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토트백 1
할머니를 보던 I. J 식구들을 비롯해 노부부의 가족들까지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진짜 잘 나왔네요. 이건 어르신들 대상으로 팔아도… 왜 그러세요?”
“아, 아니에요.”
주변에 사람이 많다 보니 한 번에 눈에 들어와서 속이 좋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진은 속을 가다듬고는 할머니를 살폈다. 순태가 말한 것처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완성도가 상당히 높아 우진 스스로도 만족했다. 그럼에도 왼쪽 눈으로 본 할머니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우진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그저 할머니의 모습만 살폈다.
그리고 그때, 기다리던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노부부는 말없이 손을 잡고는 서로를 확인하려는 듯 거울 앞에 섰다.
“참 고와.”
“영감님도요.”
“그러니까 아프지 말라고… 이렇게 고운 옷 입고 사돈 만나야 할 거 아닌가.”
그 모습을 보던 우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 할아버지와 함께 있자 할머니에게서도 빛이 보였다.
둘이 있을 때 완성되는 옷. 할아버지의 옷과 주변 테일러들에게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모든 것을 조합한 건 자신이었다. 스스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옷이라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
분명 뿌듯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노부부가 자신이 만든 옷을 오래오래 입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 * *
일주일 뒤. 또 다른 고객을 만나고 돌아와 작업실에 자리한 우진은 테일러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너무 한가해 우진의 눈치를 보던 테일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없이 바쁘게 작업 중이었다. 고객을 만난 자리에서 바로 디자인이 나오는데 안 바쁠 수가 없었다.
I. J 명성에 누를 끼칠까 봐 열심히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매번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면서 저절로 공부까지 되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님, 어깨솔기선… 이게 맞는지 봐주셨음 하는데…….”
“맞아요. 오프 숄더는 아니면서 느낌만 주려는 거라서요. 잘하셨네요.”
칭찬을 한 우진의 얼굴엔 미소가 걸렸다. 모두 열심이었다. 지금은 아직까진 자신보다 못한 게 보이지만, 실력이 느는 걸 직접 보니 우진에게도 자극이 됐다.
그때, 계단으로 준식이 내려왔다. 우진은 가끔씩 스케줄을 바꾸는 고객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러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어떤 분이 날짜 바꾸셨어요?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처음에 가셨던 목동 고객분이 전화 주셨는데요.”
“아! 어르신들이요. 왜요? 옷에 문제는 없을 건데.”
며칠 전 할아버지가 가족들끼리 찍은 사진을 보냈었다. 그때만 해도 별문제가 없었기에 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식사 초대를 하셔서 선생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식사 초대요?”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언제요?”
“내일이라고 그러셨습니다.”
간혹 I. J를 이용했던 고객들 중 완성된 옷을 받고 식사를 요청한 사람은 있었지만, 노부부처럼 시간이 지나서 초대한 고객은 없었다. 그동안은 고객과 하는 식사 자리가 편하지 않았기에 거절했었는데, 노부부의 초대는 고민되었다. 아무래도 할머니에게 시간이 얼마 없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우진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저장해 놓은 노부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저 I. J 디자이너예요.”
-아, 디자이너 선생님!
“아까 전화 주셨다고 들었어요. 할머님은 건강하시죠?”
-그럼요. 아들 녀석들이 왔다 가더니 기운이 좀 나나 봅니다. 그럴 게 아니라 내일 저녁에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정말 고마워서 그럽니다.
“아니에요. 어르신은 돈을 지불하셨고, 저는 거기에 맞춰서 일을 한 건데요.”
-아이고,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딱딱하게 삽니까. 정말 디자이너 선생님 덕분에 할멈이나 저나 체면이 섰습니다. 사돈양반들이 I. J를 알고 있더라고요. 돈이 아무리 있어도 못 구하는 옷이라면서.
우진도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가볍게 웃었다.
* * *
다음 날. 목동 노부부의 집에 자리한 우진은 배가 터질 정도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집 밥인 이유도 있었지만, 매튜 덕분이기도 했다. 다들 바빠서 매튜와 둘만 왔는데 차린 음식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게다가 불고기 말고는 입이 짧은 매튜였기에 우진은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과식할 수밖에 없었다.
“잘 드셔서 보기 좋네요. 그런데 그 안경은 평소에도 끼고 있으신 건가요?”
“네, 하하. 익숙해서 빼면 이상해요. 휴, 정말 맛있었어요.”
우진은 그저 자신만 보고 있는 시선이 민망해 노부부가 관심을 가질 만한 자식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드님들은 다 가신 거예요?”
“그럼요. 각자 일이 있으니까 가야죠.”
“그러시구나. 그럼 여기에 계시기 적적하시겠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만간 다시 내려갈 예정이라서 가기 전에 꼭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초대한 겁니다.”
우진은 뒤에 설명이 없음에도 요양원에 돌아간다는 뜻이란 걸 이해했다. 고민은 했지만, 초대에 응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건강해지시면 올라오셔서 연락하세요.”
“하하, 아예 내려갈 생각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 할멈 고향에 집도 완성되니까 앞으로 공기 좋은 곳에서 살아야지요.”
“아, 완전 이사 가시는 거예요?”
“그러려고 하지요. 집도 내려가기 전에 내놓고 내려갈 생각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중에 내려가게 되면 찾아갈게요.”
우진은 외할아버지처럼 할머니가 금방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거하게 대접을 받은 우진은 노부부의 배웅까지 받으며 집에서 나왔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자 우진은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답답하셨죠?”
“아닙니다. 보기 좋더군요.”
“그렇죠? 두 분 참 보기 좋은 거 같아요. 저도 저렇게 늙었으면 좋겠어요.”
“후후, 저 노인분들 말고 선생님 말입니다.”
“저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셔서 그런지 이제 말씀도 잘하시고 여유도 좀 보이십니다.”
우진은 매튜의 말에 괜히 멋쩍어 콧등을 긁었다.
“그냥 어르신들 얘기 들어준 거죠. 이사 가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예 시골 가셔서 사신다는 거 같아요.”
“그렇군요. 선생님, 저기 건물 보이십니까? 저 정도면 한 250㎡ 되는 거 같아 보입니다.”
우진의 얘기에 별 관심 없다는 듯 매튜는 신호를 기다리며 옆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우진은 피식 웃고는 그동안 입 다물고 있었던 매튜의 말에 맞장구쳤다.
“괜찮은 거 같아요. 저 정도면 아까 어르신들 집이랑 마당 합친 거랑 비슷하네요. 아…….”
우진은 순간 매튜를 향해 몸을 틀고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매튜 씨! 저 할아버지 댁 땅은 어때요? 집 내놓으신다고 하셨거든요! 건물 새로 짓기 적당하지 않아요?”
“도로보다 조금 안쪽이긴 하지만. 음…….”
그러자 매튜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바로 차를 돌렸다.
* * *
며칠 동안 노부부의 땅에 대해 조사를 하고 다닌 매튜는 I. J 회의 시간에 앞에 나와 설명을 이어갔다. 우진이 알아듣는 얘기라고는 다행히 신축이 가능하다는 것뿐이었다. 우진은 일단 매튜의 얘기가 끝나기까지 기다렸다. 건축사무소에서 견적까지 받아봤는지 건폐율과 용적률 등 알아듣지 못하는 얘기가 계속된 뒤에야 매튜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러니까 몇 층이 가능해요?”
“250㎡에서 주거지역으로 분류돼 건폐율은 70%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175㎡로 지하 1층, 지상 4층입니다. 4층은 면적이 조금 좁아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매장의 반을 뚝 자르면 비슷할 겁니다.”
“와, 그래도 남겠어요.”
“그리고 제조업도 가능해서 한 실장님까지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야간에는 소음 때문에 법으로 규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분을 제외하고는 위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한번 보시죠.”
매튜가 사진을 보여주자 노부부의 집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무슨 공터가 집보다 넓은 게야?”
“다 합쳐도 할아버지 대구 집이 더 넓잖아요.”
“음, 사진으로 봐선 모르겠는데.”
준식을 통해 사람들의 궁금증을 들은 매튜가 곧바로 설명했다.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자식들하고 같이 살려고 사뒀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11개월 남았나? 그때까진 가능한 겐가?”
“건축 설계 기간 포함 11개월 안에 가능합니다. 공사대금은 진행되는 순서에 맞게 지급하면 될 겁니다. 일단 땅을 구매하는 게 문제입니다. 다주택도 아니라 다행이지만, 대지 구매하는 비용만으로도 16억 예상됩니다. 구매는 가능하지만, 그 이후로는 대출이 필요합니다.”
준식과 함께 앵무새처럼 두 사람의 말을 통역하던 세운이 대뜸 물었다.
“그런데 내가 가보니까 주택가들 많던데. 우리 들어가면 막 반대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매튜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전혀. 오히려 환영하더군요.”
“누가 환영해?”
“박정훈 씨.”
다들 처음 듣는 이름에 다들 아냐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다들 모르는 눈치였기에 세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 박정훈이 누군데?”
“통장이라고 했습니다.”
“야이! 대뜸 박정훈이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어제 건축사하고 찾아갔을 때, 그 사람이 말을 걸더군요.”
“그래서?”
“사실대로 I. J 들어올 자리 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근처 사는 사람들 나와서 저하고 악수까지 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우진은 악수하고 있었을 매튜를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매튜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저희가 들어가면 구에서 기회로 삼아 당연히 혜택 및 홍보를 할 겁니다. 그럼 땅값은 저절로 올라가겠죠. 주변 주택가는 상당히 우호적입니다.”
* * *
며칠 뒤.
매튜는 매장에서 거의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건축설계 사무소에 취직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쪽 사람들을 괴롭혔다. 언어 문제 때문에 준식을 끌고 다니는 채로. 우진은 매튜가 붙어 있으면 그만큼 일이 더 잘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히려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우진은 예약을 받기 전, 회의에서 나왔던 얘기를 SNS와 홈페이지에 올려두라고 지시했다.
“대표님? 안내문 올렸습니다?”
“벌써요?”
“빠릅니다?”
팟사라곤의 말에 우진은 피식 웃고는 내용을 확인했다. 아제슬을 하면서 매튜와 얘기를 나눴던 가격에 대한 공지였다. 예전부터 느껴왔지만, 우진은 지금 가격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기본 100만 원에서 추가되는 금액이 문제였다. 옷을 만들 때 일일이 들어가는 자재들을 설명해 주지만, 몇몇 사람들은 의심을 품기도 했다. 그럴 바엔 아예 기본 금액을 올리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해 이번에 공지로 올리게 되었다.
반응은 예상한 대로 곧바로 나왔다.
-ㅅㅂ 돈 좀 벌었다 이거네.
-소비자를 개돼지로 아는 거야. 그러니까 마음대로 막 올리는 거지.
-ㅇㅈ 아직도 I. J에 목매는 흑우는 없제?
우진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글을 읽어 내려갔다. 예전이라면 상처받았을 텐데 그동안 하도 겪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넘겨졌다. 거기에다 댓글 중에 I. J를 이용한 사람이 적다 보니 옹호하는 글들은 보기 힘들었다. 글들을 계속 보던 중 갑자기 영어로 이상한 글이 올라왔다.
-I. J 토트백! 사고 싶은데 어떻게 사야 됨? 예약하면 살 수 있나요?
“토트백?”
I. J에서 토트백을 만든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예전에 젊은 신혼부부, 그때를 제외하고는 토트백을 만든 적이 없었다. 우진이 갑자기 나온 토트백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계속해서 토트백에 대한 얘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영어와 스페인어였다.
우진은 알아볼 수 있는 글들만 읽은 뒤 사무실로 올라가 토트백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검색을 해봐도 예전에 문 매거진에서 작성했던 기사만 나왔다. 우진은 사람들이 왜 갑자기 토트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알 방법이 없었기에 우진은 그저 댓글을 보고, 댓글을 단 사람들의 계정도 방문했다. 그러다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 프로필 사진에 갓난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우리 토트백 맞는 거 같은데.”
“제가 알아봐 드립니까?”
“어! 카우 씨! 알아봐 줄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잠시만요?”
팟사라곤은 자신 있게 대답하더니 갑자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때, 우진이 보고 있던 I. J 공식 SNS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토트백이 갑자기 무슨 얘기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