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삼청동 1
부부는 우진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가워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어떻게 왔어요. 아, 식사는! 식사는 했어요?”
“이이는, 이런 데서 드시겠어?”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우진은 지금 모자 가게의 모습이 상당히 익숙했다. 우진은 가볍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감사하지만, 밥은 이미 먹었어요. 삼청동 구경 왔다가 모자 만드는 법 알려주는 매장은 처음 봐서 들러봤어요.”
“하하, 제 자랑 같아서 말하기 좀 그런데. 하하, 삼청동에서 월드 HAT 모르면 간첩이죠.”
“그렇구나.”
“모자 만드는 걸 배우러 다니시진 않을 거 같고. 아! 여기 근처 매장들하고 거래 트려고 하시나 봐요? 어떤 매장이 됐든 I.J하고 거래한다고 소문나면 삼청동 거리 분위기가 확 올라가겠네요.”
“아, 그건 아니에요. 그냥 구경하러 왔어요.”
그때, 남자가 우진의 손에 들린 모자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 모자 사신 거예요? 이 동네 좋은 모자 많죠, 하하.”
우진은 다시 매튜를 힐끔 보고선 들고 온 모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남자가 모자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보울러 같은데. 모양이 신기한데요? 크기 보면 아동용 같은데, 이걸 왜 사셨어요? 하하.”
“아, 선물용이에요.”
“가만 보자. 모양이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디자인은 예쁘네. 어디서 사셨어요? 이 동네에는 이런 디자인 없을 건데. 한번 봐드릴까요?”
우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수락하자 남자는 모자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한참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와, 양털로 만든 울 펠트네요. 그런데 이거 원단 자체를 이렇게 쓰면 안 되는데. 흠, 게다가 아무리 펠트 원단이라고 해도 이렇게 딱딱한 거 보면, 스팀으로 각 잡은 게 아니라 안을 완전 누빔 처리했나 본데요? 요새는 아무리 명품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누빔 처리 안 할 텐데.”
모자 하나 만든다고 스팀기까지 구매할 순 없어서 우진이 선택한 방법을 바로 알아차리는 남자의 말이 흥미로웠다.
“어휴, 이건 뭐 심지를 쇳덩이로 넣어놨나, 무슨 헬멧 대용으로 써도 되겠어요, 하하.”
손가락을 구부려 모자를 두드리는 모습에 우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네요. 요새는 이렇게 만드나……?”
“왜요?”
“모자를 꽤 많이 만져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처음 봐서요. 아! 그렇구나!”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 남자는 손가락을 튕겼고, 우진은 기대하며 그를 바라봤다.
“이거! 장식용이죠? 그렇지, 장식용이면 말이 되네.”
우진은 상당히 멋쩍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장식용 모자하고 일반 착용하는 모자하고 달라요?”
“그렇죠. 아무래도 장식용은 굴러다닐 텐데, 형태 유지하려면 이렇게 해야죠. 일반용인데 이렇게 딱딱하면 진짜 헬멧도 아니고 못 쓰고 다니죠. 제가 한번 보여 드릴까요?”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자신의 작업대로 안내했다.
“원래 수제 명품을 만들 때는 두상부터 따고 석고부터 제작해서 만들거든요? 하하, 이건 뭐 그냥 차이점을 보여주는 거니까.”
석고는 없어도 스캐너로 제작한 3D를 바탕으로 모자를 제작했던 우진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울러 형태가 딱딱해 보인다고, 저기 저 모자 정도로 딱딱하면 안 되거든요. 일단 심지를 모양 유지한다고 전체로 사용하면 안 돼요. 조금 얇게 해서 정수리 쪽 동그란 모양으로만. 그러고 나서 심지를 바탕으로 양털로 펠트를 직접 제작해야 해요. 그래서 석고 모형이 필요한 거거든요. 거기에 붙여서 만들면 끝이죠.”
우진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도 알아차렸다. 형태를 유지하려고 모자 전체에 심지를 박았고, 그 심지를 바탕으로 직접 제작한 펠트가 아닌 펠트 원단 자체를 사용하다 보니 모양이 잡히지 않았다.
“대충 이런 차이죠. 이거 뭐,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디자이너 앞에서 말하려니까 부담되는데요? 하하.”
우진은 자신에게 힌트를 준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때, 갑자기 가게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언니! 오빠! 이것 좀 빨리 해줘.”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에, 남자는 우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손님을 맞이했다.
“왜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뭔데.”
“이거 ‘루피’ 모잔데 뒤에 사이즈 조절 밴드가 끊어졌대.”
“그것도 못해? 도대체 뭘 배우고 간 거야.”
“아니! 급하다고 하니까 그렇지. 오빠랑 언니가 잘하잖아. 그리고 이거 원단도 우리한테 없고!”
“줘봐. 음, 금방 하겠네. 2만 원.”
“왜 2만 원이야. 만 원만 받아!”
“야, 너 이거로 한 5만 원은 받을 거 아니야! 양심이 좀 있어라.”
“진짜 너무하네! 알았어! 2만 원 콜! 대신 빨리빨리!”
남자는 우진에게 웃으며 손을 올리더니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모자를 가져온 여자는 우진을 봤음에도 알아보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마음이 급해서인지 주인을 재촉하기만 했다. 오히려 몰라보는 게 편한 우진은 작업하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옆에 있던 매튜가 그런 우진에게 입을 열었다.
“볼일 더 남으셨습니까?”
“아, 네. 인사만 하고 가려고요.”
우진은 작업하는 남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런데 뭐 살필 새도 없이 뚝딱하더니 모자를 들어 올렸다.
“자, 2만 원 줘.”
“완전 도둑이네! 여기! 나 간다! 고마워!”
“도둑은 네가 도둑이고.”
모자를 가져온 여자가 사라지자 남자는 다시 우진에게 다가왔다.
“하하, 이 동네에서 가끔 가다 뭐 급한 거 맡기기도 해요. 이 동네 매장들이 전부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하하.”
“모자 종류는 다 만드시나 봐요.”
“그럼요, 하하. 저기 저 모자들은 재고 처리라서 2만 원입니다. 저기 진열된 건 5만 원부터 있고요.”
우진이 남자가 가리키는 쪽을 보자 수많은 모자 종류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모자를 살펴보던 우진은 문득 아제슬 작업을 하던 때를 떠올렸다. 간혹 모자가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모자까지 전부 만들고 싶었지만, 장 노인의 만류로 잠시 접어두었었다. 그런데 남자를 만나자, 매장에 저런 사람이 있으면 모자가 보인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우진이 좀 더 관심 있게 남자가 만든 모자들을 살필 때, 남자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그쪽은 선물로 나갈 모자들입니다.”
“아, 네.”
우진은 보던 모자를 내려놓고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를 영입할 생각은 없었다. 모자가 매번 보이는 것도 아니기에 남자가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래처 정도가 가장 적당했다.
I.J 특성상 수제로 작업해야 했고, 게다가 주문량이 한 달에 하나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실 다른 매장에 제안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런데 모자 판매가 생업이 아닌 이곳이라면 꽤 적합해 보였다. 물론 실력이 받쳐주는 조건을 충족해야 했지만.
그래도 우진은 혹시나 유니폼이 보이지 않을까 확인하려 손을 눈에 가져갔다. 삼청동을 돌아다닐 생각으로 렌즈를 끼고 왔던 우진은 살며시 렌즈를 뺐다. 아쉽게도 유니폼은 아니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실망도 없었다.
이제 남자의 실력을 보는 일이 남았기에 우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모자도 제작하세요?”
“하하, 그냥 선물용만 가끔 제작하죠. 무슨 모자 만드시려고요?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어떤 모자 제작하시려고요?”
우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모자를 제작하려고요.”
“이 모자요? 흠, 저희는 카피 안 하는데. 예전에 한번 카피 때문에 이 동네 휘청했었거든요.”
“카피가 아니고요. 아는 동…… 음, 아니, 저희 숍 예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거예요.”
“아! 그래요? 어렵진 않을 거 같은데.”
“저희도 선물용으로 디자인한 거거든요.”
“음, 저희가 모자 제작은 안 하는데……. 그럼 대신, 사인하고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을까요?”
“저요?”
“네! 하하, 여기 가게에 걸어두면 좋을 거 같아서. 하하.”
우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도 웃더니 모자를 살폈다.
“크기는 이 정도로요?”
“네, 딱 그 크기예요. 제가 치수 확인했어요. 디자인 도면도 있어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내를 힐끔 봤다. 그러고는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5만 원…….”
“하하, 네. 물론이죠.”
“그럼 편하실 때 찾으러 오세요.”
“오래 걸리나요?”
“오래는 아니고요. 일단 펠트지 약품 처리하고 마르고 재단하고, 그러려면 적어도 5, 6시간은 걸릴 거예요.”
“그럼 그때 찾으러 와도 되나요? 제가 내일부턴 스케줄이 있어서요.”
“그러세요.”
우진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 * *
늦은 밤. 삼청동의 월드 HAT의 부부는 자신들이 만든 모자를 포장 중이었다.
“아, 이제야 다 끝났네.”
“그러니까 아까 그 모자는 주문받지 말라고 했잖아.”
“어떻게 그래! I.J 디자이너가 직접 주문하는데! 어휴! 무슨 한 시간 만에 돌아와서 사람 긴장되게 계속 지켜보고 있어. 시어머니도 아니고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지 계속 물어보고, 확인하고. 누가 보면 지가 만드는 줄 알겠어. 내가 20년 동안 모자 만들면서 그런 놈은 처음 봤네.”
“그러니까 성공하는 거야. 우리도 그렇게 꼼꼼하게 해야 해.”
“꼼꼼도 정도가 있지. 그래도 보는 눈은 있더라, 하하.”
아내는 피식 웃더니 남편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이구, 그랬어요? 유명한 디자이너가 모자 잘 만든다고 칭찬해서 좋았어요?”
“왜 이래. 그래도 뿌듯하긴 하더라. 하하.”
아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는 남편을 보더니 갑작스럽게 안았다. 그러자 남편이 잠시 당황하더니 눈치를 챘다는 듯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나왔구나?”
“응, 아까 당신 작업할 때.”
“안 됐어?”
“응, 이제 신용도 회복되는 중이니까 내년에는 될 거 같아. 힘내자, 신랑.”
남자는 한참을 말없이 아내를 안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고생시켜서 미안.”
“또 그러네. 그게 당신 잘못은 아니잖아. 운이 없었던 거지.”
“그래도 내가 하자고 했잖아.”
“같이 결정했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더 노력하자. 그래야 우리 딸 데려오지.”
남자는 아내의 말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청동에서 내로라하는 수제 모자 매장을 운영했다. 수많은 모자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스냅백이었다. 인터넷에도 줄곧 후기들이 올라왔고, 연예인들도 종종 구매하다 보니 대중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 보니 여러 곳에서 브랜드 론칭하자는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결국 남들이 제의했으면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수제 매장을 접고 혼자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리고 자신의 디자인으로 만든 스냅백을 필두로 모자 시장에 뛰어들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스냅백을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기에 초반 실적이 꽤 괜찮았다. 그런데 유행이 변하는 건 순식간이라고, 스냅백의 판매가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위기를 넘기려고 새로운 볼 캡 및 캠프 캡 등 여러 종류의 모자를 선보였지만, 단색 위주의 볼 캡 특성상 다른 브랜드들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없었다.
거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미흡하게 준비한 채 자신감으로만 시작한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가격만 비싼 그저 그런 모자가 되어버렸다.
준비 기간까지 해서 딱 1년 만에 망해 버렸다. 욕심내지 말고 자신만의 모자를 만들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너무 늦었다. 평생을 걸친 마련한 건물이며, 집이며 모든 것이 수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내뿐이었다.
다행인 점은 일을 더 크게 벌이기 전에 망했다는 것뿐이었다. 그 덕분에 건물과, 집 등 남은 게 없더라도 채권자들에게 상당 부분 변제가 가능했다. 그래도 여전히 빚이 남아 있었고, 지금도 꾸준히 갚아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파산 신청을 하지 않고 꿋꿋이 버틴 데는 이유가 있었다.
4년 전에 만난 아이. 당시 홍보를 위해 찾았던 보육원에서 4살 여자아이와 연이 닿았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던 부부는 자신들을 따르는 아이에게 마음이 갔고, 한참을 상의한 결과 입양을 결정했다. 그리고 친해지기 위해 만나는 기간 동안 아이가 더욱 가족처럼 느껴졌다. 아이도 자신들을 아빠, 엄마라고 부르다 보니 더 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사업이 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입양이 취소되었다. 그 당시 부부 모두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음에도 입양 취소 절차를 밟으러 보육원에 방문했다.
그러다 입양하기로 되어 있던 아이와 마주쳤고, 그때 어린아이가 한 말 때문에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아빠, 엄마. 또 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기에 또 오라고 한 말일 테지만, 그 말을 들은 부부는 아이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남들은 피도 안 섞였다며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부부는 그 아이를 호적에 올리기 위해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다.
그리고 올해 안에 빚을 청산할 수 있었기에 입양 심사를 다시 넣었다. 그렇게 몇 번을 도전했지만, 이번에도 심사가 통과되지 않았다. 남자는 무거운 마음을 정리하려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아내도 남편을 안고 있던 팔을 풀며 어깨를 팡 하고 쳤다.
“기운 내라고! 이번 주에 진희 만나러 가서 또 울지 말고!”
“안 울어! 잘나가다가 꼭 저래.”
“툭하면 울고, 아니면 애 앞에서 방귀나 뀌고. 저번처럼 힘주다가 똥만 지려봐!”
“아…… 참.”
남편은 아내의 장난스러운 말에서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미소를 지었다.