 2

협회장이라는 사람과 통화하는 내내 우진은 떨떠름했다. 패션쇼 제의는 고마운데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 패션쇼 후원이 호정 모직일세. 그래서 다른 디자이너들은 전부 호정 모직에서 원단을 공급받기로 했다네. 자네도 만족할 걸세.

제프 우드와 헤슬의 제안도 고민 중이었던 터라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협회장이라는 사람은 결정도 안 내렸는데 처음부터 계속 반말에다가 말투도 강압적이었다.

게다가 자신도 모르는 참여 여부를 기자들이 먼저 알고 있기까지 했다.

-그리고 'JoJo 패션지'에서 기자 한 명이 갈 거야. 인터뷰 좀 해주게. 내가 기사 잘 써주라고 했으니까 걱정 말게. 자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게야. 어린 만큼 경험이 중요하지. 내가 장담하니 내 말 듣게.

이 협회장이라는 사람은 예전에 라이언 킹덤 대표가 왔을 때 함께 동행해서 잠깐 마주친 게 다였다. 그런데 마치 자신을 부하라도 된 것처럼 구는 모습에 우진은 묘한 반발심이 생겼다.

하지만 우진은 패션쇼에 끌리는 마음도 있었기에 티내지 않고 그저 듣고만 있었다.

판매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패션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듣는다면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았다. 이번에 제프, 데이비드와 아제슬을 못 하더라도 다음에 제안을 받을 땐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후원이 크다 보니 호정 어패럴과 협업해서 한 작품을 내놓기로 했네. 다들 찬성했으니까 자네도 그리 알게. 내 특별히 실력 있는 팀으로 붙여주겠네.

"아……."

우진은 호정 어패럴과 협업하라는 말에 문득 최 이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부터 준비하고 있었고, 최동훈을 I.J와 붙이기로 미리부터 정해놓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최동훈은 호정을 나와 'Position'을 차린 상태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진은 패션쇼를 서게 된다면 최동훈과 함께하고 싶었다.

최 이사가 나쁜 짓을 한 건 알지만, 그 사람도 자신이 한 약속을 그대로 교도소에서 이행 중이었다. 무엇보다 아들인 최 대표는 우진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 중이었다.

"회장님."

-왜 그러나?

"꼭 호정하고 해야 되는 건 아니죠?"

-해야지. 다른 곳은 안 되네! 음…… 혹시 제프 우드와 헤슬을 말하는 겐가? 거기라면 우리도 생각해 보겠네.

"거긴 아니에요."

-그럼 그냥 내 말대로 하게.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걸세.

우진은 조용히 한숨을 뱉었다. 협회장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패션쇼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다. 다만 최 이사와 했던 약속도 지키고 싶었다.

마음은 패션쇼 쪽으로 더 향했지만 아버지에게 사람과의 약속이 중요하다고 배워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우진은 쉽게 결정할 수 없어서 일단 당사자인 최 대표의 의견을 묻고 결정하기로 했다.

"조금 생각해 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생각할 게 뭐가 있나.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가 본데, 내가 하란 대로 하면 일단 손해는 안 볼 거라네. 알지 않은가? 지금은 유명세를 타고 잘나간다고 하더라도 디자이너들이 언제까지 계속 잘나가기만 하진 않을 거라네. 그때를 대비해서 패션쇼 명함이라도 따놔야지. 내 말대로 하게. 신인 디자이너들에게는 거의 10분 정도 시간을 주지만, 내가 특별히 그 배로 배정해 주겠네.

우진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숍 스케줄도 있고요. 저 혼자 하는 건 아니에요."

-디자이너가 하자면 해야지, 무슨……. 알겠네. 내일까지 알려주게.

우진은 I.J를 함께 만든 사람들을 우습게 보는 말에 순간 화가 올라왔다. 디자이너가 무슨 벼슬이냐고 여기는 모습에 말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예의 없는 건 어디 가지 않았다. 상대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I.J 식구들도 불같이 화를 냈다.

"선생님, 마 실장님을 통해 들어서 정확히 어떤 말투인지 파악하긴 힘듭니다. 그래도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패션쇼를 한다고 우리한테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부탁이니 고개 숙이지 마십쇼. 조금 전에 통화한 사람 백 명을 데려와도 선생님 한 분만 못합니다."

우진은 회장의 나이를 생각해서 예의를 지킨다고 한 것이 매튜를 화나게 한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은 무슨. 열받기만 하는고만. 원로 디자이너라고? 나이를 처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야지. 저러니 꼰대 소리를 듣는 게야. 이참에 패션쇼 대신 제프 우드 그 양반이랑 하는 게 낫겠고만."

"무슨, 우리 숍 크는 데 도와준 게 뭐 있다고 이래라저래라야? 우진아, 하지 마! 할 거면 해외 나가서 해. 밀라노나 파리 가서 하면 되잖아! 미자 봐라. 지금 주먹에서 피 나려고 그래."

"맞아요! 선생님이 아쉬울 것 없으시잖아요."

다들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고 분해했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우진을 더 곤란하게 만들었다. 우진도 회장이라는 사람만 놓고 보면 거절하고 싶었지만,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

갑자기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그동안 한가했던 게 꿈이라고 느껴질 만큼 바빴다. 제프의 제안도 생각해 봐야 했고, 패션쇼도 마찬가지였다.

두 제의 모두 숍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했지만, 우진의 의견이 중요했기에 매튜나 장 노인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우진에게는 그것보다 내일 약속이 잡힌 고객이 우선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우진은 완성시킨 고객의 슈트를 들어 올렸다.

예전에는 이러고 끝이었다면, 지금은 각 부위 치수가 적힌 디자인을 팟사라곤에게 넘겨야 했다.

우진은 치수가 적힌 스케치를 들고 2층으로 향했고, 그때 마침 약속을 잡았던 'Position'의 최 대표가 숍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오셨어요? 잠시만 앉아 계세요. 저 이것 좀 주고 와야 해서……."

"하하. 선생님, 기사는 벌써 봤습니다. 축하드립니…… 그런데…… 눈에 그게 뭔지……."

"아! 선물 받은 거예요. 이상해요?"

"하하…… 아닙니다. 멋지시네요. 2층에 가시는 거죠? 그럼 같이 올라가시죠. 저도 온 김에 세운 형님께도 인사드려야겠습니다."

"그러실래요?"

우진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최 대표를 데리고 올라갔다.

2층도 조금 전의 우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운은 주문받은 신발을 만드느라 정신없었고, 홍단아는 조수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피할 작업 중에는 그 누구도 건드려선 안 됐다. 그렇기에 우진은 인사하려던 최 대표에게 조금 이따가 인사하라고 알려주고는 어쩔 수 없이 팟사라곤에게 함께 갔다.

최 대표는 방해가 될세라 가볍게 인사만 하고 뒤에 섰다.

"팟사…… 아니, 카우 실장님. 이거요. 언제까지 돼요?"

"치수 수정만 하면 됩니다? 금방 되니까 기다리세요?"

팟사라곤은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고, 우진은 최 대표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최 대표가 모니터를 힐끔 보더니 우진에게 물었다.

"저분은 덩치가 굉장하네요……. 3D 작업 때문에 구하신 분인가 봐요."

"아니에요. 저희 홈페이지랑 이것저것 담당하시는 분인데 3D 작업도 하실 수 있으세요."

"대단하네요. 혹시 사용 못 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군요."

최 대표는 엄지까지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았을 때, 팟사라곤이 뒤를 돌았다.

"벌써 다 됐어요?"

"수정만 하는 거라 금방 해요? 한번 보세요?"

모니터 속에는 고객이 있었다. 마네킹 같은 형태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아예 고객을 모니터 속에 담아놨다. 우진이 만든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형태였다.

"와……."

"만족해요? 어느 부분 고쳐야 해요?"

"아! 잠시만요. 뒷모습 좀 보여주세요."

팟사라곤은 곧바로 뒷모습으로 넘겼고, 우진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봤다. 이대로라면 가봉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굉장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걸어볼까요?"

"그런 것도 돼요?"

"아직 덜 만지긴 했는데 간단히 걷는 거까지 돼요?"

팟사라곤의 말대로 화면 속 고객이 어두운 화면을 걷고 있었다. 아직은 움직임이 로봇 같았지만, 움직임에 따라 옷이 흔들리는 모습까지 확인 가능했다. 함께 보고 있던 최 대표도 신기한지 한참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걸로 뭐 하시려고……."

"고객들이 가봉하러 계속 숍에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요. 그걸 좀 줄여보려고요."

최 대표는 맞춤옷이라면 가봉하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고객을 좀 더 편하게 해주려고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가 생각하며 우진을 봤다.

그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우진을 보였고, 최 대표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매번 볼 때마다 옷에 대한 열정이 굉장하다고 느껴졌다.

"고객들에게도 이 화면을 넘겨주시면 엄청 좋아하겠네요. 배경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서."

"어? 좋은데요? 팟…… 카우 실장님, 그렇게 돼요?"

"저 6시 퇴근입니다?"

"알죠. 가능은 해요?"

"될 것 같긴 합니다?"

우진은 꽤 괜찮은 생각이라 느꼈다.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원래 용도가 따로 있으니 상관없었다. 팟사라곤에게 일을 맡긴 우진은 최 대표를 데리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응접실에 자리했다.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건 아니고요. 혹시 패션쇼에 대해 최 이사님한테 들은 적 있으세요?"

"아……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거 때문이군요."

최 대표는 최 이사 얘기가 나올 때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는 그런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 아버지하고 하신 약속은…… 없던 일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한 일에 대한 벌을 받고 계신 거니까요……."

이미 최 이사에게 언질을 받았던 최 대표가 먼저 거절했다.

"그리고 저희는 지금 선생님과 I.J분들 덕분에 너무 바빠서 패션쇼는 엄두도 못 냅니다. 아! 그리고 일본 고교 야구부들도 저희 제품을 사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일본 전체는 아닌데, 그래도 한국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많더라고요. 그것만 준비해도 정신없이 바쁠 것 같습니다."

우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얼굴로 최 대표 얘기만 들었다.

"저한테 이런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 관련된 일은…… 잊어주셨으면 합니다. 아! 아버지가 하신 잘못을 잊어달라는 건 아닙니다. 오해 없으셨으면……."

"오해 안 해요. 바쁘시다니 다행이네요."

"저희도 언젠가 저희만의 제품도 생기게 되면, 그때 정식으로 제안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우진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하하, 왜 선생님이 미안해하십니까. 그나저나 아까 그분에게 저희 직원들도 좀 배워야겠습니다. 하하."

"카우 실장님요?"

"네, 하하. 먼저 3D 작업을 실행한 저희는 고작 발 모양 정도 만드는데도 정신없었는데, I.J는 한발 더 나아가 사람까지 만들고. 살짝 부럽기까지 하네요. 아까 그거 보니까 좋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희 유니폼과 스파이크를 착용한 선수들이 야구 경기 하는 걸 영상으로 만들어 홍보용으로 쓰면 어떨까 하고요.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라도 해봐야겠습니다. 저희가 못하면 업체에라도 맡겨야겠군요. 하하, 모델비도 줄이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까 제 얼굴로 할 생각입니다."

우진은 피식 웃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최 대표의 말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야구 경기가 가능하다면 패션쇼도 가능할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되더라도 팟사라곤이 혼자 맡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작업만 빠르게 된다면 제프 우드와 헤슬에서 한 제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현재 우진의 사정상 개인 패션쇼는 조금 무리였다.

보통 쇼 시간은 30분 이상을 잡는다. 그래서 옷이 최소 100벌 이상은 필요한데, 우진이 현재 디자인한 옷을 모두 리스트에 넣어도 100벌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정규 쇼보다는 가상으로 만든 쇼가 더 적합할 것 같았다.

***

다음 날.

우진은 혼자 생각한 것을 정리해 I.J 식구들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가뜩이나 협회를 안 좋게 보던 사람들은 두말할 것 없이 모두 찬성했다. 다만 일을 해야 하는 팟사라곤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만든 옷들에다가? 앞으로 예약받을 고객들 옷들에다가? 대표님 작품에다가? 거기에 배경까지? 이건 혼자 못해요?"

"팟 실장! 말끝을 내리라고. 아 참, 그런데 이거 정말 많은데? 내가 봐도 혼자는 무리 같아 보이네."

"맞아요? 거기에 원래 입던 옷은 왜 작업해요?"

우진은 서류를 넘겨가며 설명을 이었다.

"전부 카우 씨한테 맡기려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돈 번 거 이참에 쓰려고요. 다른 건 하청 못 줘도 컴퓨터 그래픽은 업체에 의뢰할 수 있잖아요. 시간이 좀 빠듯하니까 스캐너도 좀 구매해서 한꺼번에 처리했으면 좋겠어요!"

우진은 이미 마음을 결정한 터라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런 우진을 처음 봤는지 다들 신기하게 지켜봤다.

"당당해져야죠."

"우리한테 말고 다른 사람한테 그러라고 말한 거거든? 그리고 가짜라고 해도 명색이 패션쇼인데 전문 연출가한테 맡겨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죠. 큰 틀만 생각한 거예요. 일단 주제는 변신이에요."

"무슨 트랜스포머도 아니고 변신이 뭐야?"

"컴퓨터로 하는 거니까 조금 특별해도 될 거 같아서요. 기존의 모습으로 걸어오다가 제 옷을 입을 모습으로 변하게 하는 거죠. 그럼 변신이라는 주제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고객분들의 원래 모습도 필요한 거고요. 아무튼 일단 매튜 씨는 연출하고 업체부터 알아봐 주시고요. 담당자는 카우 실장님! 참, 미국에 있는 사람도 초대 좀 해주세요. 바비 씨라고, 제 첫 모델이거든요. 그리고 유 실장님, 제가 이번에 촬영용으로 예전 원피스 그대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거 입고 촬영 한 번 더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문하셨던 고객들한테도 한 번씩 물어봐 주세요. 참! 그리고 제가 그동안 그려놓은 디자인으로도 옷을 만들 거예요. 아무래도 대상 없이 한 디자인이다 보니까 모델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것도 좀 부탁드려요."

"우진아, 의욕적인 건 알겠는데 정신없으니까 영어든 한국말이든 하나만 해라! 매튜나 영감님이나 전부 나한테 물어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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