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델핀 3
오마르도 델핀에게 I.J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웬만하면 꼭 해. 그 사람한테 간 김에 옷도 더 맞추고. 비싸더라도 그거 입고 TV에도 나오면 좋을 거다. 하하.”
돌핀이 환하게 웃을 때 지켜보던 아벨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영화에서 역할이 뭐야?”
“내가 말했잖아! 사진에서 항상 정장 입고 있었다니까! 사장, 그런 거야!”
“하하…….”
마흔 넘은 자식을 자랑하는 오마르의 말에 델핀은 약간 난감해하며 입을 열었다.
“악당이에요.”
“악당? 무슨 악당? 악당도 종류가 많잖아. 살인자 그런 거?”
“살인도 하고…… 뭐…… 그래요. 하하…… 하. 그래도 악당 대장이긴 해요.”
“하긴 나이가 있는데 쫄따구를 하는 것도 웃기지.”
그러자 약간 당황하던 오마르도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어딜 가더라도 대장 하는 거 봤지? 내 아들이다. 하하하.”
델핀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진작 올걸 하는 생각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휴대폰에 우진의 전화번호를 띄워놓은 채.
***
며칠 뒤, 델핀은 서둘러 한국에 입국했다.
해외 무대 인사 일정이 얼마 뒤에 잡혀 있었다. 티저 영상이 풀렸기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했음에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I.J에서 픽업을 나온다고 했지만, 옷을 협찬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웠기에 주소만 받아왔다. 공항을 나와 택시에 올라탄 델핀은 기사에게 주소를 건넸다.
해가 질 무렵이라 자연과 어우러진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I.J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린 델핀은 거리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번씩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명품 브랜드들이 보였다. 그런 브랜드들이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델핀은 명품을 구매해 본 적이 없어 약간 위축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거기에다 건물들 중 자신이 들어갈 건물이 유독 넓어 보였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2층으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델핀은 마음을 가다듬고선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착하자 커다란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러자 로비에 있던 사람이 다가왔다.
“아직 오픈 전인데, 어떻게 오셨어요?”
“오마르 씨 아들입니다…….”
“오마르 씨가…… 아! 혹시 델핀 씨? 델핀 씨 맞으세요?”
“네? 네. 제가 델핀입니다.”
“죄송합니다. 오마르 씨라고 해서 못 알아봤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델핀은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 때문에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소파로 자신을 안내하더니 카운터로 가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몇 사람이 내렸다.
델핀은 한국에 오기 전, I.J에 대해 검색을 좀 했다. 그래서 이상한 안경을 쓰고 있지만, 가운데 가장 젊어 보이는 사람이 우진이라는 것을 알았다. 상대방도 자신을 알아봤는지 웃으며 다가왔다.
“델핀 씨, 안녕하세요. 전 I.J의 디자이너 임우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쪽은 같이 일하는 분들이세요.”
우진은 함께 따라 나온 세운과 매튜, 미자까지 소개했다. 그러고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자신을 뚫어지게 살폈다.
델핀은 괜히 긴장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긴장감이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제가 조금 이상하죠? 그냥 혼자 입고 다니다 보니까.”
“아, 아니에요. 괜찮으신데요? 스타일리스트가 없다고 들었는데, 역시 배우라 그런지 옷을 잘 입으시네요.”
“하하, 아닙니다.”
그러고는 또 말없이 자신을 한참이나 살폈다.
“아, 죄송해요. 제가 고민 중인 게 있어서, 그거 때문에요.”
우진은 갑자기 사과를 하더니,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발을 보며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는 둘이 뭔가 합의를 봤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제가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저희 제안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감사하긴요! 제가 감사드려야죠. 아버지 덕분에 이런 곳에서 협찬도 받고. 감사드립니다.”
“네? 오마르 씨요?”
“아, 네. 얘기 다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부탁하신 거 때문에 저한테 신경 써주셨다는 거.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우진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몰라, 무슨 말인지 아냐는 얼굴로 세운을 쳐다봤다. 하지만, 세운이 알 리가 없었다.
“아…… 네. 뭐…… 그런데 맡은 역할이 청부 살인자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정확히는 청부 살인을 받는 업체의 대표죠. 제 인상이 조금 날카로워 보여서. 하하.”
우진도 처음 역할을 듣고 내심 고민했다. 하지만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영화사에서 싫어하겠지만, 극 중 역할과 다르게 보이면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자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단 저희 옷부터 보여 드릴게요.”
미자가 들고 온 박스를 우진에게 건넸다. 그러자 우진이 박스를 열고는 옷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프 셔츠하고 데님바지예요.”
“와, 멋지네요. 입어볼까요?”
“멋지다고 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이 옷이 이번에 아제슬 이름으로 출시할 옷이에요. 그런데 이건 치수가 안 맞으실 거예요. 그럼 오늘은 치수부터 잴게요. 괜찮으세요?”
“물론이죠.”
대답과 동시에 우진이 2층을 봤다. 그러자 2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부리나케 내려왔다.
“치수 좀 재주세요.”
델핀은 굉장히 깔끔한 정장을 입은 여섯 명이 자신에게 달라붙자 당황했다. 이런 걸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테일러들의 행동은 굉장히 정중했다. 델핀은 그제야 안심을 하고는 여섯 명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맞춤옷을 맞춰본 적이 없어 그저 멍한 얼굴로 자세를 바꿨다.
치수를 재는 일이 끝나자 여섯 명이 또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리고 우진이 입을 열었다.
“상, 하의 총 3벌씩 드릴 거예요. 세탁은 그냥 세탁기로 돌리셔도 돼요. 아, 찬물로만 빠셔야 하고요.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여기 이 줄이 실이거든요. 입다 보면 실밥이 튀어나올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럼 절대로 라이터로 지지지 마세요. 근처 실까지 녹아버려요. 가위나 칼로 톡 자르시면 돼요.”
“네? 아, 네…….”
“그런데 신발이 문제네요. 저희가 이번에 함께 내놓는 신발이 샌들이거든요. 봄, 여름을 겨냥해서 내놓는 제품이라서. 그런데 무대 인사 일정을 보니 다른 곳은 몰라도 뉴욕, 한국, 일본은 샌들을 신기엔 아직 추울 거 같더라고요. 독일은 샌들을 신어도 괜찮을 거 같은 날씨였고요. 추워서 안 되겠다 싶으면 무리하지 마시고요. 싱가폴, 독일, 호주에서 무대 인사할 때만 입어주세요. 다른 나라는 좀 따뜻하다 싶으면 부탁드려요.”
델핀은 고개를 끄덕거리다 말고 흠칫 놀랐다. 아버지 때문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일정을 미리 알아보고 날씨까지 고려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또한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잠시만요.”
델핀이 만족한 얼굴을 하자 우진은 가볍게 웃고는 단안경에 손을 올렸다. 아무리 무대 인사를 다닌다고 해도 같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I.J 식구들과 회의 끝에 맞춤옷을 한 벌 더 제작하기로 했다.
우진은 델핀이 멋져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단안경을 들어 올렸다.
“오…….”
델핀은 갑자기 자신을 보며 감탄사를 보내는 우진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우진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 보시겠어요?”
“네? 아, 네.”
“뒤로 한 번만 돌아보세요.”
우진은 왼쪽 눈으로 비친 델핀의 모습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진한 파란색 재킷과 풀어 헤친 하얀 와이셔츠. 넥타이 대신 재킷 주머니에 포켓스퀘어를 꽂고 있었다. 감색의 바지는 두꺼운 면인 듯 보였다. 치노 팬츠였지만 허리에 주름이 없어 슬림해 보였다. 몸매 관리를 한 걸로 보이는 델핀과 맞아떨어졌다.
거기에 카키색 구두를 신고, 머리까지 뒤로 넘겨 3자 모양이 보이는 이마가 굉장히 멋들어졌다. 덧붙여 선글라스와 정리된 수염까지. 전체적으로 보면 정돈한 듯하면서 무심한 느낌이었다.
우진은 델핀이 입은 옷의 조합이 흥미로웠다. 거칠어 보이면서도 거칠지 않은 분위기가 묘했다.
오랜만에 보는 특별함에 우진은 한참 델핀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이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가 떠올랐다.
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저렇게 입혀놓으면 누가 봐도 배우라고 할 것 같았다. 거기에다 추운 날씨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다른 옷을 만들려면 스케치가 필요하거든요.”
“아, 네. 시간 많습니다. 하하.”
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식이 스케치북과 태블릿 PC를 가져왔다. 우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선 펜을 잡았다.
***
델핀은 옷이 완성되려면 며칠 걸린다는 말에, 기다리는 동안 한국을 여행했다. Y튜브나 영화 사이트에 ‘Judge4’ 티저 영상이 꽤 많이 올라왔지만, 여전히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덕분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도 서울을 벗어나진 않았다. 우진이 가봉을 이유로 부르기도 했고, 서울의 관광지도 다 구경하지 못했으니까.
찰칵-
델핀은 이동하면서도 휴대폰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그동안 맡았던 배역이 전부 단역이라 SNS에 팬은 없었지만, 이번 영화로 팬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리미리 사진을 업로드할 계획이었다.
남산에서 찍은 사진, 전쟁 기념관에 방문한 사진, 경복궁 및 각 종교로 유명한 조계사와 명동성당까지 방문했다. 여행하느라 옷을 기다리는 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가봉하고 딱 일주일이 지났을 때, 우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스케치를 처음 봤을 땐, 멋있어 보이긴 해도 자신이 평소에 입던 스타일이 아니라 내심 걱정했다. 하지만 가봉할 때 보니 미완성임에도 멋있다고 느껴졌다.
어느새 택시가 I.J 앞에 멈췄다. 밤과는 또 다른 분위기에 델핀은 주변을 살펴보고는 I.J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리고 저번에 봤던 매니저가 다가왔다.
“일찍 오셨네요! 선생님은 2층에 계세요. 잠시만 계세요.”
잠시 뒤, 우진과 함께 테일러 여섯 명이 상자들을 들고 따라 내려왔다. 그러고는 다들 곧바로 탈의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우진도 델핀에게 인사를 건네고 탈의실 앞에서 테일러들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일단 이 셔츠와 바지 먼저 입어보세요. 탈의실에 준비해 놨으니까 신발까지 신고 나오시면 돼요.”
델핀은 고개를 끄덕이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탈의실에는 줄무늬 셔츠와 검은색 바지가 걸려 있었고, 구두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깔끔한 스타일이라 델핀도 부담 없이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은 델핀은 밖으로 나와 거울로 된 벽 앞에 섰다. 그러자 우진이 달라붙어 옷매무새를 고쳐주더니 뭔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울을 유심히 쳐다봤다.
자신이 보기에는 굉장히 멋있기만 한데,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궁금했다.
그때, 한참을 쳐다보던 우진이 입을 열었다.
“델핀 씨, 혹시 다른 영화도 촬영하세요?”
“네? 아, 하하. 오디션 테이프는 보냈는데 아직 연락은 없네요.”
“그럼 머리를 조금 잘라도 될까요?”
“머리요? 여기서요?”
“네, 그때 스케치에서 보셨던 것처럼 이마가 보이도록 완전히 넘겼으면 좋겠어요. 숍에 헤어디자이너분이 계시거든요. 괜찮으면 저를 따라오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