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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옷이 보여-158화 (158/231)

158화 노부부 1

한 달 뒤. I.J 전 직원이 매장 앞에 나와 고객을 배웅했다.

“감사합니다!”

“잘 입을게요.”

고객은 대우받는 느낌을 만끽하는 얼굴로 손까지 흔들었다. 고객이 사라지자마자 I.J 식구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누구 하나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와! 끝이다!”

“이제 드디어 잠 좀 제대로 자겠다. 으아…….”

우진은 테일러들의 환호에 피식 웃었다. 모든 일정을 마칠 때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랜 기간이 걸렸다. 간간히 생기는 예약 취소부터 시계 배송 지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직원들의 말대로 오늘로써 드디어 아제슬이 끝났다.

“다들 피곤하실 테니까, 오늘은 이만 퇴근하시고 월요일에 봬요.”

“아닙니다! 선생님이 남아 계시는데……. 그리고 이제 고작 1시인데요.”

“괜찮아요. 저도 이따가 가려고요. 다른 분들도 퇴근하세요.”

다들 그동안 힘들었던 탓인지 싫다는 말은 못 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눈치들은. 우리가 가야 우리 임 선생이 자기 기사를 마음껏 볼 거 아니냐, 껄껄.”

장 노인은 농담을 하며 직원들을 데리고 들어가더니 퇴근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그런데도 직원들이 계속 머뭇거리며 우진의 옆에 남아 있으려고 하자, 장 노인은 혀를 차며 억지로 모두를 데려갔다.

직원들이 가는 모습까지 다 보고 나서야 우진은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러자 아직 남아 있던 세운이 의자에 털썩 앉더니 입을 열었다.

“또 반응 보려고?”

“하하, 아니에요. 그냥요.”

“아니기는. 그런데 헤슬은 왜 또 갑자기 하자는 거야?”

우진은 며칠 전 아제슬 운영팀과 회의를 하면서 나온 얘기를 떠올리며 웃었다.

이번 아제슬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얻은 브랜드는 다름 아닌 제프 우드였다.

제프란.

이름 좀 있다 하는 브랜드들이 제프란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지기 어려웠지만, 제프란의 실을 사용하는 기술을 자랑할 수 있으니 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명품 브랜드 말고도 자수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주문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제프 우드는 이번 아제슬 기획을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했다.

그와 반대로 헤슬은 옷을 판매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평가도 셋 중 꼴찌를 한 데다가, I.J에서 판매하는 시계로 인해 오히려 인지도만 내려갔다.

‘I.J Watch’가 품질이 좋은 데다가 저렴하기까지 하니, Ciel은 아무것도 안 했음에도 비교 대상이 되었다. Ciel이 자회사는 아니지만 헤슬의 협력 업체였기에, 당연히 헤슬도 타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I.J처럼 시계를 할인해서 팔 수도 없었다. 들어가는 자재 자체에서 차이가 났다. I.J의 시계는 보석이 없거나 있다 해도 모형 보석인데, Ciel 시계는 진품이었다.

다이아부터 루비 등 보석만으로도 가격이 상당했다. 그러다 보니 I.J와 같은 반값 할인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헤슬은 아제슬 기획을 다시 내놓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취할 것은 다 취한 제프 우드는 시큰둥했고, 우진도 그 제안이 끌리지 않았다.

후에 다시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I.J 식구들 모두가 상당히 지친 상태였고, 무엇보다 예약을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이 우선이었다.

우진이 매장에 남은 이유도 고객들 때문이었다. 직원들이 월요일에 출근하면 다시 회의를 해봐야겠지만, 그 전에 직원이 늘어난 만큼 예약을 얼마나 더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그때,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던 세운이 대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우진아, 매튜가 땅을 보러 다니던데. 우리 이사 갈 곳을 알아본다고. 여기 계속 못 쓰나?”

“아마 힘들 거예요.”

“아쉽다. 여기 엄청 넓고 좋은데. 또 내 건물로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그러긴 힘들 거 같아요. 사람도 많아졌고, 그리고 피혁 가게 아저씨도 들어와 계시잖아요.”

“하긴, 너무 좁지. 그런데 넌 걱정도 안 돼? 또 이사 가려면 돈 엄청 깨질 텐데. 왜 그렇게 태연해?”

“하하, 걱정 안 해도 돼요. 매튜 씨하고 얘기를 해봤는데, 건물을 아예 매매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야! 좀 서운하네!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줘!”

“하하,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 매튜 씨하고 가볍게 오간 얘기예요.”

세운은 코를 찡긋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돈도 만만치 않을 텐데. 솔직히 우리 이번에 번 것도 그렇게 많지 않잖아.”

“많아요. 패턴 특허 사용료도 들어올 거고, 10월에 포지션에서도 돈이 들어와요.”

“아! 맞다! 얼마나?”

“아제슬에서 오는 돈은 저희 라이선싱까지 합해서 한 16억 예상하던데요? 물론 아직 운영팀에서 정리 중이라 확실치는 않아요. 포지션에서는 좀 더 들어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와…… 장난 아니다! 우진이 너! 시골 내려가서 빌딩 사도 되겠다. 와! 대박! 야, 나 소름 돋았다.”

“시골이요? 하하.”

아직 손에 없는 돈인지라 우진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 얘기처럼 느껴졌다. 세운은 놀랐는지 턱을 괴고는 연신 헛웃음을 뱉었고, 우진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향후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한참을 생각하던 세운이 입을 열었다.

“우진아! 그럼 우리 돈 좀 쓰자!”

“네?”

“야야! 뭐야! 왜 그렇게 봐! 그냥 막 쓰자는 게 아니라, 우리 차 좀 사자고! 내 트럭만 돌려가면서 쓰고 있잖아. 그나마 준식이 차를 타고 다니긴 하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한 대 사자.”

그동안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을 뿐, 우진도 전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월요일에 얘기해 봐야겠어요.”

“기왕이면 트럭 말고! 너 또 예약받기 시작하면 사람들 만나러 다닐 거잖아. 또 트럭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욕한다. 돈 벌어서 뭐 하냐고.”

우진은 피식 웃었다. 운전면허도 없는 데다 트럭이 익숙해지자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트럭에서 내릴 때마다 흠칫 놀라던 고객들이 생각난 우진은 세운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수요일 아침.

주변 매장들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I.J 앞에 전 직원이 모였다. 월요일에 있었던 회의에서 차를 구입하자는 결정이 났고, 이틀 만에 차가 도착했다.

매장 앞에 세워둔 차를 보는 직원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그러다 보다 못한 세운이 우진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왜 또 스타렉스야! 저번이랑 똑같네!”

“완전 다르잖아요. 저번에는 금색이었는데. 이번엔 검정색이에요. 크기도 엄청 크고요. 매튜 씨가 신경 써서 고른 거예요.”

“퍽이나! 유 실장은…… 어차피 우진이 편일 거고, 홍단아, 넌 어떻게 생각해?”

“제가 보기에는…… 멋있는데요? 연예인이 타는 차 같아요.”

우진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활짝 웃었다. 차에 대해서 별 관심 없는 우진이 봐도 확실히 저번보다는 좋은 차였다.

그랜드 스타렉스 리무진.

홍단아의 말처럼 연예인이 타고 다니는 밴과 비슷해 보였다. 창문에 선팅까지 되어 있어서 밴 같은 분위기를 더했다.

우진이 차에 빠져 있는 사이 세운이 매튜에게 다가갔다.

“매튜, 왜 저 차를 골랐어?”

“가지고 다녀야 할 게 많다고 큰 차를 원하셨습니다.”

“아니, 좋은 차 많잖아. 우리 우진이 어깨에 힘 좀 빡 들어가는 그런 차!”

“어차피 운전은 선생님이 안 하실 텐데요? 그런 차는 나중에 직접 운전하시게 되면 그때 구매하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이건 어차피 회사 차로 쓸 예정입니다.”

세운이 자신이 좀 더 빛났으면 하는 생각으로 투덜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진은 그냥 웃어넘겼다.

“저는 정말 마음에 들어요.”

“휴…… 뭐. 그럼 됐고…….”

“일단 고객을 만나러 가면서 승차감이 어떤지 봐야겠어요. 삼촌도 빨리 타세요. 카우 씨도 준비 다 됐어요?”

우진의 질문에 팟사라곤이 장비를 들어 올렸고, 세운은 입맛을 다시고는 운전석에 자리했다.

“저 앞에 탑니다?”

“편한 데 타세요. 순태 씨도 가요.”

테일러인 순태까지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밖에 있던 장 노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고 안 나게 조심히 다녀오너라. 자네들도 오래 기다렸던 고객들이니만큼 각별히 신경 쓰게나.”

I.J는 화요일부터 예약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 고객을 많이 받고 싶었지만, 고민한 결과 예약 고객 수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열 명으로 정해졌다. 아제슬을 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한꺼번에 많은 예약을 받아버리면 그만큼 뒤에 있던 사람들이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예 예약을 못 했다면 모를까, 예약을 한 이상 계속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진은 아제슬 때처럼 쫓기고 싶지 않았다.

예약받은 열 명의 고객들.

그중 첫 번째 고객을 만나기 위해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여기 예전에 와본 거 같은데…… 아! 여기 일방통행 거지 같은 동네! 예전에 우진이 너 부모님하고 살 때 여기 지나쳐 왔었어.”

“그래요? 저도 거기 얼마 안 있어서 지리는 잘 몰라요.”

“아무튼. 맞는 거 같아. 내비가 꼬인 길로 안내하는 거 보니까.”

잠시 뒤 내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왔다. 상가들이 가득한 거리였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상가 안쪽 주택가였다. 차에 내려서 보니 눈에 보이는 광경이 약간 독특했다. 골목을 끼고 있는데, 거의 집 한 채 정도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내비가 안내해 준 집의 마당 같은 느낌이었다.

그 마당에 차를 세우고, 우진은 곧바로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고객에게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답을 받았다.

“금방 나온다고 했으니까 일단 내려서 기다리죠.”

“그래, 그런데 여긴 뭐야? 바로 저 앞 사거리는 정신없던데, 여긴 또 한적하네.”

골목 주택가들 사이에 바와 커피숍도 보였고, 몇 걸음만 나가면 상가였다. 세운의 말대로 조금 전에 지나쳐 온 사거리에 비하면 너무 한산했다.

“신기하네.”

“일단 짐이나 내리죠.”

다 같이 짐을 내리던 중 밖을 살피던 순태가 입을 열었다.

“저기 상가들, 목동 로데오였네요.”

“여기가 목동 로데오였어요?”

“아세요?”

“그럼요. 예전에 상설할인매장이 많던 곳 아닌가요?”

“해외파인데도 잘 아시네요!”

“그럼요. 고등학교까지 전부 한국에서 다녔는데.”

우진은 순태의 표정에서 지금까지 그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아마 자신을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인 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만큼 테일러들과 일적인 대화 말고는 개인적인 대화가 없었다.

우진은 머쓱하게 웃고는 거리를 살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보이는 건물은 비기 전에는 스포츠 브랜드가 있었는지 간판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요즘 이사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지라, 우진은 주변 건물들을 관심 있게 살폈다.

지금 I.J 매장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저 정도 크기라면 적당해 보였다.

사실 우진은 어디에 매장을 오픈해도 크게 상관없었다. 맞춤옷인 데다 고객들이 줄까지 서서 예약하는데 위치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장 노인이나 매튜는 매장만으로도 계속해서 광고가 되는 곳, 즉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자리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인천공항으로 오는 시계나 원단의 유통 문제와, 매장으로 찾아오는 고객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먼 지방은 제외했다. 세운의 건물처럼 도매상이 밀집한 곳이 아닌 곳도 고려했다.

매튜나 장 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진은 근처 상가들을 보며 이곳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우진이 돌아가서 의논해 볼 생각으로 거리를 살필 때, 세운이 투덜거렸다.

“우리 기다린 지 5분도 넘은 거 같은데? 순태 씨, 전화 한번 해봐.”

그때, 앞에 보이는 빌딩 옆에서 우진의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나왔다.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에 팟사라곤만큼 큰 키, 그리고 새파란 눈동자까지. 우진은 단번에 그가 혼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안녕하세요. 윤종익 씨세요?”

“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할머니 옷 좀 갈아입혀 드리느라고요. 일단 들어오시겠어요?”

어떤 옷을 입혀놔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남자의 모습에 욕심이 났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다.

사실 다시 예약 신청을 받기 시작할 때, 우진은 신청한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약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만 예약을 받는 I.J의 특성상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점을 고려한 우진은 예약은 전과 동일하게 오로지 선착순으로만 받기로 했다.

윤종익이 할머니 대신 예약했다는 걸 사전에 들은 우진은 그가 늦은 이유를 이해하고선 따라 들어갔다.

울타리도 없는 마당을 지나쳐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 바닥에 앉아 있는 노부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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