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옷이 보여-133화 (133/231)

133화 바이에르 6

매튜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제작한다고 해도 판매하기도 쉽지 않은 환경이죠. 어제오늘 이곳에 있으면서 보니, 외지인이라고는 저희가 전부였습니다. 시장으로서는 0점짜리죠. 반호프 거리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유동 인구가 있는 시내로는 나가야 할 텐데, 스위스 물가로 반호프 거리에서도 가장 외곽이 8,000프랑 정도 합니다. 한국 돈으로 한 900만 원 할 겁니다. 어제 보셨던 제프 우드 건물은 3만 프랑입니다. 매장을 개점한다고 해도 팔린다는 보장이 없는데, 저분들도 모험이나 다름없습니다."

화를 내려던 아벨도 매튜의 이어진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전부 사실이었다. 가만히 듣던 우진도 역시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처음부터 매장 판매는 곤란해 보였다. 게다가 매장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이익을 봐야 했고, 그러려면 시계 가격을 비싸게 책정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계를 오랫동안 제작한 장인들이라고는 하나 유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데려가기도 애매했다. 만약 한국에 간다면 옆에서 의견을 나누기는 편하겠지만, 다들 간다는 보장이 없었다. 열한 명 모두를 데려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를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그때 누군가가 큰 소리를 내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아벨! 그 디자이너 선생 아직 있나!"

어제 봤었던 노인이 소리쳐 가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식사 중이던 우진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도미닉, 무슨 일이야?"

"하하, 디자이너 선생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찾아왔지."

우진이 가볍게 인사를 하자 도미닉이 씨익 웃더니 상자를 내밀었다. 딱 봐도 시계가 든 상자였다. 상자를 연 우진은 내심 놀라며 시계를 꺼내 들었다.

어제 그린 스케치를 참고해서 만든 것 같은 시계가 들어 있었다. 스케치는 직사각형 시계였는데, 노인이 만든 시계는 라운드형의 시계였다.

케이스 내부는 검은 바탕이었고, 거기에 넥타이 모양의 하얀 시계 침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진이 가만히 시계를 들여다보는 동안 도미닉이라는 노인은 마구 웃으며 뭐라고 말했고, 아벨이 씁쓸한 얼굴로 우진에게 전달했다.

"이 친구도 비슷한 말을 하네요…… 후."

우진 역시 난감했다. 스케치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하루 만에 시계를 만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외관상으로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루 만에 만드신 거예요?"

"안에 시계 침만 만들었고 그 외 다른 부품들은 만들 시간은 없어서 원래 가지고 있던 부품들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렇다고 해도 대단해 보였다. 부품만 있다면 하루 만에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관심이 갔다.

"그런데 수제 시계라면 부품도 전부 직접 만드시는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이 마을 전체에서 만들어지죠."

"그럼 부품까지 직접 만드시면 기간은 얼마나 걸려요?"

"그것도 하루면 되죠."

기계 설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루 만에 가능하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속이려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다만…… 지금은 조금 걸립니다."

"얼마나요?"

"꽤…… 걸립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바이에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계의 심장이 무브먼트인데, 무브먼트 부품을 만드시는 분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다른 데서 공수해 와야 하는데…… 사실 그게 쉽지 않거든요. 워낙 중요 부품에다 대량 주문도 아니고 소량으로 주문해야 하니. 이미 그 공장들도 대부분 거래하는 업체들이 있고요. 가격도 엄청 비싸게 부르고……. 그래서 저희 아버지가 만들고 있긴 한데, 막히는 부분이 많거든요. 그것만 해결하면 정말 하루 만에 만드실 수 있으세요."

"그럼 다른 부품은 전부 직접 작업하시는 거고요?"

"네! 조립까지 전부 각자 하세요. 각자 가게마다 가지고 있는 기계도 달라서, 돌아다니시면서 부품들을 직접 만드시거든요. 저희 할아버지 가게는 케이스를 만들 수 있어요. 저기 공방에 CNC하고 프레스도 있고, 시계 선반도 있거든요. 다른 건 다른 할아버지들 가게에 가서 만드시고요."

마을 전체가 하나의 공장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친분이 두터워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 같았다. 우진은 결과물을 보니 다른 스케치들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졌다.

"혹시 제가 스케치해 드린 그대로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열한 분 모두."

"무브먼트 부품을 구하려면 꽤 오래 걸릴 텐데……."

우진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구해야 하는 부품이란 것들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지 않은데…… 잠시만요."

바이에르는 종이와 펜을 가져오더니 가게 이름을 주욱 나열했다. 그러고는 각 가게의 이름마다 필요한 부품들을 적어나갔다. 뭘 보며 적는 것도 아닌데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이것들이거든요. 좀 많죠?"

"이걸 다 알고 계신 거예요?"

"제가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다들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부탁하시거든요, 하하."

우진은 피식 웃던 웃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바이에르를 가만히 살폈다. 왠지 유니폼이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다음 날. 바이에르는 장갑을 낀 채 박스 안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우진은 가게 밖에서 그 모습을 보며 통화 중이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괜히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허허, 아닙니다. 그나저나 한국에 언제 오십니까?

"조만간 갈 거 같아요."

-그럼 자세한 얘기는 그때 뵙고 하죠. 허허.

어제 얘기를 듣고, 우진은 데이비드에게 연락했다. 데이비드는 어렵지 않게 부품을 구해주겠다고 했고, Ciel을 통해 하루 만에 부품을 보냈다.

우진은 왠지 빚을 지는 것 같아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래도 I.J 식구를 늘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통화를 마친 뒤 가게로 들어가자 바이에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세요! 어떻게 하루 만에 다 구해요? 최소 몇 주는 걸릴 건데!"

그가 Ciel을 달가워하지 않는 걸 아는 우진은 대답 대신 웃어넘겼다.

"어어! 만지시면 안 돼요! 이게 티타늄 합금이긴 해도 얇아서 잘못하면 구겨질 수 있거든요."

부품들을 만져보려던 우진은 웃으며 손을 물렸다. 바이에르는 그저 부품이 생겼다는 것이 기쁜지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부품을 가게별로 정리했다.

"잠시 계세요. 아! 공방 구경하실래요?"

바이에르는 우진을 마당 옆에 붙은 공방으로 안내한 뒤 나갔다. 공방에는 주인인 아벨 대신 또 다른 노인 두 사람이 작업 중이었다.

"오, 디자이너 선생. 뭐 이런 곳까지 왔나?"

"그냥 구경 왔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작업하세요."

노인들은 우진을 힐끔 보더니 작업을 이어나갔다. 서울에 있는 성훈의 작업실에도 자주 들렀기에 기계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익숙했다.

우진은 구석에 앉아 노인들을 봤다. 작업복을 입은 노인들은 작업이 익숙한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작업에 열중했다.

무브먼트의 덮개를 만든다고 들었는데, 만드는 시간보다 확인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덮개 부분마다 두께도 재고, 수평도 확인하고. 대부분이 검사하는 시간이었다. 이후에도 끝없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노인들은 계속 우진을 힐끔거렸다. 우진은 아무래도 노인들이 자신을 신경 쓰는 것 같아, 자리를 피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마당을 나와 바이에르를 기다릴 때, 다른 가게에서 작업하고 온 아벨이 들어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마을에 있던 I.J 식구들을 만났는지 전부 데리고 왔다.

"오! 마침 여기 있었군요. 하하, 식사하셔야죠!"

I.J 식구들의 어색한 얼굴을 보니 아벨이 반강제로 끌고 온 것 같았다. 매번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나가서 먹으려 했던 우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게 문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콰앙!

"바이에르! 천천히 다녀야지!"

"아! 큰일 났어요."

"왜, 무슨 일이야!"

"파비오 할아버지한테 부품을 드렸는데 떨어뜨리셨어요. 게다가 찾다가 밟으셨어요……. 제가 보관함에 넣는 것까지 해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우진이 스케치한 것들 중에서도 꽤 예쁜 디자인이었기에 내심 기대하고 있던 시계였다. 50원짜리 동전 3개의 케이스로 된 시계였다.

"그래서 뭐가 찌그러진 건데?"

"레버 스프링하고, 밸런스 휠하고…… 이스케이프먼트요……."

바이에르는 찌그러진 부품을 가져왔다. 부품을 공수해 준 우진에게 미안했는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우진은 또다시 데이비드에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했다.

갑자기 이상해진 분위기에 밥을 먹으러 왔던 I.J 직원들은 조용히 속삭였다.

"밥 얻어먹을 분위기가 아닌 거 같은데……. 세운 형님, 갑자기 왜 저래요?"

"잘 모르겠어. 얼핏 들어보니 시계 부품이 고장 났다는 거 같은데?"

"그래요? 대체 뭐가 고장 났길래."

성훈은 고개를 내밀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대화를 엿들었다.

"뭐야, 이스케이프먼트 같은데? 저거 단단한 거로 만들어서 웬만하면 안 찌그러질 텐데. 밟았나?"

혼자 중얼거리는 성훈의 말소리가 우진의 귀에 들렸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훈을 바라봤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성훈은 그새 일행과 식사에 대해 말했다.

"우진아, 나가서 밥 먹어야겠지?"

"삼촌."

"응?"

"잠시만요. 이리 와보세요."

우진은 성훈을 데리고 와서 바이에르의 손에 올라가 있는 부품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성훈에게 내밀었다.

"삼촌, 이거 만드실 수 있으세요?"

"만들 수야 있지."

"그럼 만들어주세요!"

"여기서? 여기선 안 돼. 기계들이 전부 한국에 있는데. 선반은 하도 안 써서 창고에 박혀 있어."

성훈이 예전에 시계 부품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생각나 혹시 싶어 물어보니, 가능하다고 했다. 뭔가 하나씩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바이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왜……."

바이에르는 우진이 갑자기 뺏어 들다시피 부품을 들고 나가 버리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다 우진의 일행 중 성훈이라는 사람이 부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혹시 이거 만드실 수 있으시대요? 이거 만들기 어려운 건데?"

"아, 만들 수는 있는데 기계들이 서울에 있어서 지금은 힘들다네요."

"기계요? 어떤 기계 말씀하시는지……. 시계 종합 선반은 있는데,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진이 그 얘기 그대로 성훈에게 전하자 성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진이 전달하기도 전에 눈치로 알아챈 바이에르는 활짝 웃었다.

"있어요! 돌아가신 분이 기증하고 가신 거 있어요! 오래되긴 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

안내받은 곳은 바이에르의 아버지가 있는 곳이었다. 성훈은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더니 혼자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설계도까지 받아 들더니 컴퓨터 화면과 설계도를 비교했다.

"이거 전부 손으로 깎은 게 아니네. 머시닝센터로 크게 깎은 다음에 톱니 모양만 손으로 깎았네. 그런데 이거 누가 적었대? 완전 엉성해. 코드 순서가 엉망이라 중간에 멈출 텐데."

우진이 바이에르에게 그대로 전하자 바이에르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거 바이에르 씨가 혼자 해본 거래요."

"배웠대? G코드 넣는 게 너무 뒤죽박죽인데."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책 보고 했대요."

"헐. 뭐 간단한 건 가능해도 이건 힘들 텐데?"

성훈은 성훈 나름대로 놀랐는지 바이에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는 손수 틀린 부분을 고치더니 기계를 정비했다. 그러자 걱정이 되는지 바이에르가 우진에게 속삭였고, 우진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오래된 기계라는데 괜찮을까요?"

"이게? 내 거보다…… 좋은데……. 그나저나 이 다이아 공구는 하나 가져가고 싶다. 하하."

숍에 있는 기계가 더 오래됐다는 말에 우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성훈은 시범 가동까지 해본 뒤에야 재료를 기계 안에 넣더니 문을 닫고선 버튼을 눌렀다.

"8분 정도 걸릴 거야."

기계가 저절로 공구 등을 교체해 가며 작업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성훈이 말한 시간이 지나자 작업이 끝났다. 성훈은 기계 문을 열더니 고정시켰던 재료를 빼고 바이에르에게 내밀었다.

"커팅하고 마감 처리는 할 수 있죠?"

그러자 바이에르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새 함께 구경 온 노인들도 성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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